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공감신문] 오랜만에 TV를 틀었다. 평소 VOD로 즐겨 보는 프로그램만 골라보곤 했었기에 관심 밖의 채널이나 프로그램을 볼 일이 거의 없는 편이다. 그날은 외출을 하려고 머리를 말리는데 적막함이 싫어 틀게 되었다가 정말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어느 종편 채널의 시사프로그램 어느 앵커의 발언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사안에 대하여 브리핑을 하며 이런 식으로 말했다.

‘원래 예술가들이란 세상을 꼬아보고, 또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인데 거기에 왜 그렇게 진지하게 대응하느냐.’

사실에 입각한 내용을 보도하는 뉴스가 아닌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본인이 믿는 진실 혹은 생각이 들어날 수 있다지만 이건 너무도 편협한 사고방식이 아닌가? 흑백논리가 빼곡하게 들어찬 것 같은 그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나는 한참을 그렇게 오랜만에 틀어놓은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영화 동물농장 스틸 컷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니었을까? 예술 지상주의자의 성향을 가진 나이기에 이 부분에 더욱 감정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나.

과연 누가 너무한 것인지 싶어서 다른 사안에 대한 그의 발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결론은 나보다 그가 너무하다 싶었다. 전국으로 방송되는 채널의 앵커가 저렇게 편협한 이야기를 한다니, 무서웠다.

그 채널은 젊은 층보다 중장년층 시청자가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내가 저 프로그램을 본 건 주말 늦은 오전이었다. 아마 자녀와 함께 거실에서, 또는 식사를 하며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가족 단위 시청자들도 꽤 있지 않았을까. 그저 나처럼 적막한 공기나 덮으려고 무심코 틀어놓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부모님’이신 독자 여러분께선 정말 여기에도 신중을 기하실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아이들은 정말 잘 보고 배우니 그렇다.

예전에도 난 어느 글에서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쓴 바 있었다. 아는 분의 대학 교수님이 당시 해준 이야기라고 했다. 현재까지 내려오는 고전들은 대부분 ‘천재’들에 의하여 집필된 경우가 많다. 우리가 계속 그 천재들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뇌구조를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방의 동물이다. 여자들은 월경하는 친구를 따라 생리 주기도 변화한다. 하물며 우리 몸 전체를 관장하는 수뇌부인 뇌는 어떠하겠는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읽고 느끼느냐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 뇌의 잠재성에 대하여 다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인간의 뇌를 우주에 비유하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사진=영화 해리포터 스틸 컷

TV가 책보다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무심코’라는 데에 있다. 하루 종일 TV를 틀어놓는다고 해서 그 모든 정보가 인상 깊게 여겨지진 않는다. 우리 뇌는 효율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인다. TV는 책보다 정보 수용이 쉽고 편리하다. 그게 문제다. 

글을 읽을 때에 우리는 능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인다. 글을 그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며 읽을 때에 이 내용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와 닿는지 그렇지 않은지, 납득이 가는지 가지 않는지 판단하며 정보를 수용한다. 그래서 독서는 우리의 사고력을 증폭시키는 반면, TV시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앞 부분이 이해가 되질 않으면 눈이 멈춰있는(혹은 읽으나마나 한) 독서완 달리, TV는 계속 흐른다. 눈과 귀에 정보를 꽂아 넣는 격인데 그게 다소 수동적인 정보 수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일수록 고르고 또 골라야 한다. 독서의 경우, 정말 별로인 책이라면 얼마 읽지 못하고 덮어버리게 된다. 물론 꾸역꾸역 마지막까지 읽는 책도 있지만, 독서를 시작하는 순간 사고(思考)가 증폭되기 때문에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다소 수동적이고 편리한 TV시청은 그렇지 않다. 마치 간접적으로 흘러가는 느낌이라 조금 불편해도 그러려니 한다. 그래서 더욱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오랜만에 이렇게 놀라게 한 이 시사 프로그램의 앵커는 다소 공격적인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말도 무진장 빨랐고 목소리도 정말 컸다. 그래서 예술가가 이러니저러니 하는 막말이 튀어나온 거였을까. 그렇게 흥분하니 말야.

그런 악센트와 속도를 구사한다니! 아무래도 시청자들에게 생각할 겨를일랑 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국민들에게 오랜 시간 꾸준히 신임을 받아온 몇 안 되는 시사 교양 프로그램, 그리고 그 프로를 진행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어느 정도의 느긋한 템포를 가진다는 거였다. 

의견을 정리전달할 때엔 빠를 지언 정, 시청자가 판단해야할 순간엔 잠시 사이를 열어두었었다. 마치 자기들이 아는 정보가 99% 확실하더라도 1%의 모호함 때문에 조심하는 신중함을 가졌었다. 그런 프로그램들 덕분에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오히려 다른 의견에 대해서도 이해해볼 만한 여유를 갖게 되기도 했었다.

사진=영화 트루맛쇼

10대의 어떤 아이가 부모님과 함께 저런 편협한 프로그램을 보고 자란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았다.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배운다. 특히 이렇게 현 시국에 일어나는 일들은 부모와 함께 배우는 현장 교육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시사 프로그램의 앵커가 어느 날 한 정치인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데, 과연 앵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비논리적이었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고 듣는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뇌는 죽을 때까지 모방을 거듭한다. 그런 걸 보고 자란 아이는 그렇게 비논리적이며 막무가내에 편협한 사고를 가질 확률이 클 수밖에 없을 거다.

난 예전부터 사람에게 좋은 목소리가 얼마나 대단한 매력인지 줄곧 얘기했었다. 아무리 멋진 남자라도 목소리가 ‘깬’다면 절대 만날 수 없다고. 남성의 중저음 목소리는 남성 호르몬의 상징이며, 실제로 여성들에게 큰 신임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남자 배우들이나 유명 정치인들 중에 데뷔 때와 현재 목소리가 다른 경우가 많다. 그건 훈련의 결과다. 목소리는 훈련이 가능하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좋은 목소리를 평소에 자주 듣는 것. 실제로 좋은 목소리의 부모를 가진 아이들이 괜찮은 목소리를 가질 확률이 높다는 연구도 있다. 이것 역시 모방의 산물이 아닐까? 학습은 모방으로부터 시작하니까. 목소리는 말투와 템포, 높낮이, 음색 모든 걸 포함한다. 아이들에게 굳이 좋지 않은 것을 들려줄 필요가 있을까.

그날 방송을 보며 이전에 알던 지인이 떠올랐다. 나보다 겨우 두세 살 많은 그는, 소문난 고집쟁이였다. 음, 그냥 저 앵커처럼 편협함의 끝이었다. 그와 두 번이상 만나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에게 ‘네 생각은 옳지않아’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들 포기했다. 다만 우리끼리 있을 때 그의 이야기 나오면, ‘아, 말해 뭐해. 정말 귀닫고 사는 사람인데.’라고 한다. 뒷담화아닌 뒷담화가 이어질 수 밖에. 그가 잘못된 판단을 하려 하더라도 이야기해줄 수 없었다. 안타까움에 탄식만 이어질 뿐!

아무도 잔소리나 충고를 해주지 않는 삶이 과연 편한걸까? 난 그가 조금 불쌍하다고 느껴진다. 그의 부모님의 교육관에 대하여 알지도 못할 뿐더러, 감히 자식도 키워보지 않은 입장에서 평가할수도 없다지만 어느 정도 이러한 소통의 방식은 그 집안 분위기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더라. 정말 감히, 그들의 식탁위에 저런 편협한 사고와 제압적인 목소리가 꾸준하진 않았을까. 그가 친구나 동생들을 대하는 방식을 가만 지켜보는 그의 부모님만 보더라도.

어린시절 TV시청이 제한적인 친구집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 친구의 어머님은 본인 판단하시기에 다소 폭력적이라고 판단되는 만화나 선정적인 드라마를 못보게 하셨다. 대신 교육방송이나 시사 프로그램은 꼭 보라며 적극 권유하시더라.

다소 경솔하셨던 거다. 시사 프로그램이야말로 위험하다. 저렇게 편협하고 획일된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우리 사회의 충돌 및 불협화음만 야기시킬 게 뻔하다. 개인적으로도 좋지 못하다. 누가 그와 편하게 대화를 할까? 사랑의 기초는 경청이랬다.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외로운 사람이 될 거다.

홍준표 대표의 대선 후보 시절, 그의 발언들은 매일 온 국민들을 놀라게 했었다. 가끔은 정말 쎄다 못해 ‘막 던진다’싶을 정도였다. 대통령이 못 되면 어디 앞바다에 뛰어들겠다느니, 매순간 긴장하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뭇 후보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도대체 저 이를 누가 지지한담?’

아니었다. 그는 2등이었다. 그의 이런 태도가 오히려 인기의 비결이었을 지도 모른다. 누구는 그걸 사이다같다, 쿨하다, 카리스마 있다고까지 하더라. 트럼프 지지자들 역시 비슷하다고 본다. 저런 시사 프로그램의 앵커가 굳건히 저 자리를 지키는 것 역시, 꾸준히 TV앞에 앉은 시청자 역시 비슷할 거다.

정치 성향을 떠나 우리 아이들에게 굳이 막무가내 비논리를 가르칠 필요가 있을런지 싶다. 그리고 아직도 모방이 가능한 우주같은 당신의 뇌에게도 그러하고! 광활한 우주에 편협한 건 어울리지 않잖아? 정의나 사랑을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되,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 넒고 멀리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보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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