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공감신문 교양공감] 이제는 시간이 상당히 지나 슬슬 ‘아재냄새’가 나는 이 옛 유행어는, 지난 2009년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처음 등장했다. 취객(개그맨 박성광)이 경찰서에서 난동을 부리며 세상을 저주하는 투로 내뱉은 말인데, 그 말이 묘하게 대중들에게 스며들었는지 상당한 인기를 끌어 모았다.

프로그램의 재미 자체를 떠나서 유행어만큼은 확실히 떴던 코너. [KBS2 개그콘서트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장면]

그도 그럴게, 세상은 정말 저 말대로 무섭고 잔인할 만큼 1등만을 기억한다. 도대체 그놈의 숫자 ‘1’이 뭐길래, 2등이라는 빼어난 성과를 올려도 “아깝다”며, “다음엔 부디 1등을 할 수 있길 바란다”는 위로를 듣게 된다.

무언가에서 1등을 해보고, 그 이후 2등이나 3등, 혹은 그 아랫 등수를 차지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러운 세상’ 부분에 상당히 공감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정말 놀라울 만큼 1등만을 기억하고, 1등만을 축복하니까.

어떤 분야의 '정점'은 보통 한 자리만 존재한다.

1등, 1위, 첫 번째는 대체로 경쟁관계에 있는 이들 중 단 한 명만이 차지할 수 있는 값진 자리다. 때문에 그 자리가 부각되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2등, 2인자에게는 비교적 시선이 덜 쏠리는 것도 같다.

그런가하면, 오히려 2인자의 자리에서 더욱 시선을 잡아끄는 이들도 분명 있다. 그건 정말 대단한 거다. 앞서 두 번이나 언급했듯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하는데, 그런 ‘더러운’ 세상에서 2등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거니까.

2인자이기에 더 돋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번 교양공감 포스트에서는 누가 봐도 명실공히 2인자의 자리에 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욱 매력이 두드러지는 이들을 살펴봤다.

 

■ 숫자 2의 화신, 홍진호 (스타크래프트)

국내 한정으로, 아마 이 분야(2인자)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前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홍진호 선수가 아닐까? 홍진호라는 인물에게 붙어있는 수많은 별명들의 대부분은 숫자 2와 연관이 크다. 이는 선수 시절 그의 성적과 큰 연관이 있다.

사진이 두번 보인다면 그건 착각이다. 사진이 두번 보인다면 그건 착각이다.

홍진호는 ‘악당 같은 모습’에 끌려 저그 종족을 선택했다고 한다. 당시 스타크래프트 판에서 홍진호는 각종 대회의 결승전에 빈번하게 진출할 만큼 걸출한 실력의 프로게이머였다. 그러나 그의 성적은 어째 늘상 ‘준우승’에만 머물렀다.

하도 2등에 그치다보니 2의 화신이 된 홍진호. [온라인 커뮤니티 캡쳐]

물론 준우승이란 성적도 매우 우수한 성과지만, 선수 본인의 입장에서는 늘 안타깝고 속상했을 노릇이다. 그는 2001년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시작으로 이후 크고 작은 대회에서 계속해서 ‘준우승’만을 거머쥐게 된다. 정말 신비롭게도. 그 때부터 팬들은 홍진호를 ‘숫자 2의 화신 그 자체’로 농담 삼아 놀리게 된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고 하지만, 2등도 많이 하면 사람들이 기억해주더라”

홍진호는 지난 2011년, 은퇴식을 치르면서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 속 ‘2인자’로서의 자신의 지난 성과에 대해 자평했다. 끝끝내 1등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2등 징크스에 대해 자조 섞인 농담을 남긴 셈이다.

본인은 정말 지긋지긋하겠지만, 팬들은 그가 2등할 때 가장 즐겁다고 한다. [SBS 런닝맨 장면]

프로게2머의 경력을 마무리한 2후, 그는 2런 기묘한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2용해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맹활약을 펼치게 됐다. 하지만 사람들은, 특히 짓궂은 그의 팬들은 여전히 그가 여러 예능 프로그램 속 게임에서 ‘2등’을 할 때 가장 기뻐한다고 알려져 있다.

 

■ 스스로 2인자를 논하다, 박명수 (무한도전)

‘2의 화신’ 홍진호가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 ‘2인자’라는 위상에 가장 걸맞았던 인물은 개그맨 박명수가 아닐까 싶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박명수 스스로가 자신을 MBC ‘무한도전’의 출연진들 중 ‘2인자’라고 자칭하고, 그 캐릭터를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스스로 2인자라 칭하는 인물은 예능계에서 그가 아마 최초 아닐까? [MBC 무한도전 장면]

사실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이 곧 ‘업무 성과’라 볼 수 있는 연예인들은 대부분이 최고의 자리를 갈망할 것이다. 이는 인기가 곧 ‘밥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명수는 스스로 2등의 자리에 포지셔닝하고, 도리어 2인자라는 개념을 자신의 캐릭터화해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이는 그간 다른 연예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략이다.

이제는 '2인자'라는 말도 그의 수많은 별명 중 하나가 된 듯. [MBC 나는 가수다 장면]

이렇게 스스로를 “1인자 급은 아니고 2인자”라고 할 경우, 실제로 2등에 못 미치더라도 2인자라 인식될 수 있다. 마케팅 전략에도 “1등 기업은 아니지만, 2등 기업으로서 열심히 한다”는 방식의 접근법이 있다고 한다. 우연인지 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박명수는 그런 마케팅 전략을 활용하게 된 셈이다.

그럼 1인자 도전도 한 번…? [MBC 무한도전 장면]

그리고 그의 ‘2인자 전략’은 꽤나 잘 먹혀 들어가고 있는 듯 하다. 실제로 그는 각종 프로그램에서 ‘1인자(박명수의 평에 의하면)’인 유재석과 함께하면서 다양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그렇다고 유재석이 없는 곳에서 1인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의 뒤에 2인자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개그 포인트 되겠다.

 

■ 애초에 ‘2P 전용 캐릭터’, 루이지 (슈퍼 마리오)

가상의 인물 중에도 ‘2인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이들이 많다. 이번 교양공감 포스트를 준비하면서 떠올린 두 인물 모두가 그렇다. 그 중, 이야기 전개 상 2인자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 인물(베지터)에 앞서 아예 태생부터가 2인자인 캐릭터를 먼저 소개한다.

1P 전용 캐릭터 마리오(좌)와 2P 전용 캐릭터 루이지(우).

과거의 게임들은 기기의 제약 때문에 여러 명의 캐릭터를 다양한 색을 써서 등장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팔레트 스왑’이라고, 도트로 한 땀 한 땀 찍은 캐릭터를 색 조합만 바꿔 만드는 식의 캐릭터들도 등장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점차 외형에 차이를 보이는 두 형제. [마리오 위키 캡쳐]

2명이 즐길 수 있는 게임에서는 이런 방식을 써서 두 캐릭터를 헷갈리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2P 전용 마리오, ‘루이지’다. 설정 상 마리오의 동생이라고 한다.

루이지가 캐릭터로 자리잡으면서 '형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 '겁쟁이', '지적임' 등의 특성도 생겨났다.

초창기 루이지는 1P용 마리오 그대로의 생김새에서 색만 녹색 위주로 바뀐 모습이었다. 애초에 1P의 캐릭터와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이름도 루이지(類似, るいじ)라 붙게 됐다. 이후 시리즈가 인기를 끌면서 루이지에게도 세세한 설정이 붙기 시작했는데, 형인 마리오를 동경하면서도 질투한다는 특성이 도리어 컬트적 인기를 끌면서 마이너 취향의 팬들을 끌어 모으게 됐다.

해외에서는 '안습 캐릭터의 대명사'쯤으로 취급받는 상황.

마리오의 ‘유사품’에서 출발한 루이지는 현재 외형은 물론이고, 능력도 마리오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주인공인 마리오의 인기만큼은 넘어설 수 없다. 루이지 본인도 그런 점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듯… 이것이 기묘하게 캐릭터로 정착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2인자’격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 힘내라, 넘버 2! 베지터 (드래곤볼)

드래곤볼 시리즈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베지터’는, 상기한 다른 인물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면이 있다. 개그맨 박명수처럼 직접적으로 자신이 2인자라 칭하는 장면도 없고, 프로게이머 홍진호처럼 숫자 2와 연관성이 큰 것도 아니다. 또한, 루이지처럼 유사품 캐릭터에서 비롯된 경우도 아니다. 그런데 왜인지 우리는 베지터를 ‘영원한 2인자’로 평가하고 있다.

호기로운 첫 등장. M자 탈모가 진행 중인 듯. [드래곤볼 애니메이션 장면]

사실 수많은 강자들이 등장하는 드래곤볼이란 작품 속에서, 베지터의 실력은 2등에도 미치지 못한다. 작중 계속해서 등장하는 악당들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면서, 멋진 등장 이후 3분 만에 ‘탈탈’ 털린다고 ‘3분 요리’, 적 캐릭터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한 ‘전투력 측정기’ 등의 여러 별명을 얻기까지 한다.

물로 보이는게 진짜 싫었나보다. [드래곤볼 만화책 장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오공을 목표로 끊임없이 노력한다. 위에서 소개한 루이지의 캐릭터 특성이 ‘마리오에 대한 열등감’이라면, 베지터는 ‘카카로트(손오공)에 대한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캐릭터다.

끝내 자신보다 강한 손오공(카카로트)을 인정하는 베지터. [드래곤볼 만화책 장면]

그런 베지터의 노력은 ‘프리저’ 에피소드, ‘인조인간’ 에피소드, ‘마인부우’ 에피소드 등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그 덕에 손오공에 버금가는 실력이라 딱히 말할 순 없으면서도(손오공의 장남 때문에) 유일무이한 라이벌의 포지션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힘내라 카카로트… 네가 넘버 1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주인공, 라이벌은 라이벌에 불과했다. 결국 세계관 최강자(원작 기준)는 손오공이었다. 베지터는 원작의 최종 결전(마인부우)에서 평생의 목표였던 손오공을 1인자로 인정하면서 그간 지켜온 자존심을 버렸다. 그것이 오히려 팬들의 기억에 남아, 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장면으로 자리 잡게 됐다. 2인자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수긍한 결과랄까.

 

■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2인자들

이밖에 현실세계, 창작물 속에는 수많은 2인자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사실, 모든 사람이 같은 능력을 지닌 세상이 아니고서야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를 빼어나게 잘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들의 능력에 크건 작건 못 미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최종 스코어가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에서 1위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쳐]

1등과 2등, 1위와 2위에 대한 시선도 각양각색이다. 누군가는 “스포츠의 세계에서 2등은 패배자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2등만 해도 엄청난 것이다”라 말한다. 무엇이 맞는 말일지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1등이 되기도 하고, 2등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누군가가 노력해 얻어낸 값진 2등을 ‘1등을 차지하기엔 실력이 미흡했다’고 쉽게 말할 순 없으리라 본다.

(게임 한정)매우 우수한 트레이너지만, 주인공 '레드'에게 늘 밀리는 '그린'도 2인자의 대명사.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장면]

一人之下 万人之上(일인지하 만인지상)이란 말이 있다. 쉽게 풀이하자면 ‘위로는 단 한 사람, 아래로는 나머지 모두’라는 의미다. 본디 신하로써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위치(왕을 제외하고)를 뜻하는 말이지만 이번 교양공감 포스트의 ‘2인자’들을 나타내기 썩 괜찮은 표현이 아닐까 싶다.

1인자, 1등은 보통 ‘거기에서 더 올라갈 곳이 없는 경지’를 나타낸다. 하지만 2인자, 2등은 그렇지 않다. 아직 넘어야 할 벽이 한 꺼풀 더 남아있기 때문이다.

'버스커버스커'도 슈퍼스타K3에서 우승은 못 했지만, 엄청난 사랑을 받았었다.

어쩌면 세상 모든 2인자들은, 그 ‘단 한 명’만을 남겨두고 있기에 더 오기가 생기고, 더 노력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양공감팀이 소개한 2인자들 모두 저마다의 노력으로 경쟁자들을 뛰어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나.

교양공감팀이 세상 모든 2인자들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2등만 해도 대단히 값진 것”이라 위로하진 않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서두에 언급했듯,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하는 데다, 2등이라는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들의 속내를 감히 이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

여러분의 피, 땀, 눈물은 반드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 바뀐 베지터 / 온라인 커뮤니티 캡쳐]

하지만 세상 모든 2인자 여러분에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 여러분이 해온 노력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1등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어쩌면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 때문에 여러분이 1등보다 더 빛나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고. 힘내시길, 그리고 지금처럼 열심히 달려주시길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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