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산별노조 탈퇴해 기업노조 전환할수 있다”…기존 판례보다 허용범위 넓혀

 

[공감신문 김대호 기자] 산업별 노조 산하 지부·지회가 조직형태를 변경해 기업노조로 전환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번 판결은 산별 노조산하 지부·지회가 하부조직일 뿐 독립된 노조가 아니어서 조직 전환 권리가 없다는 기존 노동법 해석과 판례를 뒤집은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산별노조 중심으로 진행된 노동운동에 일대 변화가 예상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19일 "기업노조로 전환한 총회 결의를 무효로 해달라"며 금속노조 발레오만도 지회장과 조합원 등 4명이 발레오전장노조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 정연재(가운데) 발레오만도지회 비대위원과 서쌍용(왼쪽) 금속노조 부위원장이 19일 오후 서울 대법원 법정 밖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에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경북 경주에 있는 자동차 부품업체 발레오전장시스템코리아(옛 발레오만도) 노조는 금속노조 산하에 있다가 2010년 6월 조합원 총회를 열어 독자적인 발레오전장노조로 조직형태를 변경했다. 한마디로 이 조그마한 노조는 독자적으로 임금 및 단체협상을 하기 위해 산별노조를 탈퇴한 것이다.

상급 노조인 금속노조의 강경투쟁 방침에 따라 노사분규가 장기화하고, 직장폐쇄로 이어지자, 이에 신물난 조합원들이 따로 살림을 차리자고 한 것이다. 총회에는 조합원 601명 중 550명이 참석해 97.5%인 536명이 기업노조 전환에 찬성했다.

일종의 노노 갈등이다. 온건파들이 따로 나가 기업노조를 설립했고, 강경파들은 총회에 참석하지 않고 금속노조에 남아있었다. 금속노조 산하 지회장 등은 금속노조 규약상 총회를 통한 집단탈퇴가 금지돼 있고 기존 노동법 해석도 역시 그러하다며 소송을 냈다.

1·2심은 독자적인 규약과 집행기관에 단체교섭·협약체결 능력까지 갖춰야 조직형태 변경을 할 수 있는 노조법상 노동조합이라며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하급심은 발레오만도지회 규칙상 금속노조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할 수 없고 임금교섭이나 단체협약 체결도 금속노조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독립된 노조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에 대법원은 "독자적인 규약과 집행기관을 가지고 독립한 단체로 활동해 근로자단체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경우 조직형태 변경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즉, 사용자와 직접 단체교섭·협약을 맺으며 기업노조 수준의 지위를 갖춰야 한다는 기존 판례보다 조직형태 변경의 범위를 넓힌 것이다.대법원은 "단체교섭·협약을 하지 못하더라도 근로자단체로서 독립적으로 의사를 결정할 능력을 갖췄다면 자주적·민주적 결의를 거쳐 목적이나 조직을 선택하고 변경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이인복·이상훈·김신·김소영·박상옥 대법관은 기존 해석대로 "발레오만도지회는 노동조합의 실질이 있는 단체라고 할 수 없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이날 대법원 판결은 그동안 노동계를 주도해온 금속노조 등 산별노조에 상당한 타격이 될 전망이다.

산별노조는 노조 자주성과 강력한 교섭력 등을 위해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활발히 설립됐다. 민주노총은 전체 조합원 80% 이상이 산별노조 소속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산별노조를 탈퇴해 기업노조로 되돌아가려는 경우가 늘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노조설립과 조직형태 선택의 자유, 근로자의 자주적 의사결정이 산별노조 조직 유지의 필요성 못지않게 중요함을 선언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이어 "산별노조 하부조직이 근로자단체에 준하는 실질을 갖추지 못하고 산별노조 내부조직에 그친다면 조직형태 변경 결의로 산별노조를 이탈할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산별노조 체제가 근간을 이룬 민주노총에 심각한 타격을 미칠 수 있다.

1997년 노조법 개정으로 개별 기업노조의 산별노조 전환이 가능해진 후 민노총은 산별노조 구축에 온 힘을 쏟아왔다. 산업별 노조 체제를 구축하면 사측에 대한 교섭력은 물론 대정부 요구 등에 있어 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1997년 이후 결성된 민노총 산별노조는 금속노조,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 전교조, 보건의료산업노조, 공공운수노조 등 23개에 이른다. 민노총 총 조합원 69만여명의 80%에 달하는 55만여명이 산별노조에 가입했다.

산별노조 체제는 2011년 7월 복수노조가 허용되는 바람에 상당한 도전에 직면했다. 사측은 산별노조의 교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별 조합원들이 민노총 산하 산별노조에서 탈퇴해 새 기업노조에 가입하도록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자동차, 철강, 타이어, 조선 등의 노사갈등이 잇따랐다.

이에 민노총은 산별노조 탈퇴를 쉽지 않게 만든 규약을 근거로 탈퇴를 막았다. 지부·지회는 산별노조의 하부조직일 뿐 독립된 노조가 아니라는 규약 해석으로 기업노조로 전환하기 어려웠다.

산별노조 탈퇴를 원하는 조합원은 개별적으로 탈퇴해야 했다. 이 경우 새 기업노조는 기존 산별노조 지부·지회의 재산을 승계할 수 없다. 기존 지부·지회가 체결한 임금단체협약도 이어받을 수 없어 노조 지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날 대법원은 '어느 정도‘ 독립성이 있다면 스스로 조직형태를 변경해 기업노조로 전환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어느 정도 독립성'이라는 요건만 갖춘다면 총회 의결 등으로 기업노조 전환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민노총의 핵심을 이루는 금속노조, 공무원노조 등에는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자동차부품업체 상신브레이크가 금속노조 탈퇴를 추진해 관련 재판이 진행 중이다. 1, 2심에서는 탈퇴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으나, 이날 대법원 판결로 이마저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 발레오전장, 상신브레이크에 이어 기업노조 전환을 추진하는 지부·지회가 잇따른다면 금속노조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날 민노총은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이 하급심과 다른 판단을 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이 어렵게 성장시켜온 산별노조 운동의 토대를 허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정치적 해석이 아닌 객관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판결로 사법부의 위상을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불만을 터트렸다.

 

이번 판결이 기존의 강경하고 정치색이 짙은 노조 운동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의 특수성에 맞춰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면 기업별 노조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번 판결이 확인시켜주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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