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정씨 “돈보다 사명감이 내 삶의 원동력이죠”

봉사활동은 내 운명
“어머니,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우리 딸이 사다 준 전기밥솥 덕분에 따뜻한 밥 맛있게 먹고 있어. 밥할 때마다 우리 딸이 생각 나. 고마워.”
짧은 대화 속에 따뜻한 정이 가득 담겨 있다. 누가 들으면 전화기 너머로 모녀가 주고받는 대화처럼 들릴 것이다. 그렇지만 정은정 씨는 실제 누구에게나 이처럼 살갑게 대하기 때문에 듣는 이들을 착각하게 한다. 이 할머니는 약간의 뇌경색 장애가 있는 분으로 얼마 전 정은정 씨가 봉사활동 갔을 때 만났다. 그때 가스레인지에 밥을 해 드시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돌아오자마자 자기 돈을 들여 전기밥솥을 사들고 할머니에게 다시 갔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사용법에 익숙하지 않아 몇 번이나 전화를 하셨다. 말로 설명하다 안 되면 직접 달려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맛있게 밥을 지어 드신다고 한다.

정은정씨 주변에는 복지 사각 지대에 있는 노인들이 참으로 많다. 그녀는 그분들을 친부모처럼 모신다. 그런 분들을 돌보는 것이 정은정 씨 생활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정은정 씨가 봉사활동과 인연을 맺은 때는 십여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1월 북한을 탈출하여 그 해 6월 한국에 와서 처음 부천에 터를 잡고 살 때였다. 어느 날 TV에서 장애인 복지 프로그램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부터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한에서 장애인들은 밖에도 나오지 못하고 집안에 숨어 지내다시피 해야 하고, 주변에서 몹시 천대를 받는다. 한국 장애인들이 사는 환경이 북한과는 너무나 달라서 몹시 신기했다. 침대에서 자는 모습도 그랬고, 여러 가지 장애인 보조 기구나 먹는 음식도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북한에 있을 때는 부모가 죽어 고아가 된 아이들 세 명을 데려다 키우기도 했다. 아마 그때부터 정은정 씨는 복지 쪽에서 일하도록 운명 지워졌는지도 모른다.

재가복지센타 설립하다
부천에서 조그만 휴대폰 부품 조립 회사에 다닐 때 친구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에게도 뭔가 자신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도 장애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부천에 있는 장애인 복지 시설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 이런 과정에서 그녀의 뜻이 굳어졌다. 이 무렵 먼저 한국에 나와 있던 여동생은 장신대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동생과 이렇게 약속을 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너는 목회를 하고, 나는 복지활동을 하며 북한 사람을 돕자.”

동생은 현재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2004년에 남편과 결혼한 정씨는 본격적으로 사회복지를 공부하기로 했다. 2006년 뜻을 같이 하는 남편과 함께 장안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사회복지사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때였으니 대단히 앞선 생각이었다. 낮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밤에는 복지 시설에서 일했다. 등록금을 벌어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주독야경 해야 했다. 처음에는 문화도 많이 달라서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하고 겁을 먹었다. 교수님이 과제를 내주면 제출 날짜를 어길까 보아 그날부터 바로 과제에 매달렸다. 열심히 공부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 했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하나하나 알아 가는 것이 재미도 있었다. 남편도 함께 공부하다 보니 서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첫 학기부터 좋은 성적을 받아서 장학금도 탔다. 이때부터 공부에도 자신감을 얻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다. 처음에 그녀는 장애인 복지 시설에서 일했다. 그녀는 일하면서도 봉사활동을 계속했다. 한 번은 북한 출신 할머니에게 봉사하러 간 적이 있는데, 생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북한 말투를 쓰면, 먼저 조선족이냐고 묻고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할머니는 그런 대우 받는 것이 싫었다. 심리적으로 부담을 느끼다 보니 병원에 가는 일조차 꺼려지고 자연히 사람들과의 교류도 멀어졌다. 정은정씨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도 다니고, 심부름도 해드렸다. 말이 잘 통하는 그녀를 만나자 할머니는 참으로 행복해 하셨다.

그런 할머니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그녀는 본격적으로 노인들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봉사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앞으로 노인 인구가 급증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는 노인들도 더욱 늘어날 것이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노인들이 정부 지원을 받으며 좀 더 체계적인 지원을 받도록 하는 일이 시급했다.

정은정 씨는 보증금 천만 원짜리 사무실을 얻어 금년 5월에 재가복지센터를 설립했다. 남편은 계속 장애인 복지 시설에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기로 했다. 설립 허가를 받기 위한 행정절차도 그녀 혼자 다 처리했다. 지금은 함께 일하는 요양보호사 급여를 감당할 정도로 수입이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 사무실 임대료까지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라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에서 좋은 조건으로 자금 지원을 해주면 큰 힘이 되겠다는 바람도 있다.

 

삶을 견디는 원동력
이토록 힘든 일을 굳이 왜 시작했을까. 돈만 생각한다면 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굳이 자기 돈 들여서 직원 월급 주고, 어려운 노인들 돕는 일을 할 이유가 없다. 장애인 복지시설에 취업하면 최소 한 달에 250만원은 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정은정 씨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녀가 받은 은혜를 되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삶을 견디는 원동력이다.

암담했던 북한에서의 생활, 탈북하면서 겪은 수많은 난관들을 생각하면 이런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중국을 거쳐 베트남으로 갈 때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졌다. 일행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앞으로만 나아갔다. 절벽 위로 겨우 기어올라 왔을 때 이미 일행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두려움 속에서 앞으로 내달렸다. 갈래 길이 나왔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릴 형편이었다. 신이 도움이었는지 그녀가 선택한 길 앞에 그들이 가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다시 캄보디아로 가는 동안 강을 건너고 밀림 속을 헤쳐 나갔다. 발톱이 다 빠졌다. 지금 생각해도 처절한 상황이었다. 지금의 어려움은 그때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 매일 매일 감사하지 않은 날이 없다.

한국에 들어와 살면서 그녀는 피곤한 적은 있어도 힘들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도 딱 한 번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남편이 자영업을 하겠다며 7천만 원을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했을 때였다. 모아놓은 돈과 대출까지 받아서 마련한 돈을 고스란히 날렸다. 남편이 체결한 계약서로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제기할 수 없었다.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노래처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초심을 잃지 말자
그녀는 작은 키에 몸도 호리호리하다. 얼굴도 작고 매우 여리게 보인다. 중국 국경을 넘을 때부터 탈북하는 내내 잘 걷지 못하는 어머니를 업고 걸었다. 어디서 그런 강인한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다. 누가 여자를 약하다고 말했던가. 그녀의 삶을 본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주변에서는 그녀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녀는 남들과 똑같이 일하고도 다음날 생생하게 다시 일한다. 정은정 씨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를 ‘정신력’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하나원을 나와 한 달 만에 운전면허증을 따고 자격증을 10개나 딸 수 있었던 것도 정신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탈북민이 한국에 정착할 때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돈을 먼저 본다. 대부분 돈을 좇다가 나중에 크게 후회한다. 처음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5~10년 후가 달라진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인드를 갖느냐이다.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돈만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은 장애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그들과 진심어린 교감을 나누거나 친밀감을 형성하지 못한다. 정은정씨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더욱 확고하게 다짐하곤 했다.

자기 적성을 고려해서 무엇이든 먼저 배워야 한다. 정은정 씨의 권고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사람이 세 명이나 되고, 지금도 몇 명이 공부하고 있다. 후배 가운데 한 명은 처음에 청소 일을 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청소 일을 한다. 자기처럼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라고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뒤늦게 시도해 보지만 몇 번이나 포기하고 말았다.

그녀의 사무실 벽에는 ‘초심(初心)’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북한을 탈출하겠다고 결심한 뒤부터 한국에 와서 봉사와 사회복지의 길로 들어서기까지 자신의 뜻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무실을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초심’이란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긴다. 한국에 정착한 지 13년이 지났다. 이제는 완전히 적응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때로는 자만심이 들 때도 있었고, 여러 가지 유혹에 시달린 때도 있었다. 더욱이 지금은 사업 초기 단계라 매우 어렵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에 올 때의 초심을 잃지 말자는 것, 다른 하나는 소명에 따라 다른 일에 한 눈 팔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행복하게 한다. “피곤한 적은 있어도 힘든 적은 없었다.”라는 말은 언제나 그녀를 움직이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