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꿈은 짧으나 화려하고 현란하다. 한여름의 열대야가 계속되어 숙면이 어렵고 비몽사몽(非夢似夢), 뒤척이는 밤이 많아지는 시기다. 꿈은 우리 마음이 바라는 잠재의식의 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꿈은 불가능한 것이 없는 상상의 세계이기도 하다. 꿈속에서 우리는 사나운 운수나 불우한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몽환 비슷한 신기루를 보고 로또 당첨과 같은 행운의 사상누각을 짓는다. 

누구에게나 꿈은 하나의 악몽이 아니었다면 평소 바라던 유토피아가 꿈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겠나. 그러나 유토피아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 《장자》는 전한다. “득도한 사람은 꿈이 없다. 득도한 사람은 잊는 바가 없이 항상 깨어 있으니 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무슨 꿈이 있겠는가.” 알 수 없는 득도의 경지다. 

서포 김만중 선생의 구운몽

어느 여름날의 밤, 꿈에 평소 호감을 느끼는 여배우나 기생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여인을 희롱하는 유혹에 넘어가 진탕하게 즐기다보니 허망한 꿈이었다. 서포 김만중(1637~1692) 선생의 《구운몽》, 춘원 이광수(1892~1950)의 《꿈》이 비슷한 내용이다. 명작 <구운몽>에는 팔선녀(八仙女)의 화신인 재색을 겸비한 미인들로 가득하다. 진채봉, 계섬월, 영양공주(정경패), 가춘운, 적경홍, 난양공주(이소화), 심효연, 백능파 등 8명의 미녀가 양소유와 함께 한 주인공들이다. 소설 《구운몽》은 흐드러진 봄날 한 바탕의 꿈(一場春夢)을 그린 미인도(美人圖)다. 그들의 작품은 우리 인생도 눈부신 사랑도 무상하고 덧없는 짧은 꿈과 같은 것이라고 우리를 일깨운다.    

동아시아 해전사(海戰史)의 영웅 이순신

동아시아 해전사(海戰史)의 영웅 이순신(1545~1598) 제독의 《이충무공전서》에도 이런 꿈 이야기가 나온다. “새벽꿈에 어떤 미인이 혼자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운 꿈이었다.” 장군께서는 전란에 처한 나라 걱정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반측하다 푸른 바다로 기우는 새벽달이 활을 비출 때 잠시 깜박 잠이 든 사이 부질없는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비슷한 내용이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여유당전서》에도 보인다. “꿈에 한 어여쁜 여인이 찾아와 장난을 걸었다. 나 또한 마음이 동했지만, 조금 있다가 보내며 절구 한 수를 써 주었다. 잠이 깨고 나서 몹시 또렷했다.” 외진 유배지에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절망과 좌절, 체념으로 살아간 청수·고결한 선비는 꿈속에서도 몸가짐을 흩트리지 않았다. 다산이 이 때 써주었다는 시다. 

“눈 깊은 산 속 꽃 한 가지 어찌 붉은 깁을 두른 복사꽃 같으랴. 이 마음 이미 금강 철이 되었으니 설령 풍로를 가졌다한들 너를 어이할꼬.”  

국난의 전쟁과 치열한 당쟁이라는 생사가 엇갈리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덕행과 인품, 경세제민의 업적이 너무도 빼어난 두 분의 꿈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거의 일치한 것이 너무도 이채롭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옛사람 중에는 깜깜한 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자가 있었다.”라는 언급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음이 증명된다. 오래 전의 그들은 꿈속에서의 로맨스까지 감히 허락지 않는 높은 풍모를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경박하고 억지스러운 세태에서는 도무지 근접할 수 없는 고고한 처세가 아닐 수 없다. 

미인은 군자의 짝으로 어울린다고 한다. 그러나 함부로 서로 맹세를 하거나 섣불리 인연을 맺지는 않는다. 옛 현인군자들은 길을 가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면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돌려 눈길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고개를 숙이고 눈길을 돌리는 것, 또한 그 마음은 무엇인가를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새길 만한 일이다. 공자도 한탄했다. “나는 아직 색色을 좋아하는 것만큼 덕德을 좋아하는 군주를 본 적이 없다(吾未見 好德如好色者也).” 《성경》도 이를 경계한다. <마태복음> 5장28절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전한다. 여자를 보는 이런 눈빛은 후일 미국에서 이른바 카터 룩(Carter look)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일연(1206~1289) 선사가 전하는 사연이다. “그대가 이 몸을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이 꽃을 그대에게 바치오리다.” 

13세기 무인정권을 문풍(文風)과 문사(文事)로 보완했던 재사 이규보(1168~1241) 선생은 “그대가 나를 늙고 쇠약하다 여기지 않고 맛 좋은 술과 어여쁜 여인으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하니, 내가 어찌 굳이 사양하겠소.”라고 함께 즐기는 순간을 마다하지 않는 풍류를 선호한다. 

풍운아 허균(1569~1618)은 “식욕과 성욕은 하늘에서 부여한 천성이고 윤리 도덕을 만든 것은 성인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한 등급 높다. 나는 하늘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성인을 따르지 않는다.”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성인군자연하는 당시의 유학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자초했다.  

교산과 남다른 교우를 가졌던 해어화(解語花) 매창(1573~1610)은 “취한 손님 마음 두고 내 치마 잡네. 당기는 손길에 치맛자락 찢어지네. 그까짓 비단치마 아까우랴만 그대가 무안할까 그게 두렵네.” 허균은 이런 매창을 옹호해 “계생은 부안 기생인데 글을 할 줄 알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능했으며, 처신이 고고해서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10년 간 담소하여 가까이 지냈으나 음란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 <성소부부고>에서는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피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비취색 치마엔 향기가 아직 남아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가 설도의 무덤 곁을 지나랴”고 그녀의 박명한 생애를 연민했다.

황진이(黃眞伊)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며 많은 한량들의 떠나는 발길을 되돌렸고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이거든 구비구비 펴리라.”고 절창을 부른다. 

영문학자 금아 피천득 선생(1910~2007)은 수필 <순례巡禮>에서 ‘동짓달 기나긴 밤을…’을  인용한 후 “그 정서의 애틋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수법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54수중에도 이에 따를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마 어느 문학에도 없을 것이다”고 극찬했다. 

백호 임제(1549~1587)는 명기 황진이 없음을 아쉬워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일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황진이는 한국역사에서 가장 사랑을 받은 여인 중의 하나다, 황진이는 박연폭포, 화담 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칭송을 받기도 한 미인이다. 시(詩)·서(書)·사(史)는 물론 가야금과 노래에도 일가를 이루었고, 사랑의 전설도 명월과 같은 그윽한 경지에 들었으니 천하절색을 넘어선다. 미모와 총명이 극에 이르렀으며, 끝내 속진(俗塵)의 삶을 버리고 금강산으로 표표히 들어갔다고 한다. 홍명희(1888~1968) 선생의 대작 《임꺽정》 <피장편>에는 황진이의 미모 등을 묘사한 글이 다수 나온다.  

홍명희(1888~1968) 선생의 대작 《임꺽정》

“...얼굴에는 분을 바르지 아니하고 의복은 검소하게 차리었으나 천연하게 아리땁고 요사치 않게 어여쁜 것이 진세 사람 같지 아니하였다...그 목소리까지 선악(仙樂)같이 들리었다...자네는 전생에 무슨 복을 닦아서 좋은 산수의 주인이 되고 요대(瑤臺) 선녀의 선생이 된단 말인가...눈이 저절로 가는 것을 내가 금치 못할 뿐이야...아름답고 어여쁜 것이 땅에서 샘솟듯 살 속에서 솟아나오는군...절대미인이란 칭찬을 받던 기생이다. 기생이라도 옷 호사는 아니했습니다그려. 지금은 고사하고 한참 불릴 때도 의복은 물어멈같이 차리고 다녔다더라...”

이덕무(1741~1793) 선생은 《대동시선大東詩選》 <선연동嫸娟洞>에서 “무덤, 무덤, 무덤들, 저길 보게나. 푸른 풀은 무녀巫女처럼 춤을 추는데 지금도 분 내음 풍겨 올 듯. 이봐, 고운 얼굴 자랑 말게나. 모두 자네처럼 예뻤었으니.”라고 읊는다. 선연동은 색향色鄕으로 이름 높았던 송도(개성) 기생들의 무덤, 공동묘지가 있던 곳을 말한다고 한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은 <거리>에서 노래한다. “별별 여자가 더 지나간다. 화려한 여자가 나는 좋구나. 내일 아침에는 부부가 되자. 집은 산 너머가 좋지 않으냐...오오 거리는 나의 모든 설움이다.”

조선 단종~세조~성종 때의 뜻과 같지 아니한 시국을 야인이 되어 건너갔던 생육신 추강 남효온(1454~1492)은 자신의 처지를 <육액六厄>이라 표현하며 세태를 냉소했다. 용모가 추해서 여색을 가까이 하지 못한 것. 집이 가난해서 술을 충분히 마시지 못한 것. 행실이 거칠어 미친 놈 소리를 들은 것. 허리가 곧아 높은 분을 화나게 한 것. 신발이 뚫어져 뒤꿈치가 돌에 닿은 것. 집이 낮아 이마를 대들보에 부딪친 것. 글의 하나하나가 벼슬과 출세에 뜻을 잃고 세상을 버린 죽림칠현과 다를 바 없다. 체제에의 순응을 포기한 자유로운 삶의 함의를 보이면서도 그가 바란 세상과 인생의 어떤 유토피아적 상황에 대한 갈구(渴求)를 짐작케 한다.

《천일야화》, 환상적인 《아라비안나이트》는 결국 잠 못 이루는 1,000일 이상의 기나긴 밤에 일어난 먼 나라의 꿈같은 설화들의 모음이다. 가공의 연애와 모험, 교훈과 우화, 낭만과 현실이 뒤섞인다. 겨울밤에 비해 다행히도 크게 짧은 것이 여름밤이다, 뜨거운 여름밤의 하루쯤은 하늘에 펼쳐진 별들을 보며 이제 잔해가 되어 사라진 먼 추억들과 그래도 아직 남아 있을 어떤 꿈들을 다시 뒤적인다. 

여름이 또 지나가면 우리는 시인처럼 노래할 것이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며들게 하십시오...그러다가 독서하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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