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낙규 축제이야기] “내 안에는 도덕 법칙이 있다”

 

[공감신문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 칸트의 도덕철학에 의하면 모든 인간에게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행위법칙을 적용하는 것이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 학벌, 재산, 지위, 외모와 관계없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동등하게 대하라고 촉구한다. 도덕법칙이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의식하며 살아가라고 한다.

“너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것을 네가 동시에 원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고 명령한다.

칸트는 “세계의 사물들은 그 현존에 있어서 의존적 존재자이므로 목적에 따라 활동하는 어떤 지고한 원인을 필요로 한다면 인간은 창조의 궁극목적이다”라고 했다. 궁극목적이란 자신의 가능조건으로써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목적을 말한다. 동양적인 사고체계로 말하자면 자본자근(自本自根)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축제장에서 속삭이고 있는 두 소녀. /사진=강낙규

반면에 생명을 가진 유기체적 자연존재자들은 합목적적인 존재지만 그 자체로서 궁극목적이 될 수 없는 수단적 목적이다. ‘어떤 무엇을 위해서’라는 한정적인 의미의 목적만을 가짐으로써 다른 어떤 무엇에 대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을 갖지 않은 존재는 단지 수단으로서 상대적인 가치만을 가지며 사물이라고 부른다”고 단정한다.

창조의 최종 목적인 인간은 스스로 목적 개념을 만들고 이성에 의하여 합목적적으로 형성된 사물들의 집합을 목적의 체계로 만들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존재다. 인간의 자유 안에서 유용성을 산출한 결과물이 문화이며 이의 최종 목표는 자연의 상태를 완전하게 벗어나 시민적 정치체제를 달성하는 것이다.

불화로 인하여 공동체적 삶을 갈구하게 되며 결국 문화는 도덕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자연존재자들의 합목적적 활동들은 인간의 문화 창달을 위한 수단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많은 생태주의적 논란을 야기시킨다.

인간 이외에 다른 모든 무기물이나 유기물을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주장은 성경 창세기의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경제개발을 하느님이 인간에 내리신 소명으로 삼고 막무가내로 환경 파괴를 일삼는 자들이 행위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새만금 개발을 비롯하여 4대강 개발 등 엄청난 규모의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들의 철학적 근거로 칸트의 목적론적 인간론과 성경의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의 소명을 들기도 한다.

이에 대해 먼저 환경윤리학자들은 생명을 가진 존재 또는 전체 생태계의 자체적인 고유한 목적과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주체적 지위를 부여하라고 주장한다. 아마 이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천성산 고속철로 관통공사에 대하여 도룡뇽도 지율 스님과 함께 소송 당사자가 되어 생태에 영향을 주는 공사의 중단을 요구했을 것이다.

크리스티아나 호프(Christiana Hoff)는 칸트는 이성을 가진 존재만을 목적 그 자체로서 인정하고, 비이성적 존재자의 도덕적 지위를 부정하며 자기의식을 갖지 못한 동물에 대해서는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폄하했다고 비판한다.

폴 테일러(Paul Taylor)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자는 자체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다른 생명체보다 결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른바 생명공동체의 한 구성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장자(莊子)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다.

칸트의 목적론적 인간론에 대하여 인간 역시 다른 생물에 의존한다는 주장과 함께, 특히 린네(Linne)는 인간도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육식동물을 수렵하고 감소시킴으로써 자연의 산출력과 파괴력 사이에 일정한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 역시 다른 생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지진이나 화산 같은 자연재해에 지배되기 때문에 인간은 최종 목적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외에 칸트의 선험적 이성의 가능성에 대하여 진화론적 인식론자들은 지성 개념도 계통 발생적으로 진화되었다고 비판한다. 자연의 합목적성을 판독하는 반성적 판단력에 대하여 물리적,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물 자체(物自體·Ding an sich)’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세계와 인식주체(인간)의 일치 근거에 대하여 외부환경에 적응하거나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한 순응과 시행착오적 교정의 결과물이라며 칸트를 비판한다.

산업혁명이 막 태동하던 18세기에 살았던 칸트의 입장에서는 200여년이 지난 21세기에 환경생태론자들로부터 “자연은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며 환경과 생태파괴의 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억울할 것이다. 칸트가 살았던 때는 환경이나 생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나 담론이 없었던 시기였기에 칸트는 그런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이성의 진화에 대해서도 칸트는 그문제는 동물학자의 영역이고 자신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다고 비켜나갔다.

 

21세기 생태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하여 이제 칸트를 옹호해보자.

칸트는 미와 숭고의 개념을 통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짐으로써 도덕적 성향을 가지게 되는데, 정당한 이유 없는 살육과 수정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존재자의 파손 행위는 결국에는 인간 자신의 도덕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단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자연존재자들에 대하여 간접적인 방식으로 도덕적 배려의 대상으로 여긴다. 결국 목적론적 자연 이해는 자연의 목적과 인간의 목적이 결합되는 전일적인 목적전체성으로서, 인간중심적 자연 이해는 자연 파괴 등 생태중심주의에 대한 적이 아니라 반려자라는 것이다.

생태학적 위기의 문제는 결국 도덕적인 인간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되며 인간이 자연의 목적을 읽어내어 인간 자신의 목적과 일치시키는 문화행위를 지향할 때 생태주의적 사유를 위한 선험적 지평을 이룰수 있다는 것이다.

▲ 무주 반딧불 축제장 '사랑의 다리'에 설치된 LED가 반딧불을 환상적인 컬러로 형상화하고 있다. /사진=강낙규

이를 위해서는,

첫째 인간의 동물적 야수성을 길들여야 하며(훈육), 둘째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고(문화화), 셋째 시민적 지혜를 가지고(문명화), 끝으로 선(善)만 선택할 도덕적 심성을 갖추어야 한다(도덕화).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법을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이렇게 바꿔 말한다. “너의 행위의 효과가 인간 생명의 미래적인 가능성에 대하여 파괴적이지 않도록 행위하라.”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준칙이 자연존재자들의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행위하라”로 바꾸는 것이 보다 도덕적이지 않을까?

인간이 자연생태계를 개발할 때 자연존재자들 예를 들면 소나무와 참나무, 도룡농과 쉬리, 바위와 자갈, 시냇물과 연못, 수달과 하늘다람쥐, 크낙새와 따오기 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자연도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연 자체를 위한 자연, 더 나아가 인간이 살고 있는 터전으로서의 자연, 인간도 다른 생명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관점의 생태주의적 시각이 요구될 수 있다. 인간중심적 생태주의가 아닌 자연중심적 생태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인간중심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무한한 욕망의 실현이나 소유욕에 기반한 행복론이나 공리주의에 기반한 생산과 소비 시스템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보편적 규범윤리학과 의무의 윤리, 미감적 판단력과 자연미 사상, 목적론적 자연 이해와 인간중심주의는 궁극적으로 생태주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칸트를 기리는 의미에서 반딧불이 탐사 길을 ‘칸트의 길’로 부르면 어떨까?

그리고 칸트가 고뇌하면서 근대철학을 완성한 쾨니히스부르크 시와 무주가 자매결연을 맺어 서로의 도시를 방문하며 반딧불이를 통해 칸트와 생태환경에 대한 철학적 생태학적 담론을 새로이 정립해보는 것은 또 어떨까?

 

칸트의 묘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내 위에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 내 안에는 도덕 법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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