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낙규 축제 이야기] 축제는 혼란 속의 정돈된 포스트모더니즘

 

[공감신문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 축제란 모름지기 혼돈스러움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놀이다. 전체가 조망되지 않아야 한다. 보물찾기 놀이에서 보물은 숨겨둔 사람마저도 어디 있는지 몰라야 진정한 보물찾기 놀이지 않는가? 보물이 어디 있다고 외치면 그때부터는 보물찾기가 아니라 빨리달리기 게임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그래서 축제는 논리적으로 잘 정돈된 모더니즘보다는 혼란 속의 정돈된 포스트모더니즘이어야 한다.

일탈로 시작한 춘천마임축제가 어느새 제도권으로 편입된 건 그만큼 마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도가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탈을 지향하는 한 마임축제는 아방가르드로서의 역할을 한다. 정말 도깨비장난 같은 일이 눈앞에 펼쳐진다. 낮도깨비와 밤도깨비의 난장들. 공연자와 스태프 그리고 관객이 모두 도깨비가 되어 판을 엎어버려 결국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올해로 28년이 된 춘천마임축제를 뒤돌아보면 축제 프로그램을 매년 새롭게 창조해 왔음을 볼 수 있다.

1989년 5명의 마이미스트들이 한국마임페스티벌을 개최한다. 관중은 400명.

1990년 무대를 서울에서 춘천으로 옮긴다.

1995년 춘천마임축제로 축제 명을 바꾼다.

1998년 공연과 놀이가 어우러져 밤새 열리는 ‘도깨비 난장’ 시작.

2000년 ‘도깨비 열차’ 운행.

2004년 ‘도깨비상’(어워드) 도입.

2006년 ‘아수(水)라장’과 밤샘 난장 ‘미친 금요일’ 개최.

 

니체 식으로 표현한다면 강자의 '힘에의 의지'로 매년 새로운 프로그램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프로그램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실험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냈다.

마임(mime)은 그리스어 ‘미모스(mimos·흉내)’에 그 어원을 둔다. 마임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몸짓과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사상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연극을 소설에 비유한다면 마임은 시라고 할 수 있는데, 많은 내용을 상징적으로 함축시켜 표현하기 때문이다. 팬터마임이 희극적 요소가 짙다면, 현대마임은 진지한 예술로서 새로운 마임을 추구한다.

언어는 공통된 의미, 공통된 구문, 공통된 용법으로 사회적 보편성과 협력한다. 그러나 언어는 실재를 그대로 반영하거나 그것과 일치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죽음이란 단어에서 우리는 슬픔을 느끼지만 나의 어머니의 죽음과 익명의 타자의 죽음은 느낌이 다르다. 결국 언어는 우리와 대상과의 사이를 잇는 다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예술가는 그런 판에 박힌 언어의 껍질을 깸으로써 다름과 차이를 보여준다. “꽃이란 낱말엔 아무런 향기가 없다”는 말라르메의 말처럼 사실이란 없고 다양한 해석이 있을 뿐이다.

 

신의 죽음

니체 당시, 이성의 전횡에 의한 인간의 천민화와 과학기술의 횡포, 그것에 의한 자연 유린으로 이 세상은 큰 병에 걸렸다. 따라서 생을 복원하고 과학기술에 제동을 걸기 위한 외침이 ‘신의 죽음’이었다. 우연과 사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모든 인식은 삶을 강화시키는 해석이어야 한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고통스럽기에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존재세계와 변하는 일체의 생성세계로 나눈다. 이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종말이 첫번째 신의 죽음이다.

신의 세계, 피안의 세계는 이 세계인 인간세계보다 우월하다는 종교적 이원론의 죽음이 두번째 신의 죽음이다.

도덕적으로 산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이 세상에서 잘 살지 못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에 신은 있어야만 한다는 칸트의 요청된 이성 신앙으로서의 신의 죽음이 세번째 신의 죽음이다.

니체는 오로지 이 땅, 이 세상, 우리가 내딛고 있는 이 대지에 충실하라고 외친다. 신의 죽음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이자 가치의 토대가 붕괴된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허무주의에 빠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가 정립되어야 한다. 니체는 이 대지가 가치의 모태이므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자연은 다양한 힘이 지배하는 세계로 힘에 대한 지향, 힘에의 의지의 세계다.

우리나라 1세대 마임 예술가인 유진규 등은 지난 1989년 서울의 공간사랑에서 열린 한국마임페스티벌을 이듬해 춘천으로 옮겨와 지금의 명실상부한 국제마임축제로 끌어올렸다. 행사를 기획한 관계자들은 춘천을 ‘마임의 도시’로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서울에 편중돼 있는 공연예술의 무대를 지방으로 옮겨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들의 시도로 4명의 마임이스트가 시립문화관과 거리에서 각각 한 차례 공연했으나 관객은 몇백명에 불과했다. 니체가 했던 말처럼 이들은 너무 일찍 왔다.

초라하게 시작했던 마임축제는 마임 공연과 다양한 콘텐츠가 결합된 독특한 형식의 축제로 진화하게 된다. 어느 하나에만 치우쳤다면 지금의 춘천마임축제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의 불굴의 노력으로 매년 약 16만명의 관중을 동원하게 된다.

‘2015 춘천마임축제’는 몸과 몸이 만들어내는 모든 움직임인 ‘짓’에 주목한다. 품위있는, 격조 높은, 뒤틀린, 추한, 우스꽝스러운, 재미있는,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세상의 모든 몸짓을 네 가지 ‘짓’으로 풀어낸다.

첫째, 몸짓은 예술적 몸짓으로 몸을 기본으로 하는 다양한 예술장르로 의미있는 몸의 행동을 포함한다. 빛의 도시에서 구현된다.

둘째, 춤짓으로 무용, 연희, 탈춤, 탱고, 왈츠, 플라멩고 등으로 불의 도시에서 볼 수 있다.

셋째, 광대짓으로 가면극, 인형극, 서커스 등으로 몸의 도시에서 공연한다.

넷째, 대동짓으로 모두의 몸짓이 어우러져 함께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몸짓이다. ‘아!水라장’은 물의 순수성으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미친 금요일’은 현실에 얽매인 나를 내려놓으며 이성에서 벗어난다. 불의 도시에서 함께한다.

춘천마임축제는 마치 도깨비들이 자신의 비밀 장소를 숨기듯이 축제 장소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도깨비소굴인 고슴도치섬에서 공지천으로 주무대를 바꾸고, 도심 한복판 상가에서, 호숫가에서, 산정에서, 골목길에서, 학교 마당에서, 노인정에서, 극장에서, 병원에서 다양하게 펼쳐진다.

극장에 한정됐던 공연이 거리로 나온 것은 1994년. 건물 로비와 길거리, 공공시설 등으로 무대를 넓히며 시민축제로 바뀌었다. 일본과 미국 팀도 끌어들이며 국제적인 축제로 발전시켰다.

마치 니체가 겨울에는 니스, 봄과 가을에는 토리노, 여름에는 질스에서 보내며 글쓰기를 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실바플라나 호수에서 니체 사상의 정수인 ‘영원회귀’가 만들어졌다.

“건조한 공기와 맑은 공기가 천재에게 필요한 조건이다. 신속한 신진대사와 풍부한 심지어 굉장한 양의 에너지를 계속 공급할 수 있는지가 천재에게 필요한 조건이다.”

‘2015년 춘천마임축제’는 프랑스, 슬로베니아, 영국, 미국 등 10개국 13개 해외단체와 국내 500여명의 아티스트가 공연을 펼친다.

춘천마임축제는 프랑스 미모스 마임축제, 런던마임축제와 함께 세계3대 마임축제로 꼽히고 있다.

“우린 기대감을 갖고 축제를 만들고, 오는 사람도 기대감을 갖고 와서 그 기대감들이 서로 부딪혀서 스파크를 일으켰으면 좋겠다는 얘기죠. 우리가 쓰는 ‘미치지 않으면 축제가 아니다’라는 카피가 있는데,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은 ‘미친 금요일’과 ‘도깨비 난장’에 와서 젊음을 한번 부딪쳐 보자는 거죠!” (유진규)

 

힘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란 주인이 되려 하고, 더 많은, 좀 더 강한 힘을 추구하는 의지작용을 말한다.

이 세계는 서로서로 관계로 맺어져 있다. 매순간 자신의 힘을 극대로 방출한다. 그 결과 명령자와 복종자가 생긴다. 하지만 복종은 저항력을 상실한 복종이 아니라 저항하는 복종이다. 따라서 복종자는 자신의 힘을 다시 극대로 방출하여 명령자가 될 수도 있고 다시 복종자가 될 수도 있다. 오직 자신의 힘에의 의지에 달렸다. 따라서 힘의 위계질서가 형성되며 여기에 우연은 없다. 힘에의 의지가 운동하고 있는 한 이 세계는 필연적이다.

“너희들은 내게 이 세계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 너희들 자체도 이 힘에의 의지다. 그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만 있다. 그 이상 그 이하의 것은 없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다.”

 

그러나 춘천마임축제가 넘어야 할 과제도 있다. 규모와 프로그램 수에 비해 공연의 질 자체가 그리 높지 않다는 문제 제기도 있다.

유진규는 “국내 마임의 기반은 만들었으나 세계적 수준이라고 할 만한 마임공연은 사실 부족하다”며 “세계에 당당히 내놓을 수 있는 우리만의 수준 높은 마임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이 숙제”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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