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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조선시대, 양반들을 대신했던 직업들

[공감신문]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 수 없다. 그 이유도 참 다양하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한 돈이 없거나,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겠다. 또한, 아무리 시간과 돈이 넘쳐나도 “난 하고 싶은 걸 다 한다”고 말하기란 쉽지가 않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 

김학수 화백이 그린 조선시대 풍경

그런데, 과거에는 그런 타당한 이유 없이도 ‘그냥’ 뭐든 할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현재에 비해 ‘인권’이라는 의식이 희박했던 과거에는 ‘양반이 아니라서’, ‘여자라서’ 등 부당한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땐 돈이 어마무시하게 많더라도 신분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평민은 특권계층 밑에서 일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참는 것이 일상이었다. 다소 불합리해 보이지만 그땐 그랬다고 한다. 

요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직접 찾아보고, 선택해 이력서를 작성할 수 있다.

흔히 직업을 선택할 때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업으로 삼는다고 한다. 하지만 신분이나 성별 등에 따른 제약이 많았던 조선시대에는,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는 게 당연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많았다. 

특권계층이나 양반이 아닌, 평민들이 할 수 있었던 일 중에는 양반들의 손과 발이 돼 줘야 하는 직업도 많았다. 

‘흑립’ 조선시대 갓으로 다양한 관모 중 양반층에서 즐겨 쓴 갓이다.

이번 공감포스트에서 소개하는 이 직업들을 보면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공감포스트는 바로 ‘양반들을 대신했던 직업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공감포스트에 대한 뜨거운 지지의 댓글과 함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길 권장하는 댓글들이 많이 달리고 있다.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다만, 어떤 댓글들은 정말 아프다... 명치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부드럽게 지적해주세요... 둥글게 둥글게...

오늘 포스트는 최대한 역사적 사실을 참고해가며 작성했다. 그러나 참고 과정에서 잘못된 정보가 있다면 부디, 부드럽게 지적해주시길 부탁드린다. 


■ 책쾌(冊儈) : 걸어 다니는 서점

요즘은 책을 카페나 미용실에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기도 한다.

책이 흔해졌다. 서점에서만 책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제 책을 스마트폰, PC, 서점에서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나름 값나가는 ‘레어’한 책들도 최근에는 인터넷 쇼핑 등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다. 심지어 절판된 책도 중고 매물만 있다면 구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책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터다. 지금처럼 서점 등 책의 유통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책쾌’는 조선 시대 책의 상업적 유통을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주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등장한 서적 매매를 중개하는 상업적 유통업자 ‘책쾌’

책쾌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책을 팔던 중개상이다. 서책쾌, 서쾌, 책거간 등으로도 불렸으나, 그중 가장 흔한 명칭은 ‘책쾌(冊儈)’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책을 늘 소지했는데 주로 소매에 넣고 돌아다녔다. 책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바로 꺼내주는 방식으로 거래를 했다. 

이들은 특정 책을 구해달라는 주문도 받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주로 지식인의 집을 돌아다니며 신상 책들을 소개하고, 판매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특정한 책을 요청하면, 그것을 구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주로 지식인들과 거래를 하던 책쾌는 서책의 내용을 다 알고 있어야 했다.

한편, 책쾌는 대부분 책의 저자, 내용, 연도 등을 꿰고 있어야 했다. 그 덕에 조선에서 유명한 책쾌는 ‘박아한 군자’, 즉 학식이 넓고 성품이 단아하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능력자’ 책쾌는 구하기 어려운 고서, 고문헌 자료를 구할 뿐 아니라 중국 소설까지 유통했다. 그러나 규제가 많던 조선시대, 불온서적을 유통했다가 100명이 넘는 책쾌가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책이 싫은 사람들은 책쾌가 찾아오면 “안 사요”하고 도망갔을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서점이나 도서관을 이용하는 일이 잦을 것이다. 그런 여러분이 조선 시대에 살았다면, 어쩌면 책쾌를 찾으려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 방자(幇子/房子) : 이름 아님, 심부름꾼

청초한 조승우 옆 이 분이 바로 방자

‘방자’가 사람의 이름인 줄 아셨던 분들이 많았을 것 같다. 춘향이의 정인, 이몽룡 옆 그분의 직업이 바로 방자다. 아마 실제 이름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방자는 궁이나 관아에서 심부름하던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심부름꾼인 셈이다. 

방자는 여러 곳에서 일했다. 상궁의 집, 지방 관아, 군대 등... 또한 방자는 남자만 가질 수 있었던 직업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궁녀로 뽑히지 못하면 방자로 진로를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 방자는 궁녀들이 사는 방에 소속되어 심부름을 도맡았다.

궁에서 일하는 방자 중에는 ‘글월비자’도 있었다. 이들은 잔심부름은 물론, 궁 밖을 자주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궁 밖 사람들에게 문안편지를 돌리는 ‘외근’을 주로 했다. 또한 암행어사 발령 시 암행어사의 경호원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는 방자도 있었다.

영화 춘향뎐 속 방자

춘향전에 나오는 방자도 이몽룡의 아버지가 일하던 지방 관아의 ‘방자’였다. 관아에서 일하는 방자는 관할하는 읍에 공문이나 통신 등을 전달하는 일을 주로 했다.


■ 거벽(巨擘) : 대리 시험자

조선시대 과거 시험을 재현한 장면

사극을 즐겨 보는 이들은 거벽이 뭔지 알 수도 있겠다. 본래 거벽의 뜻은 특정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하지만 본래의 뜻을 비꽈서 시험을 대신 쳐주는 사람을 거벽이라 했다. 

거벽이 하는 일은 ‘대술’이었다. 남의 답안을 대신 작성해주는 행위를 대술(代述)이라고 했는데, 이 대술은 과거 시험장에서 흔히 일어났다.

주로 유명한 집안의 자제들이 가난한 지방 선비를 데려다 자신의 답안을 대신 작성하게 하거나, 과거 시험 답안지를 바꿨다. 이처럼 뭐든 다 해준다는 이유로 거벽을 유모라고 비하하는 경우도 잦았다. 

조선 후기에는 다른 사람을 시켜 답안을 작성하는 대술이 성행했다.

물론 대술은 부정행위 중 하나라 처벌 대상이었다. 대술이 적발되면, 대리 시험을 부탁한 사람과 대신 답안을 작성한 사람 둘 다 볼기 100대, 중노동 형벌 3년에 처했다. 또한, 이후 두 차례의 과거 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했다. 

거벽과 같이 일하는 사람 중 선접꾼도 있었다. 이들은 과거 시험장에 누구보다 빠르게 들어가 거벽이 시험 치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 선접꾼들이 치열하게 자리싸움을 하다 다치기도 하고, 심지어 죽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 곡비(哭婢) : 프로 눈물연기자

연기자들은 대본에 우는 씬이 있으면 울어야한다. 곡비 역시 우는 것이 업무였다.

영화배우들은 연기 도중 울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우는 것’이 업무인 사람들이 있었다. ‘곡비’들이 바로 그들이다. 

곡비는 상을 당했을 때 상주를 대신해 ‘곡’, 울어주는 일을 했다. 조선에서는 상을 치르는 중엔 곡비를 써서 곡을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이 죽은 조상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KBS 단막극 ‘곡비’ 속 곡비

과거의 국장은 장례절차만 해도 몇 개월이 소요됐다. 몇 개월간 상주가 늘 곡을 할 순 없어서 번갈아가면서 곡을 해야 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한데, 그중 양반은 소리를 내어 울 수 없기 때문에 곡비를 썼다는 설도 있다.

나중에는 국장뿐 아니라 양반들도 곡비를 썼으며, 심지어 평민들이 일반 장례에도 곡비를 쓰자 현종은 이를 사치라며 금했다.


■ 2017년, 지금

조선 시대엔 평민들이 양반을 대신해 울어줬다. 양반을 대신해 시험을 쳐줬다. 양반의 잡무를 돌봐줬다. 살펴보면 지금과는 아무래도 시대가 다르니 전부 불합리해 보인다. 하지만 그때 조선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특권계층의 손발이 되어주는 일이.

그때도 요즘처럼 살기 참 어려웠을 것 같다. 아니, 요즘보다 더. 당시 지배계급들은 “넌 이걸 잘 못 하니까, 하지 마!”가 아니라 “넌 그런 신분/성별이니까 안 돼!” 식으로 평민들을 제한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에 대신 맞아주는 직업을 ‘매품팔이’ 라고 했다.

조사해보니 과거엔 위와 같은 ‘대신맨’ 직업들이 참 많았다. 심지어 나라에서 내리는 형벌을 ‘대신’ 맞아주기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계급사회를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라도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이 있어야 했고, 물건을 팔아 돈을 벌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포스트 중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르다’, ‘이것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하시면 댓글을 꼭! 남겨주시길 부탁드린다. 부디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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