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깊은 사람은 모든 것 속에서 본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선물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선물은 모든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이끌어내는 마음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러스킨

[공감신문] 강남에서 이태원, 달빛이 차오르는 시간이면 소화도 더 잘되고 혈액순환이 더욱 활발해져서는 부어라 마시다가 어렴풋이 뜬 햇살을 곁 삼아 집에 가는 사람들. 그게 내 지인들이다. 물론 유유상종이란 말 맞다나 나 역시도 그렇고.

“야 제주도 혼자 가면 뭐해?”

그러던 중, 이랬던 친한 남동생 하나가 제주도에 가더니 올라오질 않는 거다. 베스파까지 가지고 가서는 매일 뭘 하는지 부지런히 돌아다니더라.

“누나, 여기 할 거 진짜 많지.”

친한 오빠 역시 제주도에 꽤 오래 머물고 있다. 오빠 제주도 가면 뭐해요? 제주도는 힐링이지. 서울에선 이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부지런히 놀던 이들이, 왜 그리들 심심해 보이는 제주도에 오래 머무는 지 궁금했다. 불과 3주 전에 아빠와 제주에 잠깐 다녀왔지만 큰 매력은 느끼지 못했었다. 머리 복잡할 때, 쉬러 와야겠다,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에 저번 주말, 제주에 볼일이 생겨 혼자 내려 가야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며칠 더 있어보자, 맘먹었다. 일정보다 이틀 더 빠른 제주행 비행기를, 그리고 일정 다음날 바로 올라오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어떻게 되었냐고? 여행 이틀 만에 김포행 비행기를 취소하고 며칠을 더 미루었으며, 그렇게 미루고 미룬 날 밤에 또 비행기를 취소했다가 ‘아 정신 차려야지!’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새벽에 다시 예약하여 서울에 왔다. 그리고 언제 다시 돌아갈까 달력만 들여다보고 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에도 그런 편이긴 하지만, 더욱이 혼자 하는 여행이니 일정 따위 정해두지 않았다. 그냥 그때그때 내 기분에 맞는 걸 하기로 맘먹었다. 그러느라 엄청 바빴다.

‘지금 이 시간에 낮잠을 자고 싶어.’

바쁜 서울에서는 부르고 불러도 오지도 않던 잠이 쿨쿨, 쏟아졌다. 안대도 필요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간단히 저녁을 먹었고, 맛있는 거에 술을 한잔 하고나니 잘 시간이었다. 단지 내 기분에 맞는 걸 하지 못한 건 단 하나, 야식을 시켜먹을 곳이 없더라. 내 숙소는 아빠의 제주 작업실이었는데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 덕분에 참는 법을 배웠고, 내일 아침 일어나면 뭘 먹을지 어렵고도 행복한 고민의 틈에서 잠이 들었다.

혼자 떠난 제주 여행에, 왜들 그리 바쁘냐고 서울 온단 날짜가 지났는데 왜 아직 안 오느냐며들 보챘지만 사실, 그렇다. 내가 게을러서, 서울의 속도가 아닌 내 속도, 내 템포로 움직였기에 하루에 너무 짧아서 그랬다.

내가 머무른 동네는 짧은 거리를 가자고 하면 택시가 잡히질 않는다. 어디 멀리 가자고 하면 아저씨가 10분을 걸려 찾아오신다. 그래서 근처로 어디 움직일 때에(난 운전을 못한다) 버스를 이용했다. 총 5대의 버스가 정거하는데, 그날 내가 가고 싶던 장소는 고속버스만 가는 곳이었다. 버스가 30분 후에 도착한댔다. 열 몇 시간 야식도 참았던 나다.

‘어차피 할 거 없잖아.’

난 정류장에서 느긋하게 30분을 기다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후딱 가더라.

사진작가 아버지를 둔 터라 어린 시절 해외 휴양지는 좀 가본 편이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 내 돈을 쓰며 여행할 때는 방콕, 도쿄, 상해 등 거의 도시 위주로 다녔다. 서울에서보다 더 열심히 부지런히 놀고 돌아다녔다. 그때도 일정을 잡아놓고 가는 건 아니었지만, 해외에 있는 친구들이 ‘너 여기 좋아할걸, 꼭 가봐’하는 곳은 다 가려고 했었으니까.

그런 내가 혼자 부산도 아니고 제주도라니! 숙소에서 슈퍼가 아닌 편의점을 가려면 10분 정도 도보로 걸어야했다. 난 그 길이 좋았다, 아니 그 길을 걷는 시간, 그 시간 안에 속한 모든 것들이 정말 좋았다. 물론 거기에 있는 나도 좋았다. 그 때 혼자 찍어놓은 동영상을 보면 아직도 설렌다. 그 길엔 나 말곤 없었다. 단순한 모양에 천 가지 색을 가진 구름과 햇살이 맞물려 있었다. 

싱그럽고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겨우 빵이랑 우유를 사서 오는 길이 더욱 길어도 괜찮다고 느꼈다. 오면서 동네 지명의 유래도 살폈다. 재미있었다. 겨우 이틀이 지나니 이 길이 더욱 짧게 느껴져 아쉬웠다. 그래서 일부러 자주가려고 조금씩만 샀는데, 나중엔 사고 싶은 것도 없어지더라. 머무르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물티슈나 양말 같은 걸 좀 샀었나.

제주도를 예찬하고자 쓰는 글이 아니다. 혼자만의 여행, 그것도 도시가 아닌 ‘시간’이 있는 곳에 가길 권유하기 위함이다. 자본과 조명이 풍요로운 곳이 아닌, 시간이 풍요로운 곳에 머물러 보시길 바란다. 그런 여행은 일정이 짧으면 느낄 수가 없더라. 그래서 한시 바삐 움직이던 내 지인들이 그토록 오래 머물렀나보다. 그제야 이해가 가더라.

보통 우린 여행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거나 채우려고 한다. 아니다. 이런 여행을 덜어내려 가는 게 맞다. 짧은 여행은 덜어내지 못하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채워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줄 수밖에. 가서 이것도 먹어봐야 되고, 저기도 가봐야 한다고들 하니까.

이번에도 사실 긴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런 말들일랑 싸그리 무시했다. 오늘은 뭐하지? 오늘은 일어나서 이중섭 미술관에 가봐야지. 원래도 즉흥적이지만 더욱 즉흥적으로 굴었다. 남들 하는 여행처럼 채우려고 든 것은 겨우 ‘이중섭의 작품을 눈으로 볼 테야’, 이거 하나다. 내가 할 일을 만들어 놓지 않으니 세상이 알아서 할 일과 먹을 것, 만날 사람들을 채워주더라. 물론 그게 내 초이스보다 훨씬 탁월했고 만족스러웠다.

며칠이 지나, 아니 서울에 왔을 때 느낀 건 제주에 머무르는 며칠 동안 세상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거다. 단순히 여행을 왔었기에 그런 게 아니었다. 혼자만의 여행이니 SNS를 얼마나 많이 봤겠는가? 근데 그저 스칠 뿐, 관심가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그것들은 내가 서울에서 오랫동안 즐기던 것이었는데도!

그제야 보였다. 어느 큰 섬 그것도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 머물고 온 후, 나는 내 삶을 제 3자의 시각으로 뒤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의 비중을 두었었다고 말하진 않겠다. 단지 ‘내가 그것 없이도 살 수 있겠는데?’ ‘그게 없이도 재미가 있는데?’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우린 책, 영화, SNS, 드라마를 보거나 봉사활동을 하며 타인의 삶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곤 한다. 우리는 매순간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고민스럽거나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이 질문에 확답이 들지 않을 때엔 그저 누군가가 맞을 거란 방식으로 우선 해본다. 왜? 그러는 시간에도 삶은 지속되니까. 타인의 삶을 통한 그런 성찰보다 효과적인 것은 바로, 내 삶 자체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SNS에 자신이 올린 그 자체가 자신의 삶인 줄 착각하지만, 그건 타인들에게 ‘보이기 좋은’ 혹은 ‘보여 졌으면’하는 나의 부분이지 ‘나의 삶’은 아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누군가에게 그 상대에 대해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자랑하고 싶은 사람과 그 순간, 하지만 그 얘기를 듣는 모든 이들의 온도가 같지는 않다. 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혼자만의 착각 혹은 의미부여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타인의 연애는 그렇게 잘 보일수가 없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마치 축구 경기를 보며 감독이 된 듯 떠드는 것처럼, 주말에 데이트 약속도 없으면서 다들 연애엔 척척박사다. 열을 내며 이러쿵저러쿵 말하다가는 어느 순간- 힘이 빠져 한마디 하지,

‘어휴, 지금 내가 뭐라는 거야. 술이나 마시자.’

요즘 핫하다는 식당, 파티, 음식, 공연... 나에게 그것들의 무게가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만 안 해 본 것 같아서 소외되거나 지는 기분이었는데, 안 해도 되는 것들이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것. 서울에 와서 제주에 가기 전 나, 그리고 제주에서의 나의 시간들을 돌아본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것들이 이것들이었구나.’

힐링이란 말이 흔하게 쓰여 뭐가 힐링인 지 모르겠는 요즘, 정말 힐링을 한 기분이다. 10월에는 또 예전처럼 바쁜 외국의 도시를 여행했다가 또 제주에 갈 것이다. 꼭 제주가 아니라도 된다. 도시의 바쁜 템포 속에서 멀찌감치 떨어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품을 늘어지게 한 후에 커피를 들이키게 하는 공간이 아니라, 몇 시간이든 낮잠을 잘 수 있는 곳이라면 말이다.

이번 연휴가 길다. 가족과의 시간 대신 여행을 즐기시려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다. 채우려는 여행도 좋지만 한번쯤은 비워내고 돌아보는 여행을 계획해보시는 건 어떨까, 싶다. 비워내면 세상이 알아서 더 좋은 걸로 채워준다. 공허함은 정말 멋지다. 여유 있는 사람만이 공허함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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