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언제나 밝고 아름다운 덕이 넘쳐나는 창덕궁은 가을이 오면 평소보다 더욱 많은 인파로 시끌벅적거린다.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해설을 하다보면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들이 가장 많은 질문들을 주저리주저리 쏟아 낸다. 해설 장소로 이동하는 도중 건물 중앙 처마 밑에 걸린 편액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무슨 글자냐 하고 질문공세 시작이다. 

궁궐 관람의 시작은 초입 광장의 기와지붕 추녀 아래 이름표인 편액 붙은 커다란 대문 앞에서부터 시작된다. 때문에 궁궐 관람은 건물의 이름과 특징 사용용도를 잘 표현하고 있는 편액의 글자와 의미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 고궁의 가을 향기가 뿜어 나오는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편액을 따라 걷다보면 궁궐관람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현판(懸板)은 ‘글씨를 쓴 널빤지[板]를 걸었다[懸]’는 뜻이다. 글씨나 그림을 널빤지나 종이, 비단 등에 새기거나 써서 벽이나 기둥 등에 거는 액자 종류 등을 말한다. 주련, 게판, 상량문, 편액, 등등이 여기에 속한다. 주련은 대련이나 명구를 쓰거나 새겨서 기둥에 거는 것. 게판은 알림사항 등을 적어 게시한 것. 

후원의 관람정과 파초 잎 모양의 편액

편액(扁額)의 ‘편’은 글씨를 쓴다는 뜻이며 ‘액’은 건물 앞부분 높은 곳을 이른다. 즉, 편액은 건물의 특성을 담고 있는 이름표이면서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거는 목판을 일컫는다. 편액은 매우 크고 화려하면서 예술적,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이 많다. 대부분 유교의 정치적 이념인 이상적인 덕치주의를 실현하고자하는 이념을 담고 있다.

성종실록에는 궁궐이외의 지역에서 근무하였던 군사가 대궐 문 이름을 알지 못하여 해가 저물어도 지키는 곳에 도착하지 못하여 죄를 받게 되는 일이 자주발생하자 이는 적당하지 못한 일이므로 대궐 문에 편액이 없는 것은 각기 편액을 걸도록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각기 2개의 이름을 편액(扁額)하여 아뢰어 임금이 낙점(落點)하였다. 

지금도 단봉문(丹鳳門) 숙장문(肅章門) 연영문(延英門) 금호문(金虎門) 요금문(曜金門)의 문 이름이 남아 있다. 세조임금은 즉위한 후 정전인 인정전을 다시 짓고 궁내 각 건물의 명칭을 고쳤는데, 이때 고친 전각들의 이름이 현재까지 전해져 온 편액이 많다.

궁궐의 편액은 영화당 편액처럼 영조 임금님이 직접 쓰신 어필, 효명세자처럼 세자가 쓴 예필 인정전처럼 정조 때 식년 문과에 장원한 명필가 신하 서영보가 쓴 편액이 있다. 궁궐편액의 글씨는 세 글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열세 살 고종의 어필인 관물헌의 '집희(緝熙)'처럼 딸랑 두 글자만 쓰여 있는 편액도 있다. 세 글자 중 앞의 두 글자는 전각을 건축하면서 얻고자 하였던 유교적 이념을 마지막 한자는 대부분 전당합각제헌누정의 글자중 하나가 쓰여 있어 쉽사리 건물의 특성을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 글자 중 끝 자인 전(殿)은 큰집을 말한다. 창덕궁정전은 인정전, 절에서는 대웅전, 서원에서는 대성전처럼 가장 중심이 되는 으뜸건물이다. 특이하게도 후원의 폄우사(砭愚榭)의 끝 자가 도장, 정자, 무술을 익히는 곳이라는 뜻의 사(榭)자다. 이로보아 효명세자가 이곳에서 수련활동을 주로하지 않았을까?

궁궐 후원에는 특이한 편액도 있다. 『궁궐지』에는 부채 모양의 정자라 하여 선자정(扇子亭)이라고도 하는 관람정 편액이다. 정자의 모양과 편액의 모양이 잘 어울리도록 파초 잎 모양의 널빤지에 흰색의 행서체로 각자하여 편액을 걸어 색다른 맛이 나도록 디자인한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창덕궁에는 구중궁궐답게 많은 전각이 있었다. 조선초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꿋꿋이 버텨오면서 부침을 거치긴 하였지만 전각과 편액이 함께 오래도록 제자리를 지켜온 건물로 인정전 희정당 대조전 돈화문등이 있다. 숙종이후로는 선정전이 있다. 실록에는 이름이 거론되고 있지만 현재는 여러 이유로 광연루 서총대와 같이 편액과 함께 사라진 전각들이 있다.

전각은 사라졌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편액은 살아남아 국립 고궁 박물관에 보관되어 전해져 오는 것도 있다. 효종 임금 때 창경궁내 통명전(通明殿)에서 생활하던 왕대비(인조계비 장렬왕후)를 창덕궁 안으로 모시고자 고쳐 지은 대비전 건물로 ‘조용하게 쉬면서 장수를 누린다.‘는 뜻을 가진 지금의 자리의 수정전, 영조가 보경당(寶慶堂)에서 생모인 최숙빈에게서 태어난 장소를 기념하여 걸었던 “탄생당” 편액이다. 

편액 좌하단 “팔십서(八十書)” 글씨로 보아 영조가 80세에 쓴 편액 그리고 지금의 후원입구 매표소 자리는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었던 곳으로 세자가 주로 서연을 펼쳤던 동궁영역의 중희당 자리다. 현재는 초석만 땅바닥에 남아 있고 편액은 박물관에 있지만  글씨는 정조의 어필이며 사진처럼 매우 화려하면서도 잘 만들어진 편액이다.

#수정전 편액 #탄생당(誕生堂) 편액/ 출처=국립고궁박물관소장자료
#. 중희당 편액 / 좌측하단 인장은 홍제, 만기여기

편액 중에는 똑같은 문 이름을 가진 편액이 있다. ‘즐거운 일들을 갖고서 오래도록 문지방을 드나들라는’ 장락문(長樂門) 편액이다. 흥선 대원군의 명필글씨와 인장이 돋보이는 낙선재 입구의 솟을 대문에 걸린 편액이다. 또 하나는 연경당 초입 솟을 대문에 걸린 편액으로 자세한 이력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창덕궁에서 편액을 가장 가까이서 자세하게 볼 수 있는 편액이 ‘경사를 연출 한다’는 뜻을 가진 연경당 편액이다. 하지만 이 편액은 연경당 사랑채 대청마루 앞에 걸려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관심을 갖고 자세히 보려면 대청 가까이 다가가 댓돌위에 올라서서 보는 것이 좋다.

편액의 이름이 지었던 뒷이야기도 다양하다. 주변의 바위와 냇물의 경치가 빼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는 후원 신선원 구역에는 몽답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몽답(夢踏)’은 ‘꿈길을 밝고 간다’는 뜻인데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훈장 김성응이 북영에 작은 정자를 한 채 지었는데 내가 대보단에서 바라보고 이름을 몽답정(夢踏亭)이라고 내려 주었으니 이를 걸게 하라.”라고 하였다고 하며 『동국여지비고』에는 숙종이 일찍이 꿈에 이 정자에 행차한 일이 있어 이 이름을 내려 주었다고 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괘궁정은 ‘활시위를 걸어놓는 정자’라는 의미이지만 활쏘기 하는 사정(射亭)이 있어 괘궁정(掛弓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같은 건물이지만 임금님에 따라 편액을 바꾼 경우도 있다. 희정당은 본디 임금이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의미의 수문당(修文堂) 또는 숭문당(崇文堂)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신하들이 아버지 성종이 26년간 거쳐하던 곳이라고 하면서 이름을 고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였으나 수리를 하면서 ‘정치를 잘하여 모든 일이 잘되고 모든 백성이 화락하게 된다’는 희정당(熙政堂)으로 고쳐 불렀다.

한 건물에 보춘정과 희우루의 두 개 편액이 걸린 성정각이 있다. 보춘은 봄이 옴을 가장 빨리 알리다. 춘은 동쪽을 말하며 왕세자를 춘궁이라고도 한다. 선원전 영역의 양지당 입구 문이 보춘문이다. 기쁠 희(喜) 비 우(雨)자의 희우루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서 걸었다는 의미인데 정조임금 때 각이 완성되었을 때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이일을 기념하여 걸었다고 한다. 기와를 올린 희우정은 주합루 뒤편에 있다.

전각 중에는 본래의 편액이 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교체되어 버린 청나라 풍의 평원루다. 헌종은 ‘선을 즐긴다는’ 낙선재를 지었다. 낙선재 뒤편 화계 위쪽에 있는 정자가 상량정이다. 루가 정으로 끝 글자가 바뀌었고 편액 글씨가 본디 우에서 좌로 쓰여지는 것이 보통인데 상량정은 반대다. 이해가되지 않는다. 원래 정자의 편액은 ‘이웃나라와 가까이 평화롭게 잘 지내라’의 의미인 평원루로 청나라의 문인 옹수곤이 쓴 글씨다. 일제강점기하에 지금의 ‘시원한 곳에 오른다’라는 의미의 상량정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평원루와 상량정 편액

서궐내각사는 주로 일제 강점기하에 훼손되어 폐허로 남아있던 빈자리에 전각을 복원하고 생기를 불어 넣어 하나둘씩 복구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진 내각 검서청 규장각 운한문 봉모당 책고 약방 옥당 억석루와 같은 전각들과 편액들이 제 위치로 돌려지고 있다. 이곳 일원은 정조임금 때 후원의 규장각을 지금의 도총부 자리로 옮겨 이문원(摛文院)으로 명명하고 어필(=임금님 글씨)로 편액 하였다고 한다.

아래의 사진은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편액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옥같이 귀한 건물’이라는 의미의 옥당 편액이다. 주로 가로로 써서 거는데 조선중기의 옥당 편액은 세로로 걸었다. 홍문관(弘文館)의 다른 이름으로 경연과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아래 두개의 옥당 편액은 ‘창덕궁아름다운 덕을 펼치다.’의 책에 수록된 사진으로 건물은 사라져버리고 편액만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자료로 남아 있다.

좌측 : 홍문관에 실제 걸었던 임진년 문인 이원영의 글씨

중앙 : 1699년 홍문관에 걸었던 편액(扁額) 홍문관 응교(應敎)김진규의 글씨

우측 : 2001년 정도준 글씨 오옥진이 새긴 편액

평상시 가을 후원관람을 한가로이 경치를 즐기면서 추억의 사진을 찍으면서 눈요기의 자유를 만끽 할라치면 해설사와 함께 한정된 시간 내에 관람을 끝마쳐야 하는 번거로움으로 인하여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궁궐은 매년 봄과 가을 “후원에서 만나는 한 권의 책 행사”를 개최하는데 이 기간을 활용하면 원을 해소할 수 있다. 이 행사기간 동안에는 기존처럼 후원관람 시간표에 맞춰 후원 입구에서 해설사와 함께 후원으로 입장하되, 입장 이후부터는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면서 관람하거나 개인별로 자유롭게 관람 할 수도 있다.

울긋불긋 단풍이 가득한 이번 가을의 어느 하루는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창덕궁 전각과 후원의 편액을 따라 걸으면서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환상적인 관람의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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