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얼마 전 세계보건기구(이하 WHO)는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했다. 개인적으로 매우 충격적인 뉴스였고,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저번 주 나는 ‘청소년 성소수자’의 고충에 대해 쓰면서, 1999년 WHO가 동성애를 더 이상 질병으로 분류하지 않기로 결정했었다는 이야길 언급했었다. 질병에 대한 심각성과 영향력은 의학 기술의 발달- 즉, 시대와 사회의 경제력과 평등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분류되었다니- 물론 여기엔 생물학적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들이 존재한다.
나는 이 시점에서, 아니 게임중독에 이야기하기 앞서 ‘중독’에 대해 반드시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어딘가에 중독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스트레스나 고립감은 이전에 전쟁을 겪었던 세대들과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지 아니한가.

Jean-Michel Basquiat, Andy Warhol <New Flame>

중독, 영어로 addiction인 이 단어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로 향한다는 뜻을 가진 ‘ad’와 말하다는 뜻의 ‘dict’가 결합된 단어라 한다. 이 중에서 ‘ad’는 라틴어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addictus’는 라틴어로, ‘항복한- 굴복한- 바쳐진’이라는 가진다. 즉, 항복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나를 바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 거기에, 기어들어가는 것이다.

최근 OCN에서 방영중인 <구해줘2>라는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있다. 수몰예정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 겪게 되는 이야기다. 나는 종교 역시 한편으론 ‘중독’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사실 종교야 말로, 나를 바치겠다고 말하는 것의 원톱이 아니겠는가!

나는 최근 방영분의 한 등장인물의 대사가 잊히지 않는다. 사이비에 빠진 것 같은 그에게, 아는 동생이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며 사이비들의 정체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금 이렇게 행복하고 평온한데 그들이 사이비든 사기꾼이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되묻는다.
아내를 잃은 와중에도 기도를 하는 그에게, 다시 동생이 다가와 정신을 차리라고 하니 “넌 내가 행복한 게 싫으니?”라고 묻는 장면은...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바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드라마 속 수몰예정지역의 사람들에게, 무슨 삶의 희망이 있었겠나. ‘주님’이 보이신 기적적인 희망의 증거들... 그것만을 부여잡고 싶었을 것이며, 진실을 외면하고자 자기합리화를 끝없이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이들과 과연 많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임 중독이야길 해보자. 소설<유령>(강희진 저)에서 리니지 게임에 중독된 탈북 새터민들이 묘사된다. 새 삶을 찾아 목숨을 걸고 온 남한. 하지만 일부는 무한 경쟁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불행을 느끼게 된다. 이런 그들은 리니지 세상 속에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남한 사람들이 자기 발아래 있다고 좋아하지만, 자기 발아래 일부는 자기와 함께 건너온 같은 새터민이기도 했다.

Jean-Michel Basquiat <Basquiat and the Bayou>

프랑스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 시집<악의 꽃>에 실린 ‘노름’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중략) 그 수많은 가련한 인간들이
쩍 벌리고 있는 심연으로 미친 듯 달려가, 제 자신이 피에 취해
결국 죽음보다는 고통을, 허무보다는 지옥을
택할 것을 부러워하는 나 자신에 대해!

도박과 게임을 같은 것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나는 중독자의 심정에 대해 이렇게 잘 표현한 시가 또 없을 거라 생각한다. “아우라(aura)가 느껴진다-”고 말할 때 쓰이는 ‘아우라’라는 말을 만든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보들레르와 <레 미제라블>을 쓴 빅트로 위고 등이 속해있던 ‘해시시 클럽’- 그리고 ‘도시’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도시가 가지는 ‘우연성’이라는 성격에 주목했다.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이 살아간다. 예상해볼 법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제 생각한 나의 오늘과- 실제 나의 하루는 매우 달랐던 것 같다. 도시나 번화가에선 그런 일들이 더욱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건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다.

이를테면 한 여자가 밤 12시 반에 거리를 혼자 거리를 걷고 있다고 치자. 인적이 드문 곳보다는, 도시에서 그녀에게 말을 거는 남자가 더 많을 확률이 크다. 심지어 그녀가 예쁘다면? 더 많은 확률을 갖게 된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확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시의 우연성, 그리고 도시가 제시하는 가능성이 본인에게 미치지 못하는 건... 자괴감에 빠지기 충분하다. 어린 나이에 이미 도박으로 돈을 다 탕진한 보를레르가 위의 시에서 ‘부럽다’는 표현을 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도박에선 일단 ‘판돈’이 있어야 테이블에 앉을 수 있으니까.

사실 중독은 어느 것에도 될 수 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 스스로를 바칠 수 있다는 얘기다.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보다 사실 더 중요한 건, 그가 어떠한 상황에서 그것을 마주하느냐는 것이다. 중독자가 중독되기 전의 상황이, 더욱 중요하다. 드라마 속 수몰예정지역의 사람들, 남한테서의 새 삶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던 소설 속 새터민들, 도시의 희망과 가능성이 정말 남의 이야기인 냥 바라만 보는 수많은 관람객들... 은 어딘가로 자신을 던져야만 했던 것이다.

캐나다 출신의 심리학자 브루스 알렉산더의 ‘행복한 쥐 실험’은 중독에 대해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실험으로 유명하다. 아주 더럽고 비좁은 곳, 그리고 이와 반대로 아주 쾌적하고 놀거리가 많은 곳 두 곳에 쥐들을 풀어두었다. 이곳에 일반 음료와 모르핀이 든 음료를 설치해 둔 것. 양 쪽의 쥐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쾌적한 곳의 ‘행복한’ 쥐들은 모르핀이 든 음료보다 그렇지 않은 음료를 더 많이 섭취하였으며, 반대편의 쥐들은 ‘행복한 쥐’들에 비해 최소 16배나 많은 모르핀을 섭취했다고 한다. 그들에겐 뛰어놀 공간도, 그 외에 놀 거리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 중 헤로인을 했던 이들이 많다고 한다. 헤로인은 마약 중에서도 중독성이 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용사들은 종전 후에 다들 ‘중독자’가 된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후에 헤로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즉 육체적/정신적 의존성이 상실된 것이다.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지금의 삶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게임을 몇 시간씩 한다고 해서 거기에 의존적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자신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런 이들은, 어딘가에 의존해야만 한다. 정신적 피난을 떠나는 것이다. 이들에겐 게임이, 술이, 운동이, 음식이, 섹스가, 쇼핑이, 마약이, 종교가, 혹은 사랑이 그 의존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것들에 올라타야만 흐르는 시간으로부터 고통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것들의 경우, 쉽게 누군가를 의존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한 ‘헤로인’과 같은 마약은 거기서 얻는 자극을 다른 곳에서 찾기가 어려워서 의존적이 될 수 있다. 술은 너무 쉽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들을 경험한다고 무조건 ‘중독’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랑에 빠져 거의 반나절을 사랑을 나눈 두 남녀가, 이후에 섹스 중독에 걸리는 건 아니잖아(...)

나 스스로, 혹은 누군가가 지금의 삶을 견딜 수 있는 지- 그걸 먼저 살펴야 한다. 나는 살짝 못 견디겠는 상황들이 자주 존재한다. 누군가 나에게 ‘그건 네가 멘탈이 나약한 탓이야’라고 비난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스스로 멘탈이 강한 줄 알고, 아니 강하다고 스스로를 속이다가 제대로 뒤통수 얻어맞아 봤으니까. 그런 오만함이야말로 제일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무엇에, 중독된 적이 있거나 되어있는가? 혹은 그럴 지도 모를 상태인지- 그게 아니라면 당신의 건강한 일상을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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