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교양공감] 손바닥에 맺힌 땀을 저릿하게 식혀주는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이 이젠 제법 차가워져서, 가만히 맞고 있으면 오소소 소름이 돋아날 때도 있다. 더위는 이제 한풀 기세가 꺾이고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 풍경은 삭막한 겨울이 오기 전 우리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어주는 다채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사계절 중 겨울은, 추위 뿐 아니라 풍경까지 가혹하다. 그래서일까, 겨울의 앞에 붙어있는 가을이란 계절은 그 경치가 제법 볼만하게 풍족하다. 낙엽이 내려앉은 길은 고즈넉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어오고, 파르랗던 산도 울긋불긋 단풍이 여물어간다.

여름이 존재감을 지우고 가을이 자박자박 걸어오고 있는 이 계절, 가을을 앞둔 이 시점에는 책이나 영화를 찾게 된다. 사시사철 감성적일 수야 있겠지만, 어쩐지 가을에 유독 그런 먹먹하고 잔잔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가을을 작중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영화들은 많다.

가을을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들은 많다. 작중 배경을 아예 가을로 설정해두고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영화들도 있다. 하지만 떨렁 가을만을 놓아두고 얘기하자면 어째 쓸쓸함, 고독함의 정서만을 말하는 것 같다. 마치 가을의 매력은 단풍 하나밖에 없다는 것처럼.

계절은 1년을 기준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여름에서 가을로, 다시 가을에서 겨울로. 단풍잎이 서서히 물드는 것처럼 가을도 그렇게 서서히 왔다가 서서히 간다.

가을 특유의 그 황금빛 풍경을 아름답게 담아낸 영화들을 꼽아봤다.

이번 교양공감 포스트는 변해가는 계절 중 가을을 유독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들을 찾아보고, 그 영화 속의 풍경들을 곱씹어봤다. 어쩌면 작품 속에서 주요 시간적 배경으로 등장하진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가는 가을의 풍경이 인상 깊었던 작품들이다.

꼽은 작품 대부분이 철 지난 영화들이겠다만, 그런 영화들을 다시 꺼내보기에 가장 좋은 계절 역시 가을 아닐까? 다음 작품들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음을 미리 일러둔다.

-귀를 기울이면

-500일의 썸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우리도 사랑일까

-비긴 어게인

 

■ 귀를 기울이면 (1995)

두 중딩이들의 귀엽고 풋풋한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 영화 포스터]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귀를 기울이면’은 여름방학 시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쓰릅쓰릅 우는 매미 울음소리와 아스팔트 위로 내리쬐는 후끈한 열기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한 여름 말이다.

초반부에 서로 놀려대면서 꽁냥질하는 게 상당히 사랑스럽다. [귀를 기울이면 영화 장면]

여주인공 시즈쿠는 같은 중학교의 남주인공 세이지와 서서히 가까워져간다. 풋풋한 둘의 감정을 따라, 익어가는 단풍잎을 따라 그녀의 볼도 발갛게 물들어간다. 그렇게 영화는 여름방학에서부터 춘추복으로 갈아입는 계절까지를 그렸다.

어린 나이지만 당돌하게 청혼을 하는 세이지와 꿈많은 시즈쿠. [귀를 기울이면 영화 장면]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세이지의 고백 장면에서 동 터오는 가을 아침의 쌀쌀한 풍경이 등장한다. 이때 보이는 청량감 드는 가을 하늘이 상당히 아름답다.

 

■ 500일의 썸머 (2010)

몇 차례 곱씹으면 영화가 달리 보인다는 바로 그 작품. [500일의 썸머 영화 포스터]

제목도 여자 주인공의 이름도 ‘썸머’, 작품의 시간적 배경 역시 여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는 시작 부분부터 두 사람은 이뤄지지 않았음을 상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톰과 썸머 사이에서 있었던 500일간의 일들을 그려냈다. 톰이 썸머를 잊기까지 걸린 날짜가 바로 500일이다.

톰은 썸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썸머에게 충분하진 않았다. [500일의 썸머 영화 장면]

아쉽게도, 이 영화 역시 가을이 주요 시간적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뜨거운 여름이 지나면 한결 시원한 가을이 찾아오는 것처럼, 지지부진하게 썸머를 잊지 못하던 그에게도 가을이 찾아온다. 여기서 가을은 새로 만난 상대의 이름(Autumn, 가을)이다.

누군가가 지나가면 또다시 새로운 '남자주인공', '여자주인공'이 여러분의 삶이란 영화에 끼어들어올 것이다. [500일의 썸머 영화 장면]

사랑을 할 때, 특히 그 사랑이 위태롭거나, 끝나버린 순간에는 두 번 다시 자신의 인생에 그런 인연이 없을 것이라 좌절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몇 차례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안다. 이것 역시 지나가는 과정 중의 하나일 뿐임을. 숨 막히게 더워 괴롭기까지 한 ‘썸머’를 떠나보낸 여러분에게도 서늘한 ‘어텀’은 온다. 지구가 멈추지 않는 한은 그렇다.

 

■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1989)

재개봉으로 보고, DVD로 보고, 봐도 봐도 새로운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영화 포스터]

요즘 ‘남사친, 여사친’이란 말이 유행한단다.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아니라 남자 ‘사람’ 친구, 여자 ‘사람’ 친구라는 뜻이다. 로맨틱한 관계는 아니고, 그렇다고 서로 아예 신경쓰지 않는 그런 애매모호한 관계에서 사람들은 뭔지 모를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끼는가보다.

해리와 샐리가 처음 만난 자동차 안에서, 그들이 그렇게 가까워지리라 상상이나 했었을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영화 장면]

이 오래된 로맨스 영화 역시 그런 남녀 사이의 일들을 그리고 있다. 해리, 샐리는 무려 12년에 걸쳐 가까워진다. 12년! 계절이 자그마치 쉰 번에 가깝게 바뀌는 시간이다. 그 시간들 동안 둘은 다양한 관계로 변해왔다. 서로를 싫어하다가 친구로, 그러다 떼놓을 수 없는 단짝친구로, 그러다가…

왜 주변에서 가을이 오면 뉴욕타령을 하는지 잘 알겠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영화 장면]

흔히 뉴욕은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고들 말한다. 가을에 가본 적이 없어서 기자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을철의 센트럴 파크를 연인과 다정하게 걸어보는 것은 기자의 버킷리스트에 오른 지 꽤 됐다. 작품 속에서 계절은 수시로 바뀌건만, 유독 가을 장면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우리도 사랑일까 (2012)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영화는 재개봉하는 것이 수순인가보다. [우리도 사랑일까 영화 포스터]

혹자는 이 영화를 ‘불륜 미화 영화’라 재단한다. 불륜이 누군가에게 아주 심한 상처를 준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남의 연애사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만큼, 죄 많은 그 불륜남녀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지 모른다.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그저 '불륜'이란 틀에만 놓고 보면 이 영화가 썩 와닿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우리도 사랑일까 영화 장면]

영화는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알록달록 아름다운 캐나다의 가을을 그려냈다. 하지만 수확의 계절이라 불리는 가을에도 우리가 쓸쓸함을 느끼는 듯, 사랑도 늘 달콤할 수만은 없다. 어찌 보면 영화의 결론이 ‘불륜의 끝은 이별’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익숙함으로 인해 무뎌져가는 관계에 대해 고민해봤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로 들릴 지도 모른다.

작중 이런 뽀얀 햇빛의 색감이 예쁘게 잘 드러난 장면들이 많다. [우리도 사랑일까 영화 장면]

영화의 아름다운 가을철 색감과 함께 사운드트랙도 호평을 받았다. New Things Get Old라는 곡명처럼, 새것은 언젠가 낡아간다.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 곁에 있었던 무언가도 한때는 새것이었고, 우리를 설레이게 하는 새것도 언젠가는 낡아갈 것이다. 그런 감정을 영화는 섬세하고 진지하게 통찰해 그려냈다.

 

■ 번외 – 비긴 어게인 (2013)

이 영화도 몇년 후 재개봉한다는 데 만원 건다. [비긴 어게인 영화 포스터]

가을에 접어들면서 ‘가을철에 어울리는’, ‘가을에 보면 좋은’ 이라는 키워드를 단 영화 추천 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중 ‘비긴 어게인’을 꼽는 분들을 의외로 많이 볼 수 있었다. 영화가 특별히 가을의 모습을 어여삐 담아낸 것은 아니었던 듯 싶은데 말이다.

풍경만이 아니라 음악으로도 가을 특유의 정취를 담아낼 수 있다. [비긴 어게인 영화 장면]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긴 어게인’과 ‘가을’의 연계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비긴 어게인은 눈이 아닌 귀로 우리에게 가을을 들려주는 영화라 볼 수 있겠다. 특히 작품에 등장한 곡 중 가장 인기 있는 Lost Stars를 부르는 애덤 리바인의 청량한 보컬은 가을의 맑은 하늘을 떠올리게 한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기존에는 둘의 키스씬이 있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없는 편이 더 마음에 든다. [비긴 어게인 영화 장면]

작품 속에서 여주인공 그레타가 만든 이 곡은 연인인 데이브에게만 들려준,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 노래(Our Song)”다. 데이브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음악은 공유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 대답한다. 둘 중 누구의 말이 적절한지는 몰라도, 확실히 이 노래는 스크린 너머 우리에게 가열차게 공유되고 있다. 가을이 오면 유난히 자주 들려오는 것도 같다.

 

■ 우리의 가을이 풍성하길 바라며

이제 조금 있으면 커피도 따뜻한 걸 찾고, 외투도 꼭 챙겨야 할만큼 쌀쌀해질 것이다. [언스플래시]

그저 날씨가 조금 서늘해졌을 뿐인데, 우리는 곳곳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동안 너무 더워서, 혹은 너무 추워서 두껍고 얇은 옷만 입었다면 가을에는 비교적 옷 선택의 폭이 넓다. 그래서 패션에 관심 많은 분들은 여름이나 겨울보다 봄, 가을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가을 캠핑… 올해엔 가볼 수 있겠지…?

물론 가을이 어딘가 놀러가기에도 딱 좋은 계절임은 많이들 알고 계실 터다. 무더위 땡볕을 힘겨워했던 이들은 이제서야 산으로, 들로 떠날 계획을 세웠을지 모른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지붕 삼아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기에도 딱 좋은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그런가하면 가을에는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고독에 빠져보기에도 좋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홀로 오도카니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쳐드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아! 많이 먹고 살을 찌우기에도 가을이 딱이다. 왜, 추석도 있잖은가. 추석에는 먼 친척의 귀찮은 잔소리도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주린 배를 채우기 좋다.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색으로 우리 주변 곳곳이 물들다는 것이다.

이렇듯 가을은 그 계절의 풍경처럼 온갖 다채로운 색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가을이 종종 쓸쓸한 계절로 표현됨에도 불구하고 그 가을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정말로 코앞에 닥친 9월을 앞두고, ‘가을’ 하면 떠오르는 나만의 ‘최애’ 영화들을 다시 꺼내들어 보자. 지난 언젠가의 가을을 추억해보는 것도 좋겠고, 그 영화 속의 아름다운 정취를 따라 느닷없이 훌쩍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

가을에도 너무 쌀쌀하지 않은 '딱 좋은 시기'는 짧다. 초가을을 만끽할 준비를 미리 해두시길.

요즘은 사람들이 여름, 아니면 겨울밖에 없다고 할 만큼 가을의 길이가 짧아졌다. 높고 구름 없이 맑은 가을 하늘을 조금 더 오래도록 볼 수 있도록, 가을이 조금 게으르게 지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 게으른 가을철 우리가 조금 더 풍성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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