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낙규 축제이야기] 장자와 분청사기, 공자와 조선백자

 

[공감신문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 공자와 장자의 사상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삶에 대한 가치관.

장자가 추구하는 삶은 절대자유의 경지에서 노니는 것이다. 숙명적 실존의 한계를 벗어나 삶을 완성하여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넓은 들판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면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이다.

“요임금이 허유에게 나라를 넘겨주겠다고 제의하자 허유는 제 몸을 다스리는 일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장자 ‘소요유’편)

공자의 가치관은 세상에 나아가 올바른 정치를 통하여 백성을 교화하여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공자는 이를 ‘대학(大學)’에서 격물(格物·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듦), 치지(致知·이치를 깨달음), 성의(誠意·정성을 다함), 정심(正心·올바른 마음), 수신(修身·인격 도야), 제가(齊家·가정을 잘 돌봄), 치국(治國·나라를 다스림), 평천하(平天下·세상을 평안하게 함)라고 가르친다.

장자는 상(商)을 이상적인 국가로 꼽는데, 검소하고 자연 중심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주(周)를 최고의 이상국가로 보고 세련된 인간 중심 국가를 꿈꾼다.

둘째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장자는 치인사천(治人事天) 즉 자연을 통해서 해석한다. 수기(修己)만으로 치인할 수 없으며, 그것은 어쩌면 남에게 재앙을 안겨줘 결국 자기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장자의 무위(無爲)란 인위적인 가치판단에 의하지 않고 균형과 조화의 질서 하에서 자연의 섭리와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인(至人)은 무위(無爲)하며, 위대한 성인(聖人)은 작위가 없는데 이는 하늘과 땅의 원리에 달관하고 있기 때문이다.”(장자 ‘지북유’편)

공자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자기 수양을 하였으면 사람을 다스리라고 가르친다. 이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신념을 가진다. 해석의 주체가 인간이다. 유위(有爲)의 정치다.

셋째 예악(禮樂).

장자는 악(樂)을 인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로 보며 예(禮)에 묶여 사는 것을 하늘의 형벌로 인식한다.

“자상호가 죽자 맹자반과 자금장이 노래를 부르며 거문고를 탔다. 자공이 ‘주검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이 예(禮)냐’고 물으니, 두 사람은 ‘이 친구가 어찌 예의 뜻을 안단 말이냐’며 껄껄 웃는다.”(장자 ‘대종사’편)

장자의 무악(舞樂)은 무위, 소박, 담박한 특성을 보이는 반면, 유가에서는 인위, 가공의 특성을 보인다. 함지지락(咸池之樂)을 예로 들어 보자. 연주장소를 장자는 들판, 공자는 궁중, 내용은 대자연의 자연스러움 대 인의(仁義)의 덕(德), 형식은 변화와 규범에 얽히지 않음 대 규칙의 준수 등의 차이가 있다.

공자는 예악을 욕망에 사로잡힌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통치자의 지배수단으로 본다. 예(禮)를 중심으로 악(樂)을 수용한다. 고례(古禮)의 회복을 통하여 새로운 도덕적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따라서 일개 대부인 계씨가 팔일무의 제식을 자행하는 것은 예의 파괴이며 이는 사회 혼란을 야기시킨다고 비난한다.(논어 ‘팔일’편)

또한 예술은 감성의 표현이지만 그 표현은 지극히 절제된 틀 속에서 섬세한 미감이 발견되며(大樂必易 大禮必簡·대악필이 대례필간), 인위적인 도덕규범으로 인간의 행위나 감정표현을 자제하고 조절해서 중화에 이르도록 한다(樂而不淫 哀而不傷·낙이불음 애이불상). 따라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정의 발로는 축소되고 억제된다.

넷째 시비(是非) 판별의 기준.

장자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 분별심, 이분법적인 의식을 버리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시비에서 초월한 마음을 가지라고 한다. 신나는 삶, 절대적인 자유의 삶을 추구하면 새로운 나로 탄생되며 오상아(吾喪我), 좌망(坐忘), 심재(心齋)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모장이나 여희는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숨고, 새는 보자마자 날아가 버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 버린다. 이 넷 중 어느 쪽이 아름다움을 바르게 안다고 하겠는가?”(장자 ‘인간세’편)

장자는 예술작품을 미추(美醜·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이 아니라 활기, 원기, 생기, 우주 생명력의 표현으로 본다. 왜냐하면 미추는 상대적인 것이며, 본질은 우주만물에 충만한 생명력의 표현인 기(氣)이기 때문이다.

반면 유가(儒家)들은 모든 사물은 그 이름에 상응하는 본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정명(正名) 사상이다.

공자의 악(樂) 사상은 순자로 이어지며 그 주요 이념은 ‘예기(禮記)’의 ‘악기(樂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술작품은 교화적 효용성이 있어야 한다. 이 전통이 이어져 회화에 있어서 6가지 법칙을 규범화했다.

기운생동(氣韻生動·대상이 갖고 있는 생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 골법용필(骨法用筆·형상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필치와 선조·線條를 적절하게 사용), 응물상형(應物象形·대상의 실제 모양을 충실하게 사실적으로 그림), 수류부채(隨類賦彩·사물의 종류에 따라 정확하고 필요한 색을 칠함), 경영위치(經營位置·제재의 취사선택과 화면의 구도와 위치 설정), 전이모사(傳移模寫·옛 그림의 모사를 통해 우수한 전통을 더욱 발전시킴). 규칙, 규범, 의식 등 분명한 시비 판별의 기준을 가진다.

이제 분청사기와 조선백자 작품을 하나씩 감상하면서 장자와 공자의 사상을 비교해 보자.

‘분청자철화어문양이발’에는 거대한 물고기가 비례에 맞지 않게 그려져 있다. 장자 ‘소요유’편에 곤(鯤)이란 거대한 물고기가 붕(鵬)이란 새가 되어 구만리를 날아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기장이 그린 물고기는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기보다 ‘소요유’에 나오는 거대한 곤을 그린 것이 아닐까?

▲ 분청자철화어문양이발

‘분청자박지모란초화문편병’에도 역시 비례에 맞지 않는 은행잎이 대담하게 새겨져 있다. 마치 초현실주의자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연상시킨다. 이 그림이 자손 번창과 장수, 부귀영화를 의미한 것일까? 좀 더 살펴보자.

‘분청자귀얄문유개발’과 ‘분청자귀얄문병’을 보면 장자의 내용 중 가장 문학적이라고 하는 ‘제물론’에서 지뢰를 설명하는 문장을 읽는 듯하다.

“커다란 땅덩어리가 숨을 내쉬면 그걸 바람이라고 하지. 이 바람은 불지 않으면 조용하지만, 일단 불기 시작하면 온갖 구멍이 울부짖기 마련이지. 너도 긴 바람소리를 들어봤겠지? 높고 험한 산, 깊은 숲 속에서 둘레가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어, 어떤 것은 콧구멍 같고, 어떤 것은 입 같고, 어떤 것은 귀 같고, 어떤 것은 가로지르는 나무 같고, 어떤 것은 나무그릇 같고, 어떤 것은 절구통 같고, 어떤 것은 깊은 웅덩이 같고, 어떤 것은 얕은 웅덩이 같지. 그런데 그 구멍에서 물이 세차게 흐르는 듯한 소리, 화살이 나는 듯한 소리, 꾸짖는 듯한 소리, 헉헉 들이마시는 듯한 소리, 외치는 소리, 볼멘소리, 웃는 소리, 아양 떠는 소리가 나지. 앞의 바람이 웅웅 소리를 내면 뒤따르는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는데 산들바람이 불면 작은 소리로 대꾸하고 세찬 회오리바람이 불면 큰 소리로 대답을 하다가 기어코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모든 구멍이 텅 비게 되지. 너도 바람이 한 바탕 지나간 뒤에 나뭇가지들이 흔들거리고 살랑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겠지.”

▲ 분청자귀얄문병

 

‘분청자선각어문발’에는 복어처럼 배가 볼록한 귀여운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물고기 또한 자손의 번창을 의미할까?

장자 ‘대종사’편에는 샘이 말라버려 땅 위에 남은 물고기들이 습기를 뿜어내어 서로 거품으로 적셔주지만 강호에서 서로를 잊고 사는 것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涸轍鮒魚 不如相忘於江湖·학철부어 불여상망어강호).

이 배볼록이 물고기는 자손의 번창보다는 넓은 세계에서 자유로이 소요하는 진인(眞人)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분청자선각추상문편병’은 비례와 규칙을 깬 추상적인 면 분할을 하였는데 무아의 경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분청자선각어문발

‘분청자박지초문접시’는 정말 15세기 후반의 작품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현대적 감각이다.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스스로의 시원인 자본자근(自本自根)이란 말이 떠오른다.

인생의 온갖 고통과 부자유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세계에서 노니는, 정신적 자유해방의 경지에서 유희하는 자를 장자 ‘소요유’편에서는 지인(至人), 신인(神人), 성인(聖人)이라 일컫는데 바로 이들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옛 성인들은 어떤 색의 옷을 입었을까?

묵자는 이름 그대로 검은색(黑)의 옷을, 공자는 흰색(白), 그러면 장자는? 몽(蒙)지방에서 산림원 하급관리로 있으면서 흙과 함께한 장자의 삶을 볼 때 황색(黃), 바로 분청자색의 옷을 입지 않았을까?

조선백자로 가보자.

▲ 백자병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백자병’은 풍만하고 안정감이 있으며 정갈한 맛이 있다. 위대한 음악은 쉬워야 하고, 위대한 예법은 간결해야 한다(大樂必易 大禮必簡)는 ‘예기(禮記)’의 이념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16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현명대발’은 퇴계와 율곡이 추구하는 유교 이념인 청렴결백의 표현이 아닐까? 사물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예악이 갖는 교화의 효율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을 대변한 작품으로도 읽힌다.

16세기 전반의 ‘백자청화매조문병’에서는 청화백자 위아래에 시문되던 연관무늬가 사라지고 매화나 대나무 등 중요한 주제만 전면에 그렸다.

▲ 백자청화매조문병

중국 백자의 영향에서 벗어난 조선의 특성을 갖추기 시작한 작품으로 “예술은 감성의 표현이지만 그 표현은 지극히 절제된 틀 속에서 오히려 그 섬세한 미감이 발견된다”는 유교의 ‘낙이불음 애이불상’ 사상의 예술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유교에서는 악(樂)의 무질서는 인간의 타락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1636년 오랑캐로 불리던 여진족이 세운 청(淸)이 등장하여 중국을 지배하자 조선은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 일컫는다. 우리가 중국이며 우리 안에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우리 것을 소재로 제작한 것이 ‘백자철화매조문항아리’다. 청과의 단절로 청료(코발트)의 수입이 중단되자 산화철로 철화백자를 만들게 되었으며, 사대부의 기개를 나타내는 사군자를 그려 넣었다.

18세기 전반 ‘백자달항아리’는 반으로 나눠 제작하여 붙임에 따라 비대칭을 이루나 오히려 우아한 멋으로 더 큰 매력을 가지며 고유의 순전성으로 한국미의 결정체로 우뚝 선다.

▲ 백자달항아리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중국은 백자나 청화백자 위에 에나멜로 삼채, 오채, 칠채를 칠하여 화려한 채색자기를 만들었으나 우리는 오랑캐 짓이라고 거부하고 철화백자를 생산하게 된다.

18세기 후반 ‘백자청화운용문항아리’는 청료가 다시 수입되어 청화백자를 만들었으나 코발트가 금보다 훨씬 비싸 도화원의 화원이 그림을 그린다. 이 그림은 철저히 규범에 따라 그리게 된다.

논어 ‘팔일’편에서 음악의 연주는 “처음 시작할 때는 타악기가 주선을 이루고 다음에는 현악기가 그러면서 나중에는 연음 형식으로 꼬여나가 최종으로 완성된다”며 타악기, 현악기, 관악기의 순서로 연주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교에서 예술은 개체성의 창작이 아닌 보편성에 의한 모방의 측면을 중시하며, 인의가 덕성의 근본이며 이 덕성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예술(詩歌·시가)이라고 가르친다.

조선백자에서 유교의 이념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며 따라서 자연히 공자가 떠오른다.

분청사기는 임진왜란 이후 사라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가설을 세워본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은 일상생활과 관련된 생활이념으로 체화되었으나, 중기 이후 조선성리학의 이념과 주류 사상체계가 확립되었다. 특히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면서 성리학 이외의 다른 목소리에 대해서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매도하여 자연스럽게 장자(莊子)도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장자가 지나치게 공자를 신랄하게 비판하다보니 장자를 더욱 배척하지 않았을까? 이에 따라 분청사기를 통한 장자 사상의 표현은 배격됨으로써 서서히 분청사기가 사라지게 된 것은 아닐까?

분청사기와 조선백자에서 장자와 공자를 찾는 것은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을 개념화해 보겠다는 시도로,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다음의 글이 떠 오른다.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에 아직 있기 이전, 그것이 아직 있기 이전의 없음이 있어야 한다… 이제 내가 뭔가 말했지만 이렇게 말한 것이 정말로 뭔가 말한 것인지 말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