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다면, 우린 더 많은 걸 이룰 수 있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영화<디벨레> 중에서)

 

영화 디벨르 스틸컷

[공감신문] 누구는 말한다. 너흰 정말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젊은 것들은 늘 불만이 많지, 세상 좋아진지 모르고.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도 어른들은 말했다. 대학생들이 비싼 등록금 내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시위나 한다고. 그 뜨거운 철없음은 대물림 되어져왔다. 특히 작년 연말, 나이가 지긋한 몇몇 택시 운전기사님들은 한숨 섞인 말투로 말씀하시곤 했다.

왜 박근혜한테 뭐라 그러느냐, 대통령한테 감히 물러나라니. 박정희가 우리 잘 살게 해준 지도 모르는 것들.
박정희까지 이야기가 닿았다. 난 당시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지만 꾹꾹 눌러 담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는 사실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날 한심하게 보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더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려고 우리의 영도자가 된 거라고. 우리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려고 다 같이 허리띠를 졸라맸다고. 새마을 운동 덕분에 아가씨가 히터 나오는 택시에 타서 쓸데없는 생각도 할 여유가 생긴 거라고.

새마을운동 전진대회(1978.2.22 장충체육관)

아마도 그에게는 그 시절이 본인의 ‘이토록 찬란한 순간’ 중 한 페이지였으며 당시에 창궐했던 독재의 기운은, 퇴근 후 아내가 끓여놓은 된장찌개 냄새 같은 거였나 보다. 2016년 겨울 어느 날, 바쁘고 화려해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택시 기사님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린 ‘민주주의’에 대해 배워왔다. 당시 내가 받았던 교육 과정은 이러했다. 중학교 시절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부터 출발해 그 개념에 대해 배우고, 의식이 더욱 발달한 고등학교 때엔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 어떤 투쟁들이 있었으며 역사적 의의가 무엇인지 배웠던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당연하게 얻은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투쟁의 결과였다, 반드시 지켜야 했으므로. 우린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독재 정권에 치를 떨게 되고, 당연히 그 원흉은 택시 기사님이 말한 ‘당시의 영도자’들이었다.

어느 누가 독재 정권 밑에 있고 싶겠는가. 당연히 그런 원흉이 없다면 아무도 그 발밑에 있으려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독재뿐만 아니라 모든 위협적인 체제나 지도자를 배척하지 않았던 이유는, 국민의식이 없거나 뭘 잘 몰라서 그런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제목의 독일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으며, 여태껏 지구상에 있었던 그러한 모든 일들의 시작이 사실은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느끼게 되었으며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섬뜩했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독일의 한 고등학교에서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하게 된 교사는, 아이들에게 파시즘 및 전체주의에 대하여 가르치고자 한다. 아이들은 여느 10대 아이들처럼 교사에게 반항적이며 제멋대로 굴기를 원한다. 전체주의? 제국주의? 파시즘? 그들에겐 그저 ‘정치’ 수업 중 한 부분일뿐더러 관심도 없고, 당연히 부정적 견해를 가진다. 이미 지난  날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죄한 ‘독일’의 아이들이다. 더 이상 아이들에게 이것에 대해 무엇을 더 가르칠까. 

교사는 그 수업을 듣는 아이들에게 클래스 공동의 목표를 준다. 시작은 단순했다. 스트레칭으로 몸이나 풀자며 아이들을 일으키더니, 왼발 오른발 박자에 맞춰 발구르기를 제안한다. 언제까지 하냐는 말에, 모두가 박자에 맞을 때까지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행동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밑에 ‘무정부주의’ 수업을 하는 교실을 무찌르자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교사의 말이 재밌다. 신나서 다함께 발을 맞춘다.

이후 아이들은 저들끼리 견고해지기 시작한다. 자기들끼리 단체 이름(디벨레)도 만들고, 인사법, 규율 같은 것까지 정한다. 이젠 교사가 무얼 하자고 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한다. 무엇을? 디벨레를 위한 행동을, 그리고 희생을. 디벨레를 위협하는 이들에 대한 처벌도 서슴지 않는다. 디벨레는 소중하니까.

그게 파시즘이다. 프로젝트가 끝나는 날, 교사가 묻는다. 수업 첫 시간 때 했던 질문을 기억하냐고. 독재 정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는 물었었다. 아이들은 독재 정치가 무엇인지, 그로 인해 어떤 일들이 야기되었으며, 독재자들이 어떤 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는지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덧 파시즘의 하나, 파스케스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심지어 클래스, 즉 ‘디벨레’가 끝났다고 하자- 어떤 아이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무너지듯 절망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파시즘(fascism)의 어원에는 여러 주장이 있는데, 그 중 강력한 것은 19세기 이탈리아의 작은 정치결합집단인 ‘fascio’에서 출발했다는 것. fasces(파스케스)는 라틴어로 나무 막대기를 뜻하는데, 이것을 도끼날과 묶어 결합했다는 의미다. 이것은 고대 로마 권위의 상징으로, 사실 처형과 처벌을 뜻한다.

고대 로마의 파스케스. / 사진=아마존
현대에 와서는 처벌이 아닌 ‘정권’의 상징물로도 쓰인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이야기해보자. 그 수업을 들은 아이는 생각 할 줄 몰라서 ‘파스케스’가 된 게 아니다. 이 클래스 아이들이 무지(無知)해서 ‘디벨레’가 파시즘에 빠진 것도 아니다.

보통 우린, 국민들이 무지하거나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독재에 휘말린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어쩌면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거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은 ‘새마을 운동’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고 말씀하신다. 새마을 운동이 우리 경제 성장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국민 대통합을 이뤄냈는지 모르지 않는다. 새마을 운동은 ‘디벨레의 발구르기’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심지어 다른 빈민국가들에게 ‘희망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는 국가 ‘전체’의 이익은 물론이요 한 가족과 개인 구성원들을 위한 피나는 노력이었다.

그래, 여기서 중요한 건 ‘개인’이 빠지면 안 된다는 거다. 이런 성공적인 분위기와 결합감에 젖어, 자칫 잘못하다가는 공동을 위한 스스로의 희생을 강요할 수도 있더라는 얘기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내야하는 이유는, ‘너’, 그리고 ‘나’도 행복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다. 이걸 왜 자꾸 잊는 건지 아니, 내 행복을 왜 우리의 행복이라고 자기 스스로 최면을 거는 건지.

‘처벌’의 상징성을 가진 파시즘은 사실, 개인의 감정을 억압하는 걸 당연스레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건 파스케스(나뭇가지)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다.

반면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느냐고? 아니다. 파시즘은 철저히 불평등을 원칙으로 하며, 심지어 불평등을 확신한다.

파시즘은 제국주의 및 전체주의와 비슷한 맥락으로 연결된다.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배 분위기를 야기 시켰으며, 식민국들을 굴복시키고 그 위에 군림했었다. 우리가 입어온 교복도 사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다. 평등? 공동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불평등을 원칙, 아니 확신한다.

파시즘은 ‘엘리트’에 의해 통제되어진다. 이것부터가 불평등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개인과 소수의 생각이나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통제자다.

팀웍, 공동체 정신은 때론 강력한 아름다움이다. 능력치를 끌어내주고 결함을 덮어주어,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더욱 가까이 도달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공동의 목표를 통해 개인의 자아실현과 행복, 번영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억압되어져야할 개인의 감정이나 욕구는 합리적인 것들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공동체만큼이나 개인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에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개인보다 때론 저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타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감정에 젖는 순간, 우리가 독재자들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다른 수업을 방해하는 디벨르의 파스케스처럼.

이 영화를 통해 그 동안 지구상에 있어왔던 수많은 국가 및 체제들의 번영과 몰락, 그리고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어떻게 시행될 수 있었는 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나도 그러한 인간 중 하나라는 사실이 섬뜩했다. 촛불을 가지고 광화문에 나서던 철없음과 같이, 이런 파스케스적 욕구 역시도 되물림이 되어져 우리 몸을 숙주삼아 있지 아니한가.

시간이 되시면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경로를 찾아 꼭 감상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영화 관계자 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영화 <디 벨레(Die Welle)>(독일, 2008)의 정식 수입을 고려해주시길 진심으로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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