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고등학교 시절, ‘싸이 미니홈피’는 지금의 SNS였다. 지금도 SNS에 사진 올리기를 즐겨하는 나는, 당시 ‘디카’로 찍은 많은 사진을 올렸었고- 또 글도 많이 적었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나 미니홈피에 들어가보니, 다이어리나 게시판에 당시 적었던 상당량의 글들이 있었다. 그때 난 내가 작가가 될 줄 알고 있었을까? 글은 계속 썼을 거라 생각했지만 일단 작가가 될 거라 생각진 못했, 아니 안했을 거다. 당시 나는 배우를 꿈꾸고 있었으니까.

사춘기를 겪으며 썼던 글들을 보자니, 한편으론 당시의 내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의 감수성은 지금과 현저히 다르다. 무언가를 쉽게 포기해주지도 않고, 화를 낼 줄도 알았다. 지금의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전혀 분노하지 않는다. 30대가 된 지금의 난, 호기심만큼 허무함도 너무 자주 느낀다. 어느 순간 허무함이 호기심을 앞설까봐 벌써부터 두려운 마음도 든다.

<standing male Nude> / Egon Schiele, 1910

누군가를 좋아했던 마음들도 그랬던 것 같다. 거긴 몇 년 간에 걸쳐 작성된 글들이 있었고, 난 짝사랑도 꽤 오래- 그리고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못지않은 구절도 감히- 몇 개나 있는데, 그 주인공이 누군지 몰라 참 슬프다. 나는 정말 소설을 읽듯이 필자가 묘사하는 감정대로 그를 상상해내야만 했다.

필자는 여러 가지에 대해 불안함을 잘 느끼는 10대의 소녀. 그 아이는 좋아하는 남자 애와의 문자가 끊기면 불안해했고, 또 미래에 대해 불안해했다. 먼 미래는 물론, 당장 코앞에 다가온 시험이나 수행평가에 대해서도 불안해했다. 그리고 그 애는, 그러니까 약 13-15년 전의 나는 불안감을 매우 자주 느끼는 편이었고 거기에 지배당하거나 잠식당했던 적이 진짜 많았었다. 사실 그건 지금도 안 그런 편은 아니다. 그래서 거기에 이렇게 썼었나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안’이라는 큰 사과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죽기 전에 천천히 그걸 다 먹고 죽어야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10대의 나이에 이 사과를 많이 먹는 편이라고. 안타깝게도 갑자기 큰 병을 얻게 된 이들- 그들은 ‘시한부’라는 시간동안 이 남은 사과를 ‘죽음’에 대해 불안에 하며 크게 크게 베어 문다고... 

갑작스러운 사고를 겪게 되는 이들- 이를 테면 강도를 만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는 경우, 그 남아버린 큰 조각을 한꺼번에 먹어버리는 거라고 말이다.
어쨌든 ‘불안’이라는 사과를 다 먹어야만 한다고, 나는 고1? 중3 즈음에 그렇게 느꼈고, 그렇게 썼던 것이다.

<Two Squatting Men (Double Self-Portrait)> / Egon Schiele, 1918

30대가 되었다. 지금의 난, 약 13년이 넘는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양의 사과를 먹어냈을까? 사춘기 시절의 내 논리대로라면 그 사과를 베어무는 행위는 너무 아프거나 시린 것 같다. 자꾸만 마음이 시려서 저런 글을 썼던 것일 테니까. 그런데 20대 때는 더 불안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친구들도 같은 옷을 입지 않고, 누군가는 ‘돈’을 벌고, 또 누군가는 이름을 떨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론- 어떤 아이들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을 겪어내기도 했다, 그것도 내 주변에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라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또 엄습했다. 

사과를 더욱 많이 자주 먹어야했다.

30대가 된 지금? 당연히 불안하다. 나는 평범(?)하게 직장을 다닌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런 보편적인 생각이나 인생관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한 친구들도 없다. 결혼? 준비도 생각도 아직 없다. 20대엔 이런 삶에 대해 가능성이 있었으나, 이젠 요즘말로 정말 ‘노 빠꾸’인 것이다. 나는 여전히 ‘지해수’로 30대를 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난 내 인생에 꽤 만족하고 있어서 바꿀 생각이 별로 없다는 게 가장 강력하다...

이러한 나는 그러면 남들보다 더 큰 불안의 사과를 가지고 태어난 걸까. 불안은 내가 반드시 느껴야하는 감정인 걸까. 20대에도, 또 30대에도 여전히 불안에 대해 생각하고- 또 고민한다. 그리고 어느 자료에서, 해외의 정신분석학자들이 불안- 그리고 불안 장애에 대해 발표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Aikins와 Craske라는 학자들은 논문을 통하여, 불안이 만들어내는 생각을 총 세 가지로 제시했다. 불안이 우리의 인지를 왜곡시키는 유형 세 가지인 것이다.

첫 번째는 우리가 ‘불안’을 느끼며, 더 큰 부정적인 감정을 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회피다. 지금 내가 느낄 수도 있는, 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수 있는 다른 감정을 잊기 위하여 차라리 불안에 취하는 것이다. 

이건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불안은 그렇게 취할 만큼 한도 끝도 없으며, 몰입하기 좋고, 강력하게 자극적이다. 정말 이가 시리듯 마음이 시리잖아!

두 번째는 다른 불안을 잊기 위해 불안해지려고 한다. 이를테면 ‘앞으로 4차 산업 혁명이 오면 어쩌지?’ 아니- 더 쉽게 말해서 앞으로 100세 시대에 어떻게 먹고살지-라는 불안에 빠지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를 불안케 만들기 충분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인식하고 있는 것과, 여기에 자꾸만 빠져서 불안해하는 것은 다르다.

왜 먼 미래에 대한 불안에 빠지느냐고? 당장 코 앞에 닥친 시험이나 과제, 해결할 일들에 대해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무엇일까? 이름부터 매혹적인 ‘Magical Thinking’- 즉 ‘마술적 사고’라고 한다. 아마도 현대인들이 가장 흔히 겪는 불안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불안을 느끼며 우리가 최소한의 도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형태다. 예를 들어 당신이 회사에서 맡은 프로젝트 발표가 곧 다가오고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당신은 지금 해놓은 것이 별로 없다.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상태. 당신은 매일 매일 자기 전에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신경을 매일매일 쓴다... 이게 바로 최소한의 도리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불안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고 기대한다는 사실. 내가 거기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결과가 좋아질 거라 믿는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내가 정말 많이 하던 사고의 유형이다.

<The Self Seers 2(Death and Man) / Egon Schiele, 1911

위의 논문대로라면- 아 물론 학술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본인의 자유다- 불안이 반드시 꼭, 느껴야만 하는 감정일까, 싶다. 위의 세 가지 모두 나의 인지를 왜곡시키고 있으며, 심지어 회피를 위한 것들이 아닌가! 그냥 나는,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 된다- 불안해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 말했던 불안을 느끼게 하는 사과? 그건 어쩌면 따먹어도 되지 않았을 선악과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내 손에 쥐지 않았더라면- 나는 쫓겨나지 않고 풍요롭고 평화롭고 단조로운 에덴동산에 계속 살았을 것이다... 아담이 섹시한 지도 모르고.

갑자기 왜 이야기가 산으로 가냐고? 그렇다. 불안하지 않은 단조로운 삶을 살길 바라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위의 논문에서 말한 불안이 야기하는 인지왜곡에 대해 알고, 행동으로 탑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서로에게- 더 나아가 세상에 ‘호기심’이 일렁이는! 그것을 행동으로 이행하게 하는 불안은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른다. 불안은 나를 파먹을 순 있지만 망치지는 않는다. 날 망치는 것은 내가 선택했던 행동들일 뿐이다. 그러니 불안한테 뭐라고 하지 말자는 거다.

아직도 나는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그냥 나는 내 마음에 불안이라는 사과를 심장 옆에 장기처럼 달아두기로 했다. 가끔은 둘 중에 뭐가 뛰는 것이 헷갈릴 때가 많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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