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 /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공감신문] 우연히 본 TV프로그램에서 반가운 얼굴이 나온다. 사춘기 시절, 나는 그의 작은 몸짓 표정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행복해했고, 또 슬퍼했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아이돌 오빠’였다. 중학교 시절 그의 어마어마한 팬이었던 나는, 미니홈피에 그의 사진첩을 따로 만들어 둘 정도였다. 이제는 친근해진 인상의 그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시절의 그를 떠올려본다.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아마 지금의 나라면, 20대 시절 그의 모습이더라도 그렇게까지 열광하진 않았을 것 같다. 한창 팬이던 중학생 시절을 거쳐 고2 때 첫 남자친구를 사귀며, 난 더 이상 그의 사진첩을 남겨두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와 좀 비슷한 느낌의 남자친구 사진 몇 장이 그 자릴 채웠었지.

그는, 그러니까 그 아이돌 오빠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짐승남의 매력이 뚝뚝 흐르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당시에 난 그런 외형을 가진 사람을 좋아했었던 것 같다. 처음 사귀었던 남자친구 역시 체대를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라 또래에 비해 체격이 건장했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대화 코드나 취향 같은 건 별로 인상 깊은 게 없었다. 아마도 지금의 나라면 그런 남자와 사귀진 않았을 것이다. ‘나이를 먹다보니 외모보다 성격이나 취향 맞는 게 더 중요하다’에 포커스를 맞춘 게 아니다. 지금도 외모는 많이 본다. 하지만 화려한 복근을 가진 남자를 본들, 20대 초반 때처럼 성적 매력을 확 느끼진 않는다. 오히려 요즘은 좀 왜소한 남자가 섹시하다고 느껴진다.

현대인들은 너무 잘 먹어서 병이 생긴다. ‘First World Problem’이라는 말이 있다. 선진국 사람들의 고민이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저녁식사로 스테이크에 와인 한잔, 그리고 케이크까지 먹어놓고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오밤중에 운동을 가느냐마느냐 하는 것이다. 다이어트를 위하여 매일 아침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샐러드를 주문해놨는데, 결국은 먹기 싫다며 전부 쓰레기통으로 밀어버리고 다른 고칼로리 음식을 찾아먹는 행위랄까. 먹을 것이 풍족하기에 할 수 있는 고민들이다. 비만 역시 선진국병이며, 다른 질환도 유발시킨다. 아, 그래서 마른 남자가 건강할 것 같아서 끌리느냐고? 아니, 난 정반대의 마른 유형에게도 끌리는 걸!

나이 많은 사람을 보고 ‘와, 더럽게 섹시하네!’라고 느낀 건 오직 데이빗 보위(David Bowie)뿐이었다. 1947년생으로 작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일평생 날씬한 몸매를 유지했는데, 사실 별로 건강해 보이는 느낌은 아니다.

데이빗 보위(David Bowie)

영화 <킬 유어 달링(Kill your darlings)>에서는 배우 데인드한(Dane DeHaan)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크서클조차 말라버린 것 같은 퀭한 눈의 그에게서 건강미를 찾기란 힘든 일이다. 오히려 곧 쓰러질 것 같은 그의 옆에 내가 있어 줘야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렇다. 심지어 난 어디가 좀 편찮아(?)보이는 남자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다. 모성애 때문이 아니다. 난 이 와중에도 그들이 가진, 누구보다 강한 남성적인 에너지를 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중학교 시절 좋아했던 아이돌 오빠, 고등학교 때 사귄 남자친구의 육감적인 팔뚝보다 훨씬 강력한 남성미였다.

영화 <킬 유어 달링(Kill your darlings)>

난 왜 이런 남자들에게 끌리는 걸까? 아파보이는 사람이 무조건 끌린다는 건 아니지만, 어딘가 좀 한 구석이 비어보이는 남자를 훨씬 관능적이라고 느낀다. 심지어 백치미 역시도 어마어마한 매력이다! 이런 생각들을 혼자서만 하고 있었는데, 스터디 모임에서 어떤 분이 재미있는 이야길 해주셨다.

그날 우리 대화의 주제는 동물들의 삶이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진화에까지 이야기가 닿았다. 그는 ‘열성 is Super Sexy.’라고 했다! 우성의 형질보다 열성의 형질이 더 섹시하다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들은 개체가 살아남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되는 거 아니었어? 그럼 우성이 더 매력적이어야지? 하지만…… 역시 인간의 삶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는 건가, ‘나’라는 여자처럼? 난 속으로 뜨끔(!)해하면서 학문적으로 그런 증거가 있냐고 물었다.

그가 본 어느 네덜란드 교수의 논문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열성의 형질들이 보존되는 데에 유리한 면이 많다.’라는 가설을 둔 연구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첨부하지 못했음을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열성의 형질들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사라지지 않고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며, 성 결정학적으로 열성 형질을 가진 개체들에게 오히려 이성의 구애가 더 많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열성의 형질들이 이성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손을 보존할 기회들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물론 외모에 대한 취향은 각자 너무도 다양하다. 그래도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열성의 형질 중에 내가 끌리는 것들을 예로 들어 보겠다. 첫 번째, 나는 쌍꺼풀 있는 남자보다 없는 남자가 좋다. 쌍꺼풀 없는 것은 열성이다. 그리고 생머리. 머릿결은 이전부터 균형 잡힌 영양 상태를 나타낸다고 알려져 있는데, 곱슬머리보다는 생머리가 머릿결이 좋아 보인다. 물론 이것 역시 열성이다.

미소가 환한 이성에게 안 끌릴 사람이 있을까? 나는 거기에 치열이 고르면 더욱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고른 치열 역시, 열성이다. 그 밖에도 대머리가 아닌 것, 각지지 않은 둥근 턱선, 주근깨가 없는 것, 작은 귀, 흰 피부 역시 모두 열성의 형질들이다. 오, 진짜 맞는 것 같아! 열성 이즈 수퍼 섹시!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외형과 감정을 모두 진화심리학적으로 설명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심지어 귀지가 건조한지 습한지 조차 우성/열성으로도 판단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후천적으로 꾸준히 변화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아니 그래서, 난 도대체 왜 좀 아파 보이는 남자가 끌렸던 거냐고?’

생각, 또 생각하다가 주변, 그리고 사회를 보니 조금 알 것도 같더라. 혼자만의 의견이라 무언가 카테고리를 덧붙이기 민망하지만,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하자면 ‘진화심리학’적인 접근이 아닌 ‘사회심리학’적인 접근이라 미리 말하고 싶다.

딱 까놓고 말해서, 임신을 위한 섹스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기 위한 섹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런 섹스의 상대이기 때문에 굳이 임신에 유리할 것 같은 이성을 고를 필요가 없어졌단 얘기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인 임신에 불리한 경우가 나을지도. 인간들 세계에서 섹스란, 더 이상 자손 번식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자 또 하나의 오락이고 스포츠이며, 자본주의 시장을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키이기도 하다.

인간은 2차 성징이 시작된 이후부터 거의 죽을 때까지, 봄이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섹스에 대하여 열려있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인간은 평생이 발정기’라고 표현하더라. 뭐 표현이 너무 간(?) 느낌이 없자나 있지만... 솔직히 맞지 않나. 동물들처럼 어느 특정한 시기를 따지지 않는다. 동물들의 발정기는 거의 자손 번식, 즉 임신을 위한 행위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임신할 계획이 요만큼도 없을지라도, 사랑하기에 섹스를 한다.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서, 저 사람이 궁금해서, 새로운 곳에 왔으니까, 오랜만이라, 그 밖에 말해봤자 의미 없는 0가지 이유로 섹스를 한다. 침대로 가기 위하여 우리는 말없는 수다쟁이라는 향수를, 고운 피부를 드러낼 화장품을, 멋진 자동차를, 푹신한 침구를, 감흥에 젖게 할 뮤지컬 티켓을, 향긋한 술을 사려고 지갑을 연다. 그렇게 자본주의 시장은 섹스가 없으면 돌아가질 않는다. 섹스야말로 무언가를 팔기에 가장 안전한 컨셉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소비 형태는 거의 평생에 걸쳐 이어지지만, 자식은 낳지 않거나 낳아봤자 하나 둘 많으면 셋이다.

여성의 유방 크기도 사실 자녀 양육과 별 상관이 없다. 아이에게 젖을 잘 물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슴 큰 여성에게 끌렸던 거라고? 아니, 겨우 한 명의 태아에게 젖을 물리는 인간의 유방이 포유류 중 제일 크다. 여성의 유방이 크게 발달된 것은 오로지 섹스뿐이지, 모유 수유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 여자 친구가 수술한 가슴이라도 별 상관이 없다고 하는 남성들도 많다. 물론 가슴이 정말 작아도 된다고 말하는 남성들도!

얼굴의 좌우 대칭이 건강 상태를 드러내고 시원한 이목구비가 발달된 신체...는 개뿔, 만일 성형 수술로 그렇게 된 얼굴이어도 괜찮다고 한다. 어차피 그(혹은 그녀)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가질지 안 가질지는, 어느 조용한 곳에서 앞으로의 인생 계획과 더불어 차분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 물론 당장 섹스는 하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임신에 불리해 보이는 외모에도 끌릴 수 있다는 얘기다. (당연히 어떤 면에서 상당히 매력적일 경우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사실 저건 유명한 일본 소설 제목이다) 데다가 이런 내용의 글이라니- 누군가 나에 대해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 나뿐만 아니라 요즘 현대인들이 다양하고 독특한 매력에 끌릴 수 있다는 건, 비단 임신을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당장 임신을 생각지 않기에 가능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내 아이에게 건강한 신체를 주어야지’라는 생각이 배제되기 때문에- 즉, 당장 지금 아이가질 생각이 없기 때문에- 굳이 신체 건강한 남자가 내 이상형 조건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오히려 다양한 매력들이 보이더라. ‘어떤 남자 좋아해요?’라고 누가 물어보면 난 항상 이렇게 대답하잖아.

“전 리듬감 좋은 남자요.”

“아, 믿음감이요?”

“아뇨, 뤼.듬.감이요!”

...믿을만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요? 일단 좋아하면 믿고 싶어지는 걸. 리듬감이 좋으시다면, 생각해볼게요...

<영화=본투비 블루>

국어사전에 ‘열성’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온다.

 

열성(劣性)[열썽] [명사]

1. 열등한 성질.

2. <생물>대립 형질 중에서 잡종 제1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형질.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2번은 생물학에서 쓰이는 뜻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다. 난 내가 관능적이라 느꼈던 이성들에게 감히 1번의 뜻으로 ‘열성’이라 말하고 싶다. 심지어 난 ‘열성’, 이 단어 자체도 엄청 섹시한 것 같다. 진짜로! 열성 is super sexy 맞아!

 

내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 있는 그 사람의 모습에 내 마음이 빨려들고 마는 것이다.

그 투박한 모습이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잊을 수 없게 만든다.

사흘도 안 되서 다시 보고 싶어졌다.

나는 스스로 섹스도 서툴고 대인관계도 서툴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런 나에게 섹스를 하면서 유리가 말한다.

"본인이 즐거우면 상대방도 즐거울 거라고 믿어! 그림이랑 똑같아"

(소설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 야마자키 나오코라, 중에서 미루메)

 

유리는 꿈꾸던 이상형의 여인과 거리가 멀다는 미루메, 그리고 어쩌면 유리가 꿈꾸던 섹스 상대와는 거리가 멀지도 모르는 미루메. 그는 또 말한다. 어쩌면 자기는 그저 유리 곁에 있는 것이 시간 떼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운명의 여자는 따로 있을 거라고. 그러나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들은 매순간 진심임이 분명하다. 우린 그 어떤 형태의 사랑도, 섹스도, 이상형도 비웃을 자격이 없다.

사회 구조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우린 더 다양한 모습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 때의 난, 또 어떤 사람에게 반하게 될까?

‘나같이 물정모르고 사랑뿐인 사내 옆에 머문 것이, 누구에게라도 입을 맞추어야만 했던 격정적인 시대 때문이라면 / 난 그 시대를 감히 찬란하다 말하고 싶소.’

며칠 전 광복절,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하시는 말이라 생각하며 썼던 시의 한 구절이다.

나약한 나는, 나약했던 나의 조상과 부모들처럼 그렇게 시대의 공기를 흠뻑 느끼며 사랑을 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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