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이 에로틱한 생활을 꿈꾸지만 동시에 그것이 그들의 불행, 욕구 불만, 질투, 열등감 그리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에 에로틱한 삶을 증오하죠.’ / 밀란쿤데라, <정체성>중에서

[공감신문] 남산이라 그런가, 다들 산 밑에 살아서 다람쥐마냥 무위도식이 꿈인 건가, 왜들 그렇게 ‘못’ 아니, ‘안’? 아니, 못? 하며 살까. 먹고 사는 문제들엔 그리 치열하면서 왜 ‘그쪽’에 있어서는 안빈낙도하냐구. 무엇을 위해 그리 돈을 버는가? 

TV프로그램이나 영화, 소설, 에세이를 보면 다들 ‘잘’만 하고 살던데, 청춘이 만개한 데다가- 꽤나 멀쩡하게 생긴 내 주변인들은 그 ‘꽃다발’을 누군가에게 안기지 않? 못? 않고 있다. 음, 지금 누군가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네. 1. 알고 보니 구미호여서 100일 밤을 독수공방 지새워서 인간이 되는 야망이 있거나, 2. 멀쩡하게 생겨 보이는 그 얼굴이 사실은 가면이거나, 3. 사실은 오늘 아침에도 하고 나왔는데 괜히 내가 열등감에 빠질까봐 안 하는 척 하는 거거나 …. 근데 이거 모두 다 아니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그것은 매스컴이었다.

몇 년 전 방영했던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았었다. 거기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남녀’의 미묘한 심리차이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툭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거기에 사연을 보내는 그 사연자 빼고는 다- 알지 않나? ‘그린 라이트’인지, 아닌지! 정말 ‘너 빼고 다 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프로그램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어디 사는 아무개’씨의 은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우린 누구나 관음증적 취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막 혼례를 치른 신혼 방 창호지를 뚫으려 손가락에 침을 바르던 유전자가 어딜 가겠나!아무튼 나 역시도 이런 아무개들의 이야기를 즐겨 듣다가, 듣다가, 듣다 보니- 아니, 좀 궁금해지다가 화가 나는(?) 지점이 있더라? 진짜야? 다들 그렇게 ‘잘’하고 다녀? 그리고 다들 그렇게 속궁합이 쉽게 잘 맞는다고? 

물론 방송에 소개된 사연들은 대다수가 아닌 채택된 일부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다들 그렇게 머릿속이 축제를 벌이는 기분이었냐고 다시 되묻고 싶다. 사연들은 하나같이 이런 패턴이지, 난 몇 살에 무슨 직업군이고, 나(혹은 상대방 이성)는 연예인 누구 닮은 꼴에 어떤 체형이며,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이성들로부터 ‘-하다’라는 말을 종종 들으며, 그 사람과의 섹스는 (효과음) 굉장했어요. 
한 통계에 따르면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는 여자는 1/3밖에 되지 않으며, 100명 중 한 명 만이 매번 느낄 수 있고, 10명 중 한 명은 평생 느껴본 적이 없단다! 이건 횟수랑 관련이 없는 얘기다. 그리, 쉬운 게 아니라고. 
여자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좋아하는 마음이 크면 섹스 역시 거기에 사로잡힐 순 있다. 남녀 복상사의 원인 중 남자는 심장질환이 많은 반면 여자는 뇌 질환이 많다고 한다. 남녀간 섹스를 할 때 어떤 본능이 지배적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통계다. 여자들은 침실의 들어서는 순간부터 섹스, 라고들 하지 않나. 이렇듯 복합적인 사고 구조를 가진 여자가 생각하는 속궁합의 기준은 남자들과는 좀 다를 순 있지.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성생활은 어떠한 지 모르겠다. 마녀사냥에 소개된 사연들처럼 활발할 수도, 혹은 내 주변 지인들처럼 아무 문제 없이 멀쩡하게 생긴 얼굴과 지갑, 유머를 겸비해도 못? 안? 못하고 살고 계실 수도 있겠지. 친구들끼리 ‘넌 자웅동체야’라고 말하며, 그 중 1등 자웅동체는 ‘날 따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열망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도 머릿속에 그랜드 카니발이 벌어지던- 잊지 못하게 끝내주는 섹스를 했던 경험이, 살면서 적어도 한번쯤은 있지 않았겠어? 물론 좋은 거니 또 해보고 싶을 거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마 마찬가지 일 거고… 만일 여러분이 매스컴에 나오는 사람들 같지 않더라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다행이지 않나. 정말이다. 여기 에로틱한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작가 밀란 쿤데라가 써놓은 문장들을 보시라.

“물론이겠지. 누가 당신에게 당신 성생활에 대해 묻는다면 진실을 말하겠어요? 질문하는 사람이 당신 이름조차 모르고 혹은 전화로 질문해서 당신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은 거짓말을 할 거예요. ‘섹스를 좋아하세요?’ ‘뭐라고요!’ ‘몇 번하세요?’ ‘하루에 여섯 번요.’ ‘포르노를 좋아하세요?’ ‘미치게 좋아하죠.’ 그러나 이런 건 모두 거짓말이에요. 상업적 관점에서 볼 때 에로티시즘은 애매한 거죠. 모든 사람들이 에로틱한 생활을 꿈꾸지만 동시에 그것이 그들의 불행, 욕구 불만, 질투, 열등감 그리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에 에로틱한 삶을 증오하죠.”
(밀란 쿤데라, <정체성> 중에서)

아, 통찰력! 내가 이러니 밀란 쿤데라를 사랑할 수 밖에. 음, 자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그러니까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로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꾸거나’ ‘증오’하고 있단 사실이다! 아, 난 대다수였던 거네. 진짜 ‘하루에 여섯 번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는 애들치고 제대로 된 애들이 없다고 언니들이 그랬는데? 

그럼 왜들 이렇게 에로티시즘을 애증하게 된 걸까? 우리는 왜 이런 것에 열등감을 느껴야 하나? 아니, 안 그래도 이 각박한 현대사회는 우리 자존감에 마구마구 스크래치 내는 것들 투성이인데 왜 성생활에까지 그래야 되냐고! 이게 다, ‘자본주의’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위에서 인용한 문장들에 앞서 이렇게 썼다.

다수의 구매자를 끌어들일 이미지의 환상적 회로에 제품을 내놓는 거예요. 이미지를 추구하다 보니 우리에게는 섹스를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진정한 성생활을 만끽하는 자는 극소수입니다.

자본주의는 이미지를 판다. 
‘왠지 저 차를 타면 내가 잘나가 보일 것 같아.’ ‘왠지 저 백을 들면 내가 더 우아해 보일 것 같아.’ ‘왠지 저 청바지를 입으면 내가 되게 탄탄해 보일 것 같아.’ ‘왠지 저 시계를 차면 뭐든 잘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가 더 ‘섹시해 보일 것 같아.’
암, 그래야지, 왜? 
못하고 있으니까! 안하고 있으니까! 혹은 하고 있더라도 더 죽여주는 상대랑, 더 죽여주는 곳에서, 더 죽여주게 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자본주의는 외치지, 여러분 섹스 하세요! 이, 못난 것들아! 섹스도 못하는 못난 것들아! 이거 사면 너 섹스 엄청 잘할 수 있어! 죽여주게 말이야!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현대의 인간들은 ‘소유’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유’로 자신을 드러내는 인간이 되기보다는 ‘존재’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만… 아니 지금 어떻게 그래? ‘To have OR To be’ ? 아니지, 지금은 ‘To have WITH To be’가 되어야지. 
사실 당신의 ‘To be’,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안 섹시한 인간일 수도 있다. 지금 뿐만이 아니다. 평-생을 바쳐도 에로틱한 생활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 운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 것이다. 그걸 사면 왠지 에로틱하게 살 수도 있을 것만 같아서. 소유적 인간이 되는 것이지. 그래요, 뭐든 해보아요 우리. 그러다가 하나가 얻어걸릴 수도 있잖아?

음료수를 팔면서 ‘흔들어 주세요’라 말하고,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못생겨도 맛은 좋아’, 침대를 팔면서 ‘딱딱해야 좋은 거구나’, 면도기를 팔면서 ‘더 깊숙하게 더 편안하게’라 말한다. 광고 카피들인데, 어머… 그렇죠? 듣고 보니 엄청 에로틱하지! 원래 광고는 다 ‘유혹’이라니까. 
근데 음란한 건 광고가 아니다. 거기에 매혹 당하는 우리들이다. 마치 ‘철수’란 남자를 좋아하는 나의 눈이, ‘철수 슈퍼’, ‘철수 세탁소’, ‘철수네 김밥’ 쪽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지. 에로틱한 삶을 동경하면서도 우릴 받아주지 않는 그 ‘철수’에 대한 증오 때문에 자꾸만 꽂히는 거다. 아, 그렇다면 딱딱해서 좋은 침대에 누워- 더 깊숙하고 더 편안한 면도기로 수염을 밀었을 남자와 키스를 하고 난 후, …(중략)… 음, 못생겨도 맛은 좋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때- 그 남자가 음료를 들고 와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 ‘흔들어주세요.’ 왜 또? 뭐, 언제는 하루에 ‘여섯 번’이라며! 자본주의 사회는 당신이 이런 꿈을 꾸기를 꿈꾼 답니다.

패션 브랜드 캘빈 클라인(Calvin Klein)과 모델 브룩쉴즈를 전세계적인 섹스심벌로 만든 것은 사실 끝내주게 섹시한 단 하나의 광고였다.


“독서가 영혼과 맞닿아 있다면 캘빈 진은 내 몸과 맞닿아 있죠.
내 옷장엔 캘빈 진이 일곱 벌이나 있어요, 만약 그들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난 타락하고 말 거예요, 돈이 생기면 캘빈을 사요. 그 나머지 돈으로는 집세를 낸답니다.
나와 캘빈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What comes between me and my Calvins? Nothing.”
나와 캘빈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니! 이건 정말, 히트다 히트! 청바지와 그녀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게 아닌가! (…)

당시 이 광고에 여러 단체와 여론들은 분노했었다. 하지만 에로틱한 열망과 증오에 사로잡힌 대중들은 이 청바지를 200만장이나 사버렸다. 맙소사. 역시 사람들은 모두 귀엽고 사랑스러워. 

아, 이렇게 파는 거구나. 다들 ‘갈망’하고 있는 거였어. 심지어 오르가즘(orgasm)이라는 단어는 ‘부풀어오르다, ‘충족’, ‘갈망’을 뜻하는 그리스어 ‘organ’-‘orgamos’-‘orgamus’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정말 자본주의의 영향이 확실한가보다! 구글에서 어원을 검색하다가 이 단어가 쓰인 빈도까지 알아버렸는데, 명확해도 너무 명확한 거 아니라고? 1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단어인데 말야. 

(google books, Ngram viewer)

오, 글을 파는 나도 그렇다면 에로틱한 제목을 지어볼 테다. 내 글을 읽으면 뭔가 에로틱한 삶을 살 게 될 것 같은 열망에 젖게 하고 싶어! 그렇다면 나도 에로틱한 삶을 풍요롭게 누리는 것처럼 보여야 하잖아? 근데 난 그런 ‘척’은 또 못하는데. 그렇다면 난 보기만해도 손대고 싶을 것 같은- 몸에 착 감기는 원피스를 사야 되겠는데… 오, 어쩔 수 없어! 에로틱한 글을 쓰기 위해, 어머 저건 사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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