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어렸을 때부터 내 곁엔 늘 물건들이 따라다녔다. ‘중고’라는 꼬리표가 붙은. 한 번 이상의 주인을 거쳐 간 시간의 얼룩과 때가 묻은 물건들이다. 오빠가 입던 옷을 입고, 이제는 어린이 책을 펴볼 일이 없어진 누군가의 전집을 읽고, 중학교에 입학 할 때도 크기가 안 맞아 헐렁한 중고 교복을 입었다. 입학식 때 새 교복을 입은 친구들을 보며 괜히 시무룩했다. 나도 나만의 얼룩과 때를 남기고 싶단 말이야!

쌈짓돈을 모으고 모아 부모님이 아닌 나 스스로 처음 새 책을 샀던 기억은 아직도 떠오른다(물론 그전에 책을 샀을 수도 있지만, 나의 기억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고 말한다). 눈물 콧물 쏙 빼고 잠들었던 그날은 여전히 소중하다. 그때의 새 책은 때묻은 헌책이 되었지만 그 안엔 나의 유년기가 담겨있다.

다시 되팔 생각은 없지만 만약 중고서점에 내놓게 된다면, 구매자는 그저 중고책 <마당을 나온 암탉>이 아닌 나의 흔적이 담긴 <마당을 나온 암탉>을 사는 것이다. 물론 이런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흔적이 탐탁지 않은 이들은 중고 물품 구매를 꺼려한다. 괴담이나 공포영화에선 꼭 그런 물품들이 한 가정을 파탄 내지 않는가. 다소 공포스러운 예이긴 하지만, 중고 물품이 누군가의 흔적이나 기운을 담고 있는 건 확실한 듯하다.

그래서 벼룩시장을 구경하는 일이 재밌구나 싶다. 새 물건이 아닌 누군가의 물건을 보는 일은 그 사람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주니까. 아주 짧은 순간이든 그 사람의 삶을 지나쳐온 것들이지 않는가.

어느 나라든 벼룩시장이 꼭 있듯, 멜버른에도 있다. 시티에서 이십분 정도 트레인을 타고 나가면 캠버웰에 당도할 것이다. 이곳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플리 마켓이 열린다. 푯말도 있고 일요일날 캠버웰에 내리는 사람들 대부분은 선데이 마켓을 향하기 때문에 쫄래쫄래 따라가면 된다.

캠버웰 선데이 마켓은 오전 일곱시 삼십분 부터 열두시 삼십분에 끝마친다. 생각보다 큰 규모의 플리 마켓이다. 문고판 서적, 옛날 장난감, 다양한 스타일의 옷과 그릇, 고이고이 보관해온 골동품, 심지어 소라껍데기도 있다. 역시나 좌판마다 성격이 달랐다. 가끔 물건들을 고르다가 주인을 보면, 그럼 그렇지 하며 피식 웃음이 난다. 흔적이 남은 물건들은 주인과 닮았다.

전문적인 느낌이 나는 상인들이 아닌, 소소한 개인의 좌판을 보면 더 여실히 느껴진다. 돗자리에 가지런히 놓인 인형들을 보고 있자면, ‘이 사람의 아이가 이 인형을 가지고 놀았을까? 아니면 본인이 가지고 놀던 인형을 더이상 보관할 수 없어 가져온 걸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사람의 삶에 여러가지 경우의 수가 생긴다. 물론 물건에 얽힌 역사에 대해서 내가 알 수는 없다(굳이 시시콜콜 물어보지 않으니).

이왕 플리 마켓을 즐기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고 싶다면, 자본주의적인 생각을 버려보자고. 누군가에겐 고작 2불짜리 인형이어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고작 2불짜리 인형이 아닐 테니까. 흔적 위에 흔적을 덧칠해 가면서 고작 2불짜리 인형은 몇 세대의 역사를 가지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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