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총동원했지만 텃밭에서 패배…부시 가문의 굴욕

 

[공감신문 김인영 기자] 아버지에 이어 두 아들 모두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던 부시 가문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부시 가문의 세 번째 대통령 주자인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가 20일(미국시간) 가문의 지지기반이던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참패하면서 공화당 대선 경선 레이스를 포기했다. 젭 부시는 경선 문턱을 넘기는커녕 초입에서 주자를 내리는 굴욕을 맛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국 최대정치가문인 부시 가문은 3대를 잇지 못하고 정치적 단절을 겪게 됐다.

부시 가문의 황태자 젭 부시는 경선이 시작되기 앞서 공화당 주류에서 민주당의 대세론으로 부상하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대항마'로 여겨졌다. 젭과 힐러리가 공화당과 민주당 경선에서 최종 승리한다면, 부시 가문과 클린턴 가문은 아버지 부시와 빌 클린턴이 맞붙었던 1992년 속편을 연출하는 드라마가 연출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젭은 그런 흥행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지난 1일 아이오와 첫 코커스에서 2.8%를 얻어 6위로 쳐졌고, 2차 관문인 지난 9일의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는 11.02%의 득표율로 4위에 올라 실낱같은 희망을 살려 놓았다. 이에 부시 가문은 앞서 두 대통령을 만들어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총력전을 펼쳐 판세를 뒤집기에 나섰다.

하지만 젭은 가문의 텃밭에서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공화당 3차 경선이 치러진 사우스캐롤라이나는 형 부시 전 대통령이 2000년 대선 당시 당내 강력한 경쟁상대이던 존 매케인 후보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고, 아버지인 조지 H.W. 부시도 두 번 연속 승리한 가문의 텃밭이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 젭 부시는 8%를 약간 웃도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도널드 트럼프와 테드 크루즈(텍사스) 상원의원,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에 뒤지는 4위에 머물렀다. 그러자 젭 부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대선 레이스에서 중도하차를 선언했다.

▲ 왼쪽부터 조지 H.W. 부시(아버지) 전 대통령, 조지 W.부시(아들) 전 대통령, 젭 부시 /EPA/MATTHEW=연합뉴스
가문 역량 총동원했지만 역효과

이번 선거에 부시 가문은 거의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앞서 뉴햄프셔에서는 어머니 바버라 부시(90) 여사가 노구를 이끌고 직접 선거 현장을 다니며 아들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형과 형수가 나섰다. 1차, 2차 경선에서 탈락 위기에 빠진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형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뉴햄프셔 경선 직후 본격적으로 동생지지 운동에 나섰다. 형 부시는 지난 15일 자신의 옛 표밭이었던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맹비난하며 공화당 대선주자인 동생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를 돕는 첫 지원유세에 나섰다.

형 부시 전대통령은 "미국인들이 (트럼프 후보때문에) 화가 치밀고 당혹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분노와 당혹감을 조장하는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그동안 공화당 예비주자인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시 전 대통령의 그날 발언은 동생에 대한 첫 지원인 동시에 트럼프 후보에 대한 최초의 공개비판인 셈이다.

형은 동생을 위해 광고도 찍었다. 30초짜리 광고에서 부시 전 대통령은 "대통령의 첫 번째 임무는 미국을 보호하는 일"이라며 "나는 젭을 알고, 그의 상냥한 마음을 알고, 그의 강력한 토대를 안다"고 동생을 한껏 칭찬했다. 이 광고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공화당 프라이머리를 겨냥한 것이었다.

젭도 형의 지원에 힘을 얻어 "나는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꺾을 수 있으며,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약속을 지켜낼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시 가문의 지원 유세는 동생에게 득이 되지 않았다. 미국을 두차례나 이라크 전쟁으로 몰아넣은 부자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서는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많았다.

지난 13일 토론회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이 점을 집중 공격했다. 그는 "조지 W 부시(형)가 큰 실수를 했다. 우리는 절대 이라크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가 중동 정세를 헝클어놨다"며 젭 부시를 집중 공격했다.

이에 동생 젭은 "트럼프가 나를 모욕하는 것은 개의치 않지만 내 가족을 끌어들이는 것은 지긋지긋하고 신물이 난다"며 형과 자신 사이의 선을 그으며 반박했다.

▲ 바버라 부시(오른쪽) 여사가 4일(현지시간) 미국 뉴햄프셔 주 데리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아들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의 명치 부근을 팔꿈치로 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연합뉴스
저조한 인기…안이한 자세, 유약함, 아버지와 형의 유산등

부시 가문의 마지막 황태자 젭이 중도하차하게 된 것은 선거 전략이 잘못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첫째, 선거에 임하면서 캠프는 안이한 입장을 보였다. 경선 레이스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공화당 주류에서는 젭을 주목하고 기대했다. 정치 명문가의 후광이 있고, 선거자금이 넉넉히 걷히고 있으며, 조직력이 막강하고, 온건 보수주의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후보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막상 선거전이 시작되지 그의 인기는 거품임이 드러났다. 트럼프가 독설을 퍼붓는데, 얌전하고 공손한 부시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광고비도 많이 썼다. 그의 광고비용은 트럼프나 크루즈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광고비가 지지율로 반영되지 않았다.

둘째, 그는 일찌감치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경쟁자의 집중타를 받았다는 점이다. 트럼프와 크루즈는 젭을 타깃으로 삼아 협공을 가했다.

셋째, 젭이 유권자에게 유약한 것으로 비쳐졌다는 점이다. 그는 토론 때마다 존재감을 입증하지 못한 채 패자 판정을 받았고, 이것이 지지율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의 나약한 이미지는 약점으로 작용했다.

보다 못해 그의 어머니인 바버라 여사가 지난 4일 CBS 방송에 나와 아들의 연약함을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너무 공손해요. 우리가 그렇게 길렀죠. 우리가 아는 다른 대선 주자들처럼 아들은 자랑하려고 하지 않아요. 다만, 아들에게 조언한다면 다른 경쟁 후보들처럼 (상대를) '방해'하는 전략을 펴라고 하고 싶어요."

미국 유권자들은 신사적인 사람보다 강하고 거친 사람을 좋아한다. 형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거친 이미지로 지지를 얻었지만, 동생은 형에 비해 신사적이었다. 그 점이 선거전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넷째, 아버지와 형이 대통령을 하면서 두차례의 이라크 전쟁을 치르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인 것이 세 번째 주자로 나선 젭에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이지만, 자국 국민이 죽어가는 전쟁은 피하고 싶어한다. 아버지와 형이 치른 전쟁이 젭에게는 불리한 유산이 된 것이다.

 

왕조경험 없는 미국 정가에 족벌주의 강화추세

미국은 왕조 경험이 없지만, 정치에서 족벌주의는 오히려 강화되는 추세다. 부시 가문처럼 2대에 걸쳐 대통령을 배출하는 가문 이외에도 의회와 행정부에 부자, 부부, 형제 등 혈연관계의 정치인들이 포진해 있다.

이같은 가문주의 성향은 존 애덤스 2대 대통령(1797∼1801)이 아들 존 퀸시 애덤스(6대 대통령)를 프러시아 대사에 임명한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미국의 정치 상속은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그 속에서 꾸준히 정치가문의 부침이 반복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퇴임한 뒤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상원의원에 당선돼 신흥 정치가문으로 부상한 데서도 드러난다.

이런 현상은 혈연관계에 따른 지명도와 자금력의 조합으로 분석된다. 정치적 성향을 타고난 정치인 자녀들이 정치인이 돼야 한다는 기대 속에 성장하는 것도 한 요인이다.

케네디가문이 대표적이다. 진보 진영의 케네디가는 대통령 1명, 상원의원 3명, 하원의원 4명, 각료 1명을 배출했다. 부시 가문은 대척점인 보수 진영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통령을 지냈고, 2대째 같은 항렬에서 젭 부시는 플로리다 주지사를 역임한데 이어 대통령에 나오려다 좌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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