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시대에도 독립을 지킨 태국이 소수의 헤지펀드에 무릎 꿇어

 

[공감신문 김인영 기자] 1997년 7월 1일 자정, 홍콩 밤하늘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대영 제국 왕관」의 보석이라던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경축하는 축포가 터지고,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전세계에 대해 서구 제국주의의 종식을 선언했다. 155년전 대영 제국은 해적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빌미로 마약전쟁을 일으켜 중국 남쪽의 자그마한 섬을 빼앗았지만, 이름 없던 어촌은 보배가 돼서 중국에게 되돌려졌다. 중국 중심의 중화경제권이 형성되고, 아시아가 다음 세기에 세계 경제 중심지가 될 것임을 기뻐하며, 아시아인들은 이날의 의미를 새겼다. 앵글로색슨족의 모국은 이제 동아시아에서 완전히 깃발을 내리는 뜻깊은 날이었다.

▲ 홍콩의 야경. 1997년 7월 1일 홍콩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 서양에 의한 동양의 지배가 종식됐다. 다음날 아시아의 태국은 서양 자본에 굴복했다.

 

그러나 다음날, 태국 중앙은행은 마침내 월가 헤지펀드의 공격에 무릅을 꿇었다. 태국은 유럽 제국이 동아시아에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할 때도 독립을 유지한 자존심이 강한 나라다. 프랑스와 영국의 틈바구니에서 태국 왕국은 일찍부터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국가를 유지했다. 율브리너 주연의 영화 「왕과 나(King and I)」는 당시 태국이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렸다. 덕분에 태국은 베트남, 캄보디아와 같이 독립과정에 비극적 내전을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태국은 서양인의 무력이 아니라, 서양인들의 자본에 무릅을 꿇었다. 거대한 중국이 영국 함대 몇 척에 땅을 내준지 한 세기반이 지난후 태국은 국제투기꾼의 몇 푼 안되는 자금공세에 휘말려든 것이다.

 

7월 2일 타일랜드 은행은 그 동안 달러에 고정시켰던 환율제도를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1달러당 24 바트에 환율을 묶어두려고 발버둥치며 외환보유고를 풀었지만, 당해낼 힘이 없었다. 고정환율제를 해제, 변동환율제를 도입키로 한 것은 중앙은행이 달러를 풀어 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환율 상승, 즉 바트화 폭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태국 정부는 바트화 하락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차왈릿 총리는 TV 연설을 통해 󰡔바트화를 절하하면 태국은 가난해 집니다󰡕라며 결단코 환율을 방어하겠다고 선언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국제자본에 대항해 국민과 국내기업, 은행을 보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그러나 선진국 은행들은 태국에 빌려준 단기자금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고 돌려달라고 독촉해댔고, 외환보유액은 넉넉지 않았다. 이미 헤지펀드의 공격에 태국은 막대한 보유 외환을 써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10년전 중남미 국가들이 겪었던 것처럼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급정지)을 선언하고, 경제는 파국 상태에 이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센 폭풍이 부는 바닷가에 배를 묶어두어 부서지느냐, 닻을 끊어 바다 위에 띄워 보내느냐의 갈림길에서 태국 정부는 마침내 닻을 끊어버리기로 결정했다.

차왈릿 총리는 드디어 투기꾼들에게 항복키로 하고, 이틀전의 대국민 약속을 깨버렸다. 그리고 태국 중앙은행은 외국 자본에게 혜택을 주는 두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하나는 환율 안정장치를 제거해 바트화를 하락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금리를 올리는 것이었다. 외국 자본에게는 엄청난 이익을 돌려주는 것이지만, 국내 자본과 태국민에게는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조치들이었다. 총리는 국민들이 가난해 지는 것을 더 이상 막지 못했다.

태국정부의 항복이 발표되자, 그날 뉴욕 맨해튼 남쪽에 포진한 외환딜러들은 미칠 듯이 기뻤다. 그들은 환호를 지르며,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타일랜드 은행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하자 이날 하루동안 바트화는 1달러당 24.70 바트에서 29.55 바트로 무려 19.6%나 폭락했다. 태국에 100만 달러를 투자한 외국인은 하루만에 19만6,000 바트를 거져 얻는 폭리를 취하지만, 달러 빚을 지고 있는 태국인들은 그만큼 큰 부담을 안게 됐다. 태국 제품의 수출 가격이 낮아지고, 수입제품의 가격이 높아져 무역 적자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바트화로 표시되는 태국 은행과 기업의 대외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태국 은행과 기업이 지고 있는 부채가 700억 달러에 이르렀으므로 하루아침에 200억 달러에 상당하는 바트화 부담이 커진 것이다.

게다가 타일랜드 은행은 외국 자본이 태국 국경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금리를 대폭 인상했다.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게 빌려주는 단기 자금의 금리, 즉 재할인율은 하루만에 2% 포인트나 올라 12.5%로 치솟았다. 태국에 돈을 빌려준 선진국 뱅커들은 높은 이자 혜택을 누리지만 돈을 빌려쓴 태국 은행과 기업들은 이자 갚기도 벅찼다.

 

태국 정부와 언론들은 이 모든 원인이 미국의 헤지펀드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공격해 오지 않았더라면 경제 개혁을 통해 단계적으로 대외채무를 해소하고, 경제병을 치유할 수 있었는데, 벌떼처럼 덤벼든 국제 단기자본의 습격에 치명상을 당했다는 것이다. 고도 성장국가로 경제기반(펀더멘털)이 좋은 나라가 갑자기 파국으로 간데 대한 분노의 화살은 국제 투기자본으로 날아갔다.

태국언론의 타깃은 월가의 큰손 조지 소로스의 헤지펀드의 퀀텀 펀드였다. 1992년 영국 파운드화 폭락에서 단물을 빨아먹은 경험이 있는 소로스의 펀드는 40억 달러로 태국 시장을 공격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차왈릿 도박의 성패는 외국자본의 이탈을 막고, 환율을 진정시킬지 여부에 달려있었다. 차왈릿이 비장의 카드를 던진 그날, 태국 증권거래소의 SET 지수는 7.9%나 폭등, 잠시나마 승리의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서방의 자본들은 차왈릿 총리의 도박을 대단히 위험하게 바라보았다. 한 펀드매니저는 󰡔그가 미쳤거나, 대단히 용감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차왈릿 총리는 분열 직전의 연립 여당을 7개월째 이끌고 있었다. 외국 펀드들은 바트화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주식이나 채권, 외환시장에서 가격이 하락할 때 팔고, 상승할 때 사는 것은 투자자의 기본 원칙이다. 태국 중앙은행이 달러 보유자들에게 하루아침에 20%에 가까운 이상의 고수익을 보장했지만, 그들은 더 큰 것을 바라면서 태국 땅을 빠져나갔다.

 

태국 바이러스는 주변 국가를 순식간에 전염시켰다. 방콕 정부가 환율 밴드(제한폭)를 풀어버리자, 태국과 비슷한 경제모델을 유지했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등 주변국가들의 화폐가 일제히 하락했다. 말레이시아와 태국은 환율 방어를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했고, 특히 필리핀에선 오버나이트 금리(만기 1~3일의 단기 금리)가 하루전보다 두배나 높은 25%로 폭등했다.

▲ 태국 바트화가 인쇄되고 있다. 1997년 7월 2일 태국 정부가 변동환율제를 채택하자 바트화는 20%가까이 폭락했다.

 

그러나 태국 정부는 IMF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태국 정부는 한달 가까이를 버텼다. 재무 관료는 어느 나라나 IMF에 손을 내밀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태국 정부도 IMF에는 가지 않으려고 백방으로 뛰었다. IMF에 가면 준비된 패키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 지출을 대폭 줄여야 하고, 세금을 늘려야 한다.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은 물론 금리도 통제를 받아야 한다. 한 나라의 거시정책이 IMF의 다국적군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할 재무당국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태국 정부 관리들은 체면이 깎이는 것을 싫어했다. 바트화 폭락의 원인을 외국 자본의 공격에 있다고 생각한 태국 관리들은 고정환율제를 포기한 후 외국 증권사, 외환 거래자, 경제 분석가들을 비난했다. 7월 17일엔 방콕 경찰이 시내 악성 루머 유포 혐의로 2개의 외국 증권브로커 회사를 급습하기도 했다.

변동환율제를 도입하면 곧 시장가격을 회복, 진정될 줄 알았던 바트화는 바닥이 어디인지 모른 채 떨어지기만 했다. 7월말에는 바트화 환율은 1달러당 32 바트까지 올라 밴드를 풀고 난 이래 25%나 가치가 떨어졌다. 외국 뱅커들은 이것도 모자라 바트화가 더 떨어질 것을 기대, 바트화 투매를 계속했다. 지금이라도 바트화에 묻어두었던 달러를 빼내면 나중에 더많은 바트를 얻을 수 있는데, 달러를 빼내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1년 내에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외채는 450억 달러나 됐다. 200억 달러에도 못 미치는 보유 외환으로는 절대 부족했다.

이를 눈치챈 외국 펀드들은 12%의 금리도 모자라 2% 포인트 더 얹어주어야 한다고 배짱을 부렸다.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 지에 실린 한 외국 펀드의 말을 인용해보자.

󰡔중앙은행의 보유 외환은 통화전쟁에서 군자금이나 다름없다. 태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어하는데는 외환보유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면 태국 경제를 질식시킬 것이다. 금리 인상은 치명적인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 우리는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워싱턴의 IMF 본부에 있던 스탠리 피셔 부총재는 태국이 결정만 하면 자금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태국의 타농 재무장관은 IMF에 갈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7월 중순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말도 꺼내지도 못했다. 일본 정부가 단도직입적으로 IMF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자금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방콕 정부 내에서도 이제는 IMF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는 소리가 나왔다. 전직 재무장관 두 사람이 IMF에 지원을 요청할 것을 차왈릿 총리에게 건의했고, 총리실 경제수석비서관도 태국 경제를 살리는 길은 IMF에 가는 길밖에 없다고 건의했다.

타농 장관도 󰡔더이상 새는 물탱크를 막을 수 없다󰡕고 인정했다. 그 동안 통화정책을 종합지휘한 타일랜드 은행의 렁차이 마라카농드(Rerngchai Marakanond) 총재는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핫머니와의 싸움에서 중앙은행 총재는 비운의 운명을 당하고 말았다.

고정환율제를 해제한 후 한 달도 채 못 지난 7월 28일 태국 정부는 IMF에 수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대기성 차관(스탠드바이 론)을 제공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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