먹는 인간-헨미 요

[공감신문] 작년엔 정말 ‘쿡방’이 대세였다. 지금은 시들해졌을지 모르나 여전히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인스타그램엔 예쁘게 플레이팅 된 음식이 정사각형 프레임 속에서 식욕을 자극한다. 아직도 먹어보지 못한 다른 문화권의 음식이 넘쳐나지만, 한국엔 웬만한 문화권의 음식을 경험할 수 있는 음식점들이 많다. 

우리들은 매일 음식을 먹는다. 휴대폰에 저장된 음식 사진을 보면서 그때의 추억을 회상할 수도 있다. 연인, 친구, 가족, 때로는 혼자서 먹었던 음식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다. 단순히 ‘먹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분명 음식엔 영양소 이상의 것이 있다. 

(출처:mondosigi.com-안니발레 카라치 작품)

우리는 우리들의 식탁에 너무 익숙해져있다. 저자 헨미 요를 따라가며 음식을 접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식탁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방글라데시의 다카에는 부자들이 남긴 음식을 파는 시장이 있고,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에서는 굶주린 일본군이 마을 주민 수십명을 먹었고, 우간다의 소녀는 아이스크림과 초콜렛을 먹어보지 못했고, 난민들은 개밥보다도 못한 수준의 음식으로 생을 연명해 간다. 

나는 부자들이 남긴 음식을 먹지 않고, 인육은 상상도 할 수 없으며, 아이스크림과 초콜렛을 즐기진 않아도 먹을 수 있고, 개밥보다 훨씬 나은 수준의 음식을 먹는다. 오늘 점심에 김치 몇 점이 남은 김치 찌개를 버린 일이 생각나 괜히 숙연해진다. 

(출처: 작가의 사진)

수천 개의 입과 위장 속에 채워지는 것은 사상도, 주의도, 주장도 아닌 음식뿐이다. (타이)

잊지 못할 음식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페루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낡은 중고차로 여행하던 중, 자동차 부품이 고장나 시골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버린 적이 있다. 함께 여행하던 동행자와 나는 엄청난 패닉 상태에 빠졌고 해가 져버려 완전한 어둠에 빠져버렸다. 

십몇킬로미터 건너엔 작은 도시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고장 날거면 저기서 날 것이지, 우울해하고 있던 찰나 도로 근처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아벨 아저씨와 마주쳤다. 중간의 긴 이야기를 생략하고 결론적으로, 우리는 아벨 아저씨네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아저씨는 점심 이후로 한 끼도 못 먹은 우리에게 따뜻한 수프를 내주셨다. 솔직히 말하겠다. 아저씨의 마음은 너무나 감사했지만 수프는 식욕을 당기게 하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향신료가 뿌려진 수프엔 불은 파스타로 보이는 면발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배가 너무 고팠던 나머지 면은 못 먹더라도 국물이라도 먹자 싶어 숟가락을 들었다. 음? 이게 웬걸, 이 요상한 음식에서 한국에서 먹던 포장마차 우동맛이 나는 게 아닌가! 나는 국물과 면발을 남김없이 싹싹 긁어 먹었다. 

아벨 아저씨는 페루인, 우리는 한국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나고 자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왔다. 우리의 짧은 스페인어와 아벨 아저씨의 짧은 영어로 깊이 소통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먹고 말하는 입과 수프. 우리는 수프를 서로 나누며 페루에 대해, 한국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눴다. 마추픽추, 나스카 라인, 잉카의 나라 페루는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나에게 페루는 아벨 아저씨의 수프로 기억 되었다. 아직도 무엇 때문에 수프에서 그런 맛이 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벨 아저씨가 매일 먹던 수프가 나에겐 잊을 수 없는 한끼가 된 것은 식(食)과 생(生)의 기묘한 조합 때문이 아니었을까.

(출처:istockphoto.com)

각 민족이 선조나 문화의 기억을 맛으로 표현하는 것이 음식이다. 
그때문에 ‘음식’과 관련된 차별은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게 내 생각이다.
냄새가 나서 야만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외국인 주택을 불태워 없애려는 네오나치는 아니다. 
하지만 네오나치의 싹이 되기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

각 나라엔 ‘향’이 있다. 외국인이 우리 나라를 비하 할 때 ‘마늘 냄새가 난다’고도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정말 모르겠다. 요리를 할 때 다진 마늘을 즐겨 넣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 또한 외국인에게서 특유의 향을 맡는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향신료의 향이다. 분명 우리가 평소 맡는 향과 거리가 있고 사람에 따라서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와 다른 향이 난다고 해서 그를 비하할 수 있는가.

헨미 요는 독일에서 터키 음식 ‘케밥’을 쫓는다. ‘케밥이 독일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것은 1961년 노동자 파견 협정 체결에 따라 터키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서독으로 대거 들어왔을 때부터다.’ 헨미 요는 터키인이 2만 명 넘게 살아 작은 이스탄불로도 불리는 크로이츠베르크 지구를 돌아다니며 터키인들을 만난다. 터키인들은 “너한테서 냄새 나”, “양을 죽이는 야만인.” 따위의 말들로 멸시를 당해왔다. 독일 음식과 향이 다를 뿐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에 상처받는 이들의 마음은 누가 어루만져줄 수 있는가.

식욕이란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순수’한 민족이나 종교 따위가 있을 리 없다. (...) 
먹고 사는 것이 민족이나 종교에 대한 자부심보다 중요하다. (크로아티아)

우리는 먹는다. 몇 십억의 인구는 가지각색의 음식을 먹는다. 거기에서 몇 십억개의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것은 때로 비극이기도, 희극이기도 하다. 이번엔 저자의 말로 마무리 하려한다. ‘이상하게 보여도 이상한 음식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가는 곳마다 먹는 인간이 있고, 지금 그 음식을 먹는 데는 넘치도록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둘러싸고 알려지지 않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출처:인터파크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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