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은 한 사람만 죽이지만 막말은 말한 사람, 듣는 사람, 대상이 된 사람 세 사람을 죽인다.”
"죄는 처음에는 손님이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손님이 그 집주인이 되어 버린다."   

[공감신문]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누구든 크든 작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죄를 짓고 살아간다. 죄란 무엇일까? 어떻게 발생할까? 

유대인의 경전에 보면 죄는 활을 쏘아서 과녁 가운데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실수로 과녁을 빗겨 나가도록 쏘듯, 우연히 저지른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은 죄로 용서를 구할 때, ‘내 죄’가 아니라 ‘우리 죄’라고 말한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이는 죄를 지은 사람이나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 모두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한 사람이 저지른 잘못도 모든 유대인이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아도 늘 신께 용서를 구한다. 쌓아 온 선행과 기도가 모자랐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이 나쁜 행동을 한다고 여긴다.   

인간이 처음 죄를 지은 것은 언제일까?
성서의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에덴동산이라는 신화적인 땅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신이 인간처럼 지상에서 걷기도 하고 인간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신은 수많은 나무들 가운데 동산 한쪽에 우뚝 서있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지식의 나무를 심어놓았다. 

그는 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한다. 인간, 아담과 이브는 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 이로 인해 불복종과 원죄의 시작이 되었다. 결국 신은 아담에게 “너는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음식을 먹을 것이다”라고 명령했고 이브에겐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일은 신이 아담에게 명령한 소명이고, 산고의 고통은 이브에게 명령한 소명이 되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제쳐두고서라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죄를 짓는 사람을 보게 된다. 사람을 죽이거나, 사기를 쳐서, 도박을 해서 감옥에 가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양심의 죄로 감옥에 가는 사람은 없다. 살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양심의 죄를 짓는다. 

길을 가다가 만 원권 지폐를 주워 무엇을 샀거나, 우연히 여행을 하다가 몰래 복숭아를 따 먹었거나, 하는 것은 본 사람이 없고, 주인에게 걸리지 않았기에 나만 아는 양심의 죄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소소한 죄를 많은 사람들이 짓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재수 좋은 날'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말할 것이다. 

누구나 법 앞에 서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스스로 또는 누군가에 의한 양심의 재판, 말의 재판을 많이 받는다. 길거리에서 주운 지폐가 '하루치 아기 간식값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또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 때문에 괴로워한다. 

생각해보면 법의 재판보다 양심이나, 말의 재판이 더 가혹할 때가 많다. 특히 진실이 아닌 진실로 포장된 말의 재판 때문에 자살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랬다. 

세상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지배하는데, 자기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중에 정말 절대 권력도 아닌 그저 전당포의 한 노파가 빈곤한 자를 홀대하는 것을 보며, '저런 사람을 죽이는 게 무엇이 죄냐, 오히려 이 사회의 정의를 일으키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의 나래를 펼친다. 또 '그것이 상대적 강자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많은 사람들이나 이 사회의 약자를 도와주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그는 “선택된 강자는 인류를 위해 도덕률을 넘어설 권리가 있다. 따라서 이 사회의 기생충에 불과한 저 전당포 노파를 죽여도 된다.” 고. 그래서 그는 이 생각을 용감하게 실천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뜻밖에도 극심한 죄의식이었다. 

결국 그는 나중에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법정에서의 심판을 자청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도 강조하듯 모든 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원칙으로 매듭이 지어진다. 다만 조금 일찍이거나 조금 느릴 뿐이다.  

우리의 삶에는 상처와 그늘, 그리고 욕망이 만드는 죄와 벌, 선과 악의 상승과 하락의 곡선이 반드시 있다. 그들은 상반되고 모순된 것들이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상생한다. 이질적인 모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 속의 풍경이다. 

가장 바람직한 생의 원칙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죄를 짓지 않고 자신의 유일한 ‘길’을 가는 거다. 다시 말해 매 순간 발걸음이 닿은 길이 바로 ‘목적지’를 향하는 한걸음이고 마지막 걸음이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길이 분명히 있음에도 자신의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한다면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한 길의 과정은 바로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일을 하고,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말한다. 자고 입고 사람들을 만나며 일을 하는 것이 생의 과정이니까. 그 과정 속에 선과 악이 존재하고 죄를 짓고 참회를 하고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선을 행할 때는 그것이 초래하는 어려움과 그것이 가져다 줄 행복을 함께 저울에 올려보고, 악을 행할 때는 일시적인 쾌락이 주는 즐거움과 그것에 뒤따를 불행을 함께 저울에 올려보라." 

정확한 지적이다. 무슨 일을 시도하든 여러 번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럼에도 실수가 있다. 또 삶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사람일수록 죄의 굴레에 더 많이 유혹될 수가 있다. 유혹에 자주 빠지는 사람일수록 죄를 많이 짓게 된다. 

나쁜 유혹을 물리치는 것도 용기이고 도전이다. 자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나쁜 운명과 맞서야 할 때도 많다. 나쁜 유혹을 물리치려고 애쓰는 괴로움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 걸음 나아가서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고 올바른 것을 지키기 위한 도전이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겨내야 당당히 자신의 유일한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길'을 가야 남보다 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간직하게 될 것이고, 감사하며, 스스로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편안하고 아름다운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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