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하지 말라는 행동을 더 하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가지 말라는 곳에 더 가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보지 말라는 것을 더 보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나는 친구와 분신사바를 시도했던 적이 있다(당시엔 진짜 귀신이 나오면 어떡하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집 근처에 있던 폐가의 윗층까지 올라가본 적이 있다. 폭력적인 장면이라는 걸 알면서도 슬쩍 눈을 떠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왜냐고? 대체 뭐길래 하지 말라는 건지 궁금하잖아!

우리는 행동의 결과에 불쾌감이 따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행동할 때가 많다. 호기심과 두려움은 늘 공존한다. 호기심이 생겨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할 때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행동의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지의 것에 늘 두려워 하지 않는가.

호기심을 채우려면 두려움을 이겨내야하며, 그렇지 않다면 호기심을 저버려야한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포기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금기시 되는 것들에 더 끌린다. 혹시 스너프 필름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출처=Public Domain Pictures

스너프 필름이란 연출이 아닌 실제 고문과 살인을 여과없이 찍은 영상을 말한다. 원래는 이윤을 목적으로 찍는 가학적인 영상을 뜻지만, 실제로 그러한 산업이 적발된 적이 없으므로(기록용이든 개인의 유희용이든) 모든 실제 가학적인 영상을 통칭한다. (스너프 필름 제작과 열람은 모두 처벌 대상이다) 아니, 연출된 장면을 보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실제라고? 스크린 너머의 저 사람의 고통이 ‘진짜’라고?

영화 <떼시스>의 주인공 앙헬라는 대학교 논문 주제로 '영상에 나타난 폭력'에 대해 조사하고, 폭력을 싫어하지만 논문을 위해 친구 체마의 도움으로 폭력적인 영상을 보게 된다. 평소 폭력적인 영상을 즐겨보는 체마는 무리 없이 시청하지만 앙헬라에겐 버겁기만 하다.

지도 교수는 앙헬라의 부탁으로 영상자료실에서 자료를 찾던 중 보일러실에서 의문의 비디오를 발견한다. 시청각실에서 비디오를 보던 교수는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고, 앙헬라는 그 비디오를 몰래 가져온다.

출처=Creepypastabrasil.com.br

차마 재생하지 못하고 체마에게 가져온 앙헬라는 재생 되는 비디오 화면에서 고개를 돌린다. 여자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 앙헬라는 보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론 보고 싶다.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 손가락 틈으로 슬쩍 눈을 떠보는 앙헬라의 행동은 그러한 심리를 대변한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뻔히 연출이라는걸 알지만 고어물을 버거워하는 나도, 손가락 사이로 비디오를 보지 않았을까?

힘겹게 확인한 결과 의문의 비디오는 스너프 필름이었다. 이윤을 목적으로 제작한. 어떠한 분야든 산업이 되려면 구매자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매자들은 굳이 왜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이런 영상을 보는 것일까. 몇몇 영화에선 구매자들이 영상을 보면서 흥분, 오르가즘,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표현한다(<호스텔>에선 돈을 주고 사람을 고문하며 희열을 느끼지 않는가!). 그들은 스크린이라는 안전장치 뒤에서 야비하게 숨어있다.

출처=Pexels

폭력적인 영상안에는 세 부류가 존재한다. 행위자, 피해자 그리고 시청자.

처음에 앙헬라는 단순한 ‘시청자’였다. 화면 안의 폭력은 촉감으로 와닿지 않는다. 피해자의 비명 소리가 듣기 싫으면 음소거 하면 되고, 더이상 보기 싫으면 꺼버리면 된다. 시청자는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화면 안의 폭력은 계속 된다.

언제까지나 스크린 뒤에서 안전할 줄 알았던 앙헬라는 포박 당한채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 이제는 자신이 비디오에서 보았던 것처럼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피해자’다. 스크린이 사라진 이곳에서의 폭력은 현실이 된다.

우여곡절 끝에 범인의 머리에 총을 쏘는 앙헬라. 그녀가 범인을 처단하는 장면은 파란 화면으로 처리 된다. 즉, 카메라에 담긴다. 늘 행위자였던 범인은 피해자가 되고, 앙헬라는 시청자에서 피해자로, 마지막엔 행위자가 되어버린다. 이 세가지 역할의 경계가 사라진다.

처음부터 각자의 역할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시청자이며 행위자, 그리고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출처=Stalepopcomau.blogspot.com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뉴스에서 국민들의 알권리를 위해 앙헬라 사건이 담긴 스너프 필름을 여과없이 내보낸다. 붉은 글씨로 ‘잔인하다’는 경고도 날려준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멍하니 텔레비전에 꽂힌다. 폭력과 자극에 거부감을 표하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눈을 살짝 뜨는 것처럼 고개를 슬며시 돌아보는 것처럼, 보게 된다.

요리하면서 자꾸 간을 보다보면 혀에 감각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소금이나 간장을 더 더 넣으면 음식맛에서 짠맛 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폭력에 자주 노출 되면 어느새 무감각해질 수 있다. 나또한 특정 부분에선 무감각하다.

이미 대중 매체에서 폭력은 아무렇지 않게 그려지고 있다. 만약 까스뜨로 교수의 말처럼 대중이 가장 원하는 영화가 더 자극적이고 더 폭력적인 영화라면, 우리는 더이상 시청자만도, 행위자만도, 피해자만도 아니다. 우리는 이들의 접점에 서있게 될 것이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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