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낯선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해방과 또 다른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다. 새로운 곳을 찾아 새로운 것을 보며 새로운 무엇을 발견해 내는 것, 그것이 길 위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다. 전혀 아는 사람 없는 후미진 마을을 서성대는 데도 두렵지가 않고 편안해지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마도 익숙한 것들(가족, 일, 고민)에서 잠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길 위에서의 며칠, 아니 몇 시간이라도 독립된 나를 찾을 수 있다. 또 '과거'라는 시간의 단편을 불러내어 "토닥토닥, 쓰담쓰담" 하며 보상하는 순간이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사랑으로, 때로는 냉철하게 비판도 하면서, 쉼으로 위로하는 시간이다. 어떤 일, 결과물에 대한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지나간 내 생의 한토막을 불러내어 냉정하게 돌아보는 시간이다. 

지나온 내 인생의 길 위를 말하라 하면 난 당연히 강원도를 꼽는다. 강원도는 내 생애 첫 번째 방황기였던 서른 초반에 무작정 찾았던 곳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독감에 시달리면서도 내 발길을 이끌 만큼 아마도 너무나 절박했던 것 같다.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에 대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했으니까. 한겨울 모진 칼바람을 맞아가며, 눈보라를 온몸으로 껴안으며 찾아갈 만큼 절박했으니까. 낯선 길 위에서의 편안함은 생각 이상이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바닷가를 거닐며 소리 질러도, 소리 내어 흐느끼며 울어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아 좋았다. 

방황하며 비틀거리는 내 발길을 머물게 했던 곳이 바로 황태 덕장이었다. 한겨울 걸었다 놨다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노인의 치열한 일상을 눈으로 목격했고 더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그 할어버지가 구순을 코앞에 두었다는 것이다.

황태가 바람에 날려 떨어지면 주워 와서 또 걸고 눈이 수북이 쌓이면 또 가서 털어내며 칼바람과 싸우면서도 하루도 쉬지 않는 강인한 집념과 인내심으로 사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실패는 할 수 있어. 다시 도전하면 돼. 나의 길을 찾기 위한 신의 테스트일 뿐이야. 다시 일어나 도전하면 되는 거지 뭐. 일어나 더 치열하게 가는 거야. 더 치열함을 이길 사람은 없을 테니까. 끝이 어디든 가는 거야. 난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무게를 재고 숫자만 계산했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게, 수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지 않고 치열하게 가는 것이니까.' 그러다 보니 자신감과 용기도 생겼다. 

내가 자주 찾는 황태덕장은 속초에서 40분, 사방 천지에 길게 늘어진 황태 덕장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속이 탁 트이게 하는 눈과 황태 그리고 칼바람은 한겨울 강원도에서만 볼 수 있고, 한 편의 수묵화 그 자체다. 체감온도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칼날에 에이듯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덕장 속의 눈을 털어내고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진 황태를 주워 다시 거는 구순 노인의 모습은 치열하게 살아내고, 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내지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듯했다.

비록 어디가 살이고 어디가 마디인지 모를 만큼 바람에 튼 울퉁불퉁 주름 잡힌 손등, 성공의 흔적이라 말하기는 뭐해도 치열하게 살아 멋지게 이겨낸 한 사람의 성공한 생의 궤적을 보는 듯했다. 집안은 온통 방송에 나온 사진, 신문 스크랩까지 셀 수 없을 만큼 진열되어 있었다. 황태덕장의 최고 장인이 사는 곳이라고 할까?

60년을 황태만 만지고 살아 지금은 자식보다 더 자식 같은 황태라고 말씀하시는 구순을 앞둔 할아버지의 두 눈에는 잔잔한 눈물이 고였다. 북어는 차디찬 바닷바람이 만들지만 황태는 눈과 찬바람이 만든다. 황태는 영하 15℃이하에서 꾸준히 얼어야 하고, 3개월 동안은 밤에는 얼었다가 낮에는 다시 녹으며 물기를 머금었다 뱉었다를 반복해야 토톰하고 폭신한 노란 황태 살이 된다. 인고의 시간을 지난봄에야 명품 황태가 태어난다. 

할아버지는 마른기침을 콜록거리며 중요한 말을 놓칠세라 연신 새하얀 입김을 품어 내며 말씀하셨다. "신발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의 칼바람을 안고 작업을 해야 하니 일도 고되고 힘들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날씨가 돕지 않으면 황태 농사는 망하는 거예요. 비가 오면 안 되거든. 그래서 힘든 거예요.”

그렇다. 정성을 쏟고 하늘이 도와야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황태라고 한 것처럼, 나 역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행운을 기다린 것은 아닌지 조금 힘들면서도 죽을 만큼 힘들다고 과장한 것은 아닌지......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본의 아니게 내가 피해를 보았을 때는 세상 탓, 사람 탓을 한 적은 아닌지. 정말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모래알 같은 작은 것이 암덩어리를 키우듯 어떤 일이 일어나는 데는 이유가 반드시 있다. 그리고 시작은 미미하다는 것, 그것을 제대로 찾아 반듯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손 쓸 수 없을 만큼 크게 터진다는 것을.

결국 원인은 나이거나, 행여 내가 아니더라도 세밀하게 따져보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좋아도 싫어도 아무리 아파도 그래서 많이 힘들어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 맘에 들지 않아 직장생활이 힘들었다. 세상과 부딪치는 것이 죽을 만큼 버거워 이제는 성격에 맞는 작가로 살고 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편안하다. 물론 직장 생활하면서 모난 성격 때문에 빼앗기고 잃은 것도 많다. 그래도 소중한 것들이 있기에 웃으며 산다. 물론 지금의 내 모습, 많이 변했지만 근본적인 신념은 내가 이곳을 처음으로 찾았던 그때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좋다.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자존감이 여전히 강하다는 이유일 테니까.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만난 신문기자의 추천으로 백담사 근처에 있는 한옥 식당에 들어가 황태구이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니 갖가지 술병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식당 주인이 직접 설악산에서 채취한 약초와 열매로 담근 약술이라 한다. 소나무, 영지, 오디 등 각종 열매로 만든 술이 길게 줄 서있다. 주인은 국내 유일의 자연산이라고 자랑한다. 자연이라면 왜 사람들은 열광할까? 아마도 자연이 인간의 근원이기 때문이 아닐까? 죽어서 영원히 잠드는 곳, 자연으로의 회귀를 우리는 갈망하기 때문이리라. 

약술 구경에 정신이 빠져있는 동안에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주인은 황태구이에 약술에 매실 등 기타 양념만 서른 가지가 들어간다고 자랑한다. 양념 맛에 길들여진 우리의 입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음식에도 맛을 내는 비법이 있단다. 인공의 맛에 길들여지지 않은 나에게는 황태구이가 맵고 짠 느낌뿐, 황태의 구수한 맛은 느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까 팔순 할아버지가 찢어준 황태포가 훨씬 구수하고 뒷맛에 여운이 있다. 최고의 맛은 자연 그대로의 황태를 느끼는 것일 텐데.

오랜 세월을 황태와 함께 살아왔다는 할아버지는 '매서운 칼바람과 흰 눈 그리고 온도에 황태의 맛이 결정되는 것이지 화학조미료에 따라 황태 맛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야. 명품 황태는 주인과 황태 모두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에야 하늘이 만들어 주는 거지'. 할아버지가 불쑥 내뱉는 한 마디가 심장을 찌르는 힘이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난 구순을 앞둔 할아버지의 일에 대한 집념, 자신감, 당당함에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해주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바쁜 일상을 쫓아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힘들다고 머뭇거리면 달라지지 않아! 새가 날 수 있는 건 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야. 도전하다가 상처 입고 넘어지더라도 자신감을 갖고 다시 일어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야지. 먼저 최선을 다해야지. 힘들다고 중간에 놓지 말고. 결과가 나오면 그때 가서 당근과 채찍을 주면 되지. 시작하기 전에 할까, 말까 망설일 필요는 없는 거야.'

그렇다. 세상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공만 하는 사람도 없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하는 사람도 없다. 왼손에 실패가 시작되면 반드시 오른손엔 성공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성공과 실패, 그 양날의 칼은 두 손에 머문다는 것을. 

용대리를 조금 지나면 다시 돌탑들이 장관을 이룬다. 돌탑 사이사이 얼어버린 계곡, 깨진 얼음 사이로 수정처럼 맑은 강물이 흐르는 백담사의 전경이 눈 안에 들어온다. 인간이 아무리 강물을 흐려놓아도 시간이 흐르면 강물은 다시 깨끗해진다. 아마도 자연은 인간과 달리 욕심을 부리지 않기에 아무리 더러워도 시간이 흐르면 정화가 되는지도 모른다.

비운다는 의미는 무얼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단어이다. 백담사는 ‘님의 침묵’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만해 한용운 시인의 만해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참 따뜻해 보이는 ‘님의 침묵 찻집’에서 차 한 잔을 마시니 가슴속에 쌓였던 서운했던 직장생활의 묵은 감정들이 빠져나간 듯 후련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황태를 너는 데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속도전은 기본이고 눈이 오면 일일이 황태에 쌓인 눈을 털어줘야 하고 바람 불면 날아간 황태를 하나하나 주워 다시 덕장에 걸어야 하고, 봄에 거둔 황태를 밤새도록 손질하며 날을 꼬박 새우기도 한다.'며 생의 갈무리를 멋지게 하시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아마도 황태가 노랗게 익어갈 때까지 구순을 앞둔 할아버지는 지금 이 시간도 어제처럼 혹한과 칼바람에 맞서고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나 역시 사는 동안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을 헤아려보면 크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라 주변 사람이 힘들 때도 있지만 모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존감이 너무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성격이라 가끔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사람의 근본은 변하기 않기에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산다. 나쁜 건 내 탓이고 좋은 건 남 탓이라 여기며 산다. 그렇게 맘먹으니 차라리 마음도 편안하다.

지금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말을 생의 모토로 삼고 있다.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나는 두 가지 의미로 새기고 있다. 일이 잘 풀릴 때에는 '분수를 알라'며 나를 채찍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희망을 가져라'며 나를 응원한다. 생의 시작은 불가능한 일들, 없는 길을, 없는 다리를 하나씩 내 손으로 만들어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내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다시 난 출발 선상에 있다. 새로운 기적을 위해 다시 도전할 것이다. 5년 후 지금을 돌아보며 나를 칭찬하고 싶다.  

모두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럼에도 새하얀 벚꽃이 피는 봄을 기다리며 살아내야 한다.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진 한파를 이겨낸 황태만이 이른 봄에 명품 황태로 다시 태어나듯이 세상과 싸워 이겨도 나 자신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삶의 조연은 될 수는 있어도 주인공은 될 수 없다.

정정당당하게 부딪치자. 견뎌 이겨내자.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봄은 오고,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아침은 온다.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정신으로 다시 도전하자. 심하게 출렁이는 불확실한 공포에서 탈출하자. 다시 일어서는 강력한 힘은 나에게 있다. 나를 믿고, 사랑하고 끝없이 응원하자.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다. 내 삶의 통제권을 오로지 내가 행사해야 도전이 완성이 된다. 푸른 날갯짓으로 멋지게 날아오르자. 아름답게 튜닝하자. 새롭게 펼쳐질 성공의 주인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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