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현실 꿈꾸며 마임축제를 만드는 '위버멘쉬'

 

[공감신문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 “가장 조용한 말이 폭풍우를 몰고 오며,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사상이 세계를 움직인다.”(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디오니소스적 긍정

디오니소스는 몸이 갈갈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고 부활하는 신이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어떠한 고통이 삶을 절망에 이르게 하더라도, 그 고통이 오히려 삶을 새롭게 만들도록 가치의 전환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화를 경험하는 인간과 그런 인간의 삶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긍정에 이른다.

파괴의 고통은 기쁨이며 생명 전체가 긍정의 대상이다. 고통을 고통 자체로 받아들여야지 배후 세계를 찾으면 안된다. 극도의 비참함을 느껴보지 않고는 완성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확실한 것, 변화하는 것, 다의적인 것이 우리의 세계며 위험한 세계다. 고통과 수난 속에서 정신의 크기가 드러난다. 건강한 사람이다.

반면 '최후의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비판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경멸하는 인간을 말한다. 늘 똑같은 것을 원하고, 똑같을 뿐이며, 삶의 유일한 목표가 자기보존이다. 병든 인간이다. 병든 자와 죽어 가는 자들이야말로 몸과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나라와 구원의 핏방울을 꾸며대는 자들이다. 고뇌와 무능함 이것이 그 모든 세계 너머의 세계를 꾸며냈다.

“삶에 디오니소스적으로 마주선다는 것, 이것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Amor Fati)다”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을 것이란 없다.”(‘이 사람을 보라’ 중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지’)

자신을 사랑할 수 없고 타인을 사랑할 수 없을 때 모든 비판과 경고는 복수심의 위장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저주할 때 그 저주가 바로 자신의 삶을 구성한다. 타인에 대한 증오로 인해 불모의 삶이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이다.

스스로를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고 극도의 고통 속에서 절정의 순간을 맞이할 때 위대한 창조는 시작된다.

 

허무주의의 극복

“삶은 부정되었다.”

실존은 허무하고 유죄다. 생성을 악으로 간주하고 증오하고 부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의미도 없고 목표도 없지만 불가피하게 회귀하는 무(無)로의 종결도 없는 그대로의 생존. 이것이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식이다. 따라서 고통을 감내할 수 없는 무능력에 빠진다.

힘에의 의지의 추동력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하여 건강한 인간 모습으로 다시 탄생해야 한다. 영원회귀를 통하여 생성을 정당화하는 존재론적 개념들을 구축하여 변화 자체를 긍정함으로써 허무주의는 극복된다.

 

영원회귀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사유 중의 사유라고 한다. 변화와 생성이 세계의 근본 현실이며, 어떤 종류의 실체성과 보편성도 거부하고 이를 통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한다. 변화와 사멸은 공포가 아니라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영원회귀는 기존의 상태를 떠나서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오는 끊임없는 소멸과 생성의 과정이다.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가운데 ‘차이’를 낳고 마침내 더 강해진 나를 마주하게 된다. 차이는 남과의 차이가 아니라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와의 차이다. 지금의 나를 소멸시키고 과거로부터의 나와 단절하면서 확연히 다른 나를 생성하는 것이다.

망치란 파괴의 도구가 아닌 창조의 도구로 사용된다. 창조를 위한 파괴다. 망치를 들고 부숴버린 우상 위에 새로운 삶의 가치를 건설하는 것이다. 매 순간이 의미가 있고, 우연을 극복한 필연성이 확보될 때 매 순간을 긍정하게 된다.

 

시작은 과거와 현재, 미래 이렇게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면서 계속되는 것 즉 영원회귀다. 왜냐하면 현재 속에서 종합되는 과거와 미래는 새로운 것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차이적 흐름이기 때문이다. 순간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삶의 변화는 이룩되지 않는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영원한 반복을 견뎌낼 도리가 없다. 생의 한 순간을 긍정한다는 것은 이미 내 삶의 모든 것을 긍정한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우리는 매 순간을 창조의 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삶의 매 순간을 창조와 변이, 생성과 파괴의 순간으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 운명애가 가능하겠나?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어 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굽어 있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얼마나 많은 일이 아직도 가능한가! 그러므로 부디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서 웃는 것을 배워라! 그대들의 마음을 고양시켜라, 그대들 멋지게 춤추는 자들이여, 높게! 더 높게! 그리고 멋지게 웃음 짓는 것도 제발 잊지 말라!”

긍정적 힘에의 의지는 영원회귀의 사유가 본성적으로 꼭 필요하게 된다.

“신은 두 가지만 금지했다.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않는 것. 마음껏 주사위를 던져라. 판돈으로 신은 무엇이든지 줄 준비가 되어 있다. 해라! 해라! 해라!”

‘do! do! do! 올레!’라는 광고의 카피도 아마 니체의 말을 패러디했을 것이다.

신이 금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한 것에 대하여는 충분히 줄 판돈도 마련되어 있다. 인간들은 단지 하지 않을 뿐이다.

 

영원회귀의 사상을 쉽게 설명하는 영화가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2014)다. 외계인 미믹의 피가 흡수되며 빌케이지 소령(톰 크루즈)은 타임루프에 갇힌다. 죽으면 다시 살아나고 죽으면 또 다시 살아나고 끊임없는 반복이 계속된다. 그런 반복되는 전투에서 만난 여전사 리타 브라타스키(에밀리 블런트) 역시 타임루프에 갇혀 죽고 살기를 반복한다.

이 고리를 끊는 것은 외계인의 핵심 정수인 오메가를 파괴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뿐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는 힘 싸움 즉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힘겨루기를 한다. 보다 강한 나, 늘 현재의 나를 극복하는 나, 바로 ‘위버멘쉬’(Übermensch)다.

그러면서 이러한 반복이 영원히 계속되지만 그 반복 속에 나는 조금씩 더 강해진다. 결국 힘에의 의지와 위버멘쉬 그리고 영원회귀를 통하여 오메가를 폭파시키고 전쟁을 마무리한다. 원작자인 사쿠라자카 히로시는 속편을 쓰고 있다고 하는 데 속편은 또다른 영원회귀라고 볼 수도 있다.

 

위버멘쉬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넘치는 생명력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 자기상승을 꾀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필연으로 만들어라. 우연을 필연으로, 필연을 긍정하라고 가르친다. 가치 척도는 자신이다.

삶의 모든 아픔과 실패도 필연성이 표현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모든 것들을 나의 필연으로, 우리의 필연으로, 민족의 필연으로, 인류의 필연으로 긍정할 수 있게 창조의지를 발휘하라고 가르친다.

“그래, 올 테면 와 봐라, 나의 운명이여! 나는 나의 고통과 나의 실패를 사랑하겠다. 거룩하게 긍정하겠다.”

“웃어라, 싱글벙글 웃어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라.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자의 으르렁거림이 아니라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기 때문이다. 사자에게는 힘든 전투가 아이에게는 신나는 놀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낙타와 사자에게는 없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웃음이다. 웃음이 넘치는 사람에게 세상은 신나는 축제의 장이다. 내가 웃으면 세상은 따라 웃는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며 새로운 출발, 높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다.

낙타의 긍정이 그의 삶을 사막으로 만들었다.

위버멘쉬가 됨으로써 가치창조의 주체가 되고 가치척도가 되고 건강한 인간의 모습을 되찾는다. 모든 필연성을 긍정하라. 이 세계를 긍정하라.

강자는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인간이 위버멘쉬로 변하지 않고서는 영원회귀는 최악의 이야기고 저주다.

그러므로 세상과 함께 살면서도 세상의 지배 논리에 따르지 않고,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방법, 세상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고민하고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고민하는 마임축제를 만드는 이들 바로 위버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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