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호상(好喪)은 없다. 많은 이들이 아픔 없이 편안하게 간 사람의 죽음을 말할 때 종종 호상이라는 표현을 쓴다. 허나 조심스럽게 얘기하건대 호상은 없는 듯하다. 누군가의 죽음을, 아프지 않았다고 해서 그저 오래 살았다고 해서 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호상 :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

그렇다고 해서 ‘호상’이라는 말이 나쁜 뜻은 아니다. 그 말을 쓰는 데 있어 조심할 필요는 있다는 얘기다. 고단하고 길었던 삶을 호상이란 말로 압축해서 표현한다면 듣는 누가 기뻐할지 의문이다.

많은 사람이 ‘인생 웹툰’으로 꼽는 웹툰. [다음]

기자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웹툰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영향이 크다. 제26화 ‘호상’을 보면 주인공의 친구가 죽은 상황에 조문객들이 호상이라는 말을 한다. 
“그래도 호상이야. 일평생 해로하다가 두 분이 함께 같은 날 가셨으니”
이 말에 주인공이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이 있었다. 
“세상에 잘 죽는 게 어디 있느냐 말이야!!! 노인네가 오래 살다가 죽으면 다 호상이야?!!”

대개 여든이 넘어 돌아가실 때 ‘호상’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누가 호상을 말 그대로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해서 말하겠는가. 잘 알고 있다. 이해도 한다. 호상은 상주나 가족들을 달래려 하는 말이란 것을. ‘그래도 편히 가셨으니 더 이상 슬퍼하시지 않길 바랍니다’라는 의미로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임을 잊지 말자. 

이렇듯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오늘의 포스트 주제가 ‘안락사’이기 때문이다. 안락사는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죽음’을 뜻한다. 아름다운 죽음이라... 글쎄 사실 이 표현도 좋게 들리진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은 남은 이들에겐 ‘영원한 상실’일테고,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는 정리하기 힘들 테니까.

웰다잉법의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치료 결정에 관한 법’이다.

안락사는 불치병 등을 이유로 죽음이 임박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하고, 사망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음 달인 8월부터 ‘웰다잉(well dying)법’이 시행될 예정이다. 이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연명 치료를 멈추는 것이다. 

우리의 일이 아닌 것 같았던, 멀게 느껴졌던 ‘안락사’, 웰다잉법이 시행되면서 이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안락사의 시행이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같다거나, 생각조차도 하기 무겁다 느껴지거나, 이 자체를 반대하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말이다. 

■ 웰다잉법 (Well dying)

호스피스는 죽음이 멀지 않은 환자를 입원시켜 수명 연장보다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시설이다.

웰다잉법의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치료 결정에 관한 법’이다. 법은 2016년 1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이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로 연명 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연명 치료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네 가지가 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안락사를 허용한 나라는 네델란드로, 2002년 법안이 통과됐다.

환자가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안락사를 선택할 경우, 가족 2인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가족이 평소 환자가 연명 의료에 관해 어떤 뜻을 가졌는지 확인해 주면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환자의 뜻을 알 수 없는 경우, 가족 전원이 합의해야 하고 미성년자는 법정대리인이 대신 결정한다. 

웰다잉법은 다음 달인 8월 4일 시행될 예정이다. 

■ 죽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들

자국민이 아닌 외국인을 받아주는 병원은 스위스의 이 병원이 유일하다.

스위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졌다. 이유는 스위스의 한 조력자살 지원 전문병원이 외국인도 조력 자살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조력자살은 안락사 중 하나다. 다른 점은 안락사는 의사가 약물을 주입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조력자살은 의사의 개입 없이 환자가 직접 약물을 주입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스위스는 장기간 죽기를 원해 온 사람만 조력자살을 허용한다.

스위스는 1942년부터 조력자살을 합법화해왔다. 병원에 따르면 1998년 개원한 이후 올 1월까지 외국인 총 1967명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밝혔다. 

병원의 관계자는 인간은 삶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이 존재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기회 또한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2년부터 올 1월까지 조력 자살을 신청한 한국인이 18명에 달했다. 이들 중 몇 명이 실제로 안락사를 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 논란의 대상인 ‘적극적 안락사’

‘적극적 안락사’는 아무리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해도 생명을 앗아간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고 있다.

안락사에도 ‘적극적 안락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웰다잉법’은 앞서 말했듯 불치병을 이유로 인위적인 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하는 ‘소극적 안락사’다. 하지만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에게 진정제나 독극물을 투여해 생명을 끊는 것이다. 

2004년, 미국에서 10살짜리 아들을 안락사로 떠나보낸 엄마가 있다. 아들 델리크는 교감 신경계에 생기는 악성종양이 생기는 희소병에 걸렸다. 엄마인 신디는 델리크의 병에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를 정리하고, 아들의 치료에 전념했다. 

상태가 악화된 델리크는 신디가 의료진과 짜고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델리크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나중엔 휠체어에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으며 신디가 늘 안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암세포가 델리크의 눈에까지 퍼져 실명에 이르자 델리크는 괴로워했고 ‘죽여달라’, ‘죽게 해서 고통이 끝나게 해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에 신디는 ‘적극적 안락사’를 결심하게 됐다.

델리크는 1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델리크와 신디는 목욕과 산책을 즐기며 마지막 하루를 보냈다. 그 후 신디는 델리크의 몸에 있는 의료 장치를 제거하고 의사는 델리크에게 진정제를 투여했다. 

환자들이 안락사를 선택하는 이유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가 간병인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어서다. 간병인 역시 그렇다. 환자의 고통을 보는 것이 누구보다 가슴 아플 것이다. 이런 사례를 봐서는 ‘적극적 안락사’를 생명을 경시했다는 시선으로 볼 수만은 없을 듯싶다. 

■ 동물 안락사, 최선의 선택일까?

3명 중 1명꼴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시대다.

2017년 지금, 반려동물 1000만 시대다. 많은 이들이 동물을 사랑하고, 가족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좀처럼 유기견이 줄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집계한 유기견은 한 해 평균 6만 마리라고 밝혔으며 동물보호단체는 실제로 연간 12만 마리가 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휴가철, 동물을 고의로 유기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버려진 반려동물 3마리 중 1마리는 안락사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버려진 개들은 일정 기간 시에서 운영하는 동물보호소로 옮겨진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을 시 개의 소유권은 지자체로 넘어간다. 

소유권이 넘어간 순간부터 새 입양자를 찾아 나서지만, 찾지 못할 경우 한 달 안에 안락사 절차를 밟는다. 동물보호소마다 수용할 개체 수가 한정돼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절차이다.

동물단체에서 조사한 결과, 마취를 시킨 뒤 근육 이완제를 투여해 안락사시키는 비율은 매우 낮다. 마취 비용을 아끼기 위해 바로 근육 이완제를 투여한다고 한다. 이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는다.

상상하는 것보다 유기동물들은 더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키우지 않아야 한다.

인간은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을 안락사라 한다. 동물의 안락사, 과연 이들의 죽음이 안락한 죽음일까?

■ 안락(安樂)한 죽음은 없다

‘생명을 끊는다. 그것도 강제적으로’ 안락사를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겠다. 이를 잔인하다 여길 수 있겠으나 안락사를 선택하는 이들은, 또 찬성하는 이들은 더 잔인한 고통, 현실에 못 이겨 그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다.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한 것이다. 

환자든 가족이든 서로가 고통받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 안락사를 택했을지도 모르나, 그 어려운 선택의 결과를 지켜보기도 쉽지 않다.

‘의사는 환자를 끝까지 치료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 ‘생명은 소중하다’, ‘안락사가 생명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안락사의 문제는 절충안이 없는 문제기도 하다.

이러한 논란 중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세상에 안락(安樂)한 죽음은 없다는 것이다.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편안하다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다는 것이 즐거울 리는 없을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환자는 물론 보호자들도. 안락사에 반대하는 이들도 다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겠다. 이들처럼 의견이 갈리는 것도 생명을 존중해주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 시행될 웰다잉법 자체에 관해서도, 범위에 관련해서도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환자의 죽을 권리와 생명의 존엄성 그 사이에서 말이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