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인 중에 정신과 의사가 있다. 그를 포함한 지인끼리 여럿 모여 종종 식사를 하곤 한다. 아무래도 정신의학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이제 막 클리닉을 빠져나와 퇴근한 그에게 또 그런 이야길 꺼내기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묻게 되더라. 환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물을 뿐이다. 나도 불면증이 심했던지라, 수면제에 관심이 있었는데(한 번도 복용한 적은 없다) TV에서 많이 언급되던 졸피뎀이 도대체 무어냐 묻기도 했었다.

단연 가장 흔하고도 평범한 주제는 ‘우울증’이다. 나도 우울증을 겪어보았고 주변에서도 어렵게 볼 수 있는 질환이 아니다. 마음의 감기라는 우울증은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레 나아지기도 하지만 그게 힘들다면 병원을 찾는 게 더 낫다. 괜히 혼자 끙끙 앓다가는 호전되기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당연히 우울증 약에 관한 것도 물었다. 환자 중에는 우울증을 정말 자주 겪거나 우울증 약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고 했다. 그는 병원에서 의사 가운을 입지 않는다. 아마도 왜 그런지 독자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게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찾으면, 이야기를 하며 자신도 모르게 쌓였던 눈물들을 쏟아내곤 한다. 나를 ‘환자’라고 규정지어버릴 것 같은 흰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보다야 평상복을 입은 사람이 마음을 터놓기에 더욱 편안 할 것이다.

영화 =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우울증으로 자주 병원을 찾는 이들과는 친해질 수밖에. 마치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듯,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 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공유하고 또 공유하는 사이다.

“그럼 그런 환자들은 어떻게 해요?”

“정말 친해지면 최후의 처방을 말씀드리지.”

우울증에 ‘약’보다 특효인 게 있다니? 다들 마음의 병 하나쯤은 앓고 있는 현대인들이 아닌가. 효과가 굉장하다는 그 최후의 처방은, 바로 이거였다.

“난 환자가 정말 친해지면... 약 그만 드시고 그냥 연애하시라고 해. 심지어 유부남이나 유부녀일 경우라도, 정말 친하면 그렇게 말해. 불륜을 권하고 싶진 않지만 메말라서 곧 죽을 것 같은 그 얼굴을 보면, 도덕보단 측은지심이 앞서. 연애가 우울증에 직빵이지. 아, 나도 연애하고 싶다.”

연애. 나에게 너무도 가깝고도 먼 단어. 자주 꺼내어놓지만 하지 않은 지 너무나 오랜, 마치 10대의 여고생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이름 같은 단어다.

굳이 연애를 하고 싶어서 자주 언급하는 건 아니다. 그저 주변에서 자꾸만 묻는다.

‘넌 남자친구가 왜 없니?’ ‘연애 안한 지 얼마나 됐니?’ ‘연애해야지 왜 주말에 혼자 노니?’

연애가 우울증에 특효라면, 반대로 연애를 하지 않아서 우울한 감정이 들기도 할까? 그건 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우울증이 ‘연애’ 때문은 아니지만 연애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들이 배제된 상태라면 침울한 감정을 느끼기 더욱 쉽기는 한 것 같다.

연애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가고, 변화된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장점을 칭찬해주곤 한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시인이 된다. 남다른 언어로 상대방을 감동시킨다. 서로를 알아가고 배워가며 세상을 다시금 보게 되고, 거기에서 나는 어떠한 모습인지 찾아간다. 우린 죽을 때까지 인생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며 알아가려고 한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인간은 누구나 애착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성인이 된 후 독립적인 개체로서 완벽히 인정받은 인간은, 애착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 섹스가 더 좋은 걸 수도.

임신 중인 모태와 태아 사이에는 옥시토신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것은 유대감을 느끼게 해주는데, 섹스 중인 남녀 사이에도 똑같이 분비가 이루어진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섹스를 통해 서로가 ‘한 팀’이라는 마음이 더욱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또는 몸을 섞다가 유대감이 생겨나기도 한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한다고 라캉은 말했다.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가 평생 사랑에 빠져야 할 이유다. 정말 운 좋게도 부부 관계가 좋아서 일생을 그런 대상일 수 있다면, 혹은 타인의 욕망이 되지 않더라도 그런 것쯤은 눈감고 견뎌내며 살 수 있다면 다행이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인간들은 대부분 생각보다 나약하다.

단지 남녀 관계에서만의 욕망이 아니다. SNS에서 다른 동성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싶은 것도, 날 부러워하게 만들고 싶은 것도 욕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에서는 더 이상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남자들 때문에 우울에 빠진 여자가 나온다. 생명력이 풍부해 보이는 몸매와 윤기를 가진 젊은 시절과는 다른 온도차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낯선 이로부터 편지가 오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당신을 욕망한다며. 소녀처럼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한 그녀의 몸에 수줍고도 앙큼한 기운이 퍼져 오른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는 그녀가 뿜어내는 그런 여성스러움이 불안하다.

욕망은 정체성과 상당한 연관이 있다. 아니, 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는 지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준다고도 한다. 살아있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욕망한다는 뜻이다.

영화 = 그레이트 뷰티

만일 당신이 우울함을 느낀다면, 사랑을 주고받으시길 권한다. 이건 최후의 처방이라지만 최초의 처방이더라도 과하지 않다. 온 세상이 나만 외면한다고 느낄 때, 완벽하지 않은 단 한사람의 꼭 잡은 손이 나를 동굴에서 꺼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위대함에 대하여 쓰고 또 써도 모자라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람을 사랑하려고 했는데, 사랑 그 자체가 알면 알수록 놀라운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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