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몹시 섹시하거나, 만족하거나, 혹은 일하거나.

프랑스 종교개혁가 장 칼뱅 (1509-1564)

[공감신문] 원래 추석연휴, 설연휴 때는 더욱 볼게 없다. 개봉 때 놓친 영화를 틀어 주지 않는 한 TV를 볼 이유가 전무하다. 여기에 방송사 파업까지 보태어 졌으니 이중 콤보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채널이 많다지만 이 길고 긴 연휴를 다 감당해낼 순 없는 노릇일 테니까.

요즘은 거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즐겨보는데, 이번 추석에 우연히 <극한 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을 정주행 아닌 정주행하게 되었다. 집중해서 본 건 아니고, 휴대폰 게임을 하거나 밥을 먹으며 그냥 틀어놓았다. 수십 개의 에피소드를 스트리밍 해놓으며 종종 낯선 작업장 풍경에 시선이 꽂히곤 했다. 많이들 알고 있는 민어나 참치 같은 생선 잡이, 보양식을 만드는 사람들, 가죽 공장, 멕시코 알로에 농장, 필리핀 코코넛 수확 현장 등 이 세상엔 무수히 많은 극한 직업들과 거기 종사한 사람들이 있었다.

ebs<극한직업> ‘인도네시아 유황광산’ 편 방송 캡처

우리가 먹는 통조림이나 가공식품은 그저 공장을 통해 기계적으로 생산되는지 알았는데 그 와중에도 사람 손을 거치는 과정이 꽤 많은 것이 놀라웠다. 특히나 생선이나 육류 중에서는 어떤 부분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악취를 풍기게 하는 경우가 있어서 꽤나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제품의 품질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는 것.

그 날 친구와 집에서 할랄 푸드를 시켜먹었다. 갖가지 채소와 고기, 치즈 등이 한데 어우러진 무슬림식 음식으로 간편하고 맛이 좋아 즐겨먹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양고기 플래터를 골랐다. 예전에는 국내에서 양고기 먹는 사람이 흔치 않아 조금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경우도 많았는데, 요즘은 오리고기나 연어만큼 흔해지다보니 어디에서 먹든 거의 깔끔한 편이다.

예전에는 비빔밥이나 피자, 타코 등 여러 가지 재료가 한데 어우러진 음식을 먹으면 그냥 당연한 거 같았는데, 저 프로그램을 보고난 후 뭔지 모를 숭고함으로 음식을 바라보게 되더라. 최소 8가지 이상의 재료가 들어있는 이 음식이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 내 앞으로 왔는지,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이태원 외국인들에게도 푸짐한 양이라는 플래터를 전부 먹어 치울 수 있었다.(...)

멕시코 알로에 농장에 출근한 인부는 40대 후반이었다. 그는 거의 4시 반에 일어나 이 농장으로 나왔다. 제작진이 그에게 물었다. 왜 이 시간에 나오느냐고. 그에게 이런 생활이 굳어지고 익숙해져서 처음보단 힘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분명 녹록지 않은 작업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럴 거다. 그는 한마디로 대답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다.”

ebs<극한직업> '멕시코 알로에 수확'편 방송 캡처

사실 내가 <극한직업>을 보려 했던 이유는 다른 직업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안일하고 게으른 나 스스로를 채찍질 하고 싶어서였다. 그들의 땀을 통하여 나를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난 절대 ‘극한 직업’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극한 직업’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히 고된 작업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직업적 의미에 대한 문제다.

내가 알고 있는 최대의 극한 직업은 아마 ‘아이돌’인 것 같다. 1년 내내 다이어트에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을 감당해낸다. 저 프로그램에 나온 이들처럼 그나마 일정 시간을 두고 일하는 것도 아니다. 성공을 하면 끝내주게 멋진 것들을 누릴 수 있지만, 어느 최소한의 보상을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경쟁 구도는 무수히 많은 정신적 피로감을 줄 게 뻔하다. 그렇지만 이 프로그램을 본 후 나는 여기에 ‘극한직업’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예정이다. 운동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들은 그 직업들을 자기가 원해서 선택한 경우가 많다. 자아실현을 위하여 아이돌이, 또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새벽녘에 어선에 오르고 공장에 출근하는 이들이 과연 ‘자아실현’을 위하여 그 직업을 가졌을까? 아니다. 부양의 의무 때문이다.

청년 실업은 만성적인 사회 문제가 되어버렸다. 단순히 한국 사회에서 국한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청년들에게 일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말한다. 청년 실업은 개뿔, 요즘 애들은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맞는 말이다. 사실 저런 ‘극한 직업’과 같은 작업 현장은 찾아보면 무수히 많다. 

그러나 청년들은 그 직업을 택할 필요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고 물어왔다. 너는 집이 가난하니 일찍이 기술을 배워야한다고 들어온 세대가 아니다. 네 오빠가 대학에 가야되니 너는 학업을 포기하고 오빠가 집안의 기둥이 되는데 살림을 보태어야 한다고 들어온 세대가 아니란 말이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직업은 ‘자아실현’이다. 우리에게 그 누구도 ‘부양’에 대하여 강조한 적이 없었다. 이전에 어른들은 부양의 의무가 당연한 것이기에 궂은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아실현? 그건 어느 특정 소수에게나 ‘들릴 만한 단어’였다. 공부를 엄청 잘하거나 좋은 집에서 태어나야, 아니 그 좋은 집에서도 가업을 물려받기를 거부할 수 있어야 가능했다.

'직업 소명설’을 주장했던 프랑스 신학자 장 칼뱅. 시대마다 직업의 의미는 변화해왔다./ 사진=지식백과

요즘 청년들은 자신이 그리는 청사진에 맞는 직업을 가지길 원한다. 혹 그것에서 많이 벗어나면 차라리 무직을 택한다. 청년들은 결혼을 미룬다. 결혼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후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결혼 후에 육아는 더욱 그러하다. 임신을 ‘계획’한다. 신혼부부들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갖추었을 때 아이를 가지고자 한다. 즉, 부양보다 자아실현이 먼저라는 이야기다. 자아실현에 가치를 많이 두어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비혼 세대도 꽤 많다. 그러니 이들이 돈을 벌 이유는, 아니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할 이유가 별로 없지 않은가.

이전에 어른들은 임신을 계획하지 않았다. 생기면, 낳았다. 그 뿐인가? 이전에 여자들은 결혼을 ‘해야만’했다. 사회적 입지가 비교적 작았던 여성들은 교육 수준도 현저히 떨어졌었다. 그녀들은 제 몸을 자기 스스로 부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집을 가서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남편은 이러한 부인과 아이를 부양할 ‘책임’을 가졌었다. 그 일이 싫든 좋든 해야만 했던 것이다. 내가 <극한 직업>에서 보아온 사람들처럼. 그들의 자아실현이란 자녀의 자아실현을 도우는 것이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청년들은 즐기는 직업을 갖고자 한다. 운 좋게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그게 마냥 쉬울 순 없다. 현대사회는 무한의 경쟁구도를 가지며 너무도 빠르게 시스템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겁이 난다. 하고 싶은 일도 그렇게 어려울 텐데,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라고? 그래, 오히려 그런 일들은 경쟁하지 않아도 될 지도 모른다. 근데 그런 일을 내가 왜 해야 하지? 그렇게 살고 싶을까? 그렇지 않아서 차라리 무직을 선택한다.

귀농하는 청년들도 늘고 있다. 도시에서의 경쟁에 지쳐 축 늘어진 어깨를 해서 오는 게 아니다. 파릇파릇하고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오는 경우도 꽤나 많다. 자기 삶에 청사진을 그려놓은 것이다. 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을 거듭한 결과다. 불행 중 다행인건지, 이 차가운 사회는 우리에게 넌 앞으로 어떻게 뭐해먹고 살 거냐고 거듭 고민하게 만들지 않았나. 심지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도, 앞으로 몇 년 후에 어떻게 살지, 노후에는 뭘 해야할 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당신의 삶의 모습이 독자적으로 그저 순탄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또는 작은 것에 행복해하는 환경이 불편하지 않다면 당신은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된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적이라는 스트레스, 암, 비만을 유발시키는 하기 싫은 일과 만나기 싫은 사람들을 굳이 견뎌야 할 이유, 즉 부양해야할 자식이 없다면 그래도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운 좋게도 당신의 부모님이 그들의 노후에 대한 계획이 있고 그러한 당신을 이해해 준다면 더욱이.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부양의 의무 때문에 하게 된 저 극한의 일들이, 그러니까 어촌에 살아서 타게 된 어선이, 농장 근처에 살아서 따게 된 알로에가, 엄청난 성취감을 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의 삶은 무척이나 건강해보였다. 그건 단순히 가족을 부양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아마 그렇게 열심히 키운 자녀가 엇나간다면 그의 모든 삶이 무너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간다. 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산성을 인정받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성에게 듣는 ‘섹시하다’라는 말이 최고의 찬사로 들리는 것처럼! 그건 ‘생산적’으로 보인다는 아주 근본적인 얘기니까. 당신이 더럽게 섹시해서 이런 말을 매일 듣지 않는 이상,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직업을 가져보지 않는다면 끝내 모를 기쁨일 테지.

이 좁은 지구에서 나는 쓰임받길 원한다. 이 좁은 지구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서 쓰이길 원한다. 이 좁은 지구에서 난 내가 원하는 곳에서 잠을 자고, 숨을 쉬고, 사랑하길 원한다.

누군가에게는 특권이었던 자아실현이 우리에겐 ‘과제’가 되어버린 현재, 당신은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 삶인가? 혹은 한번 즈음 경험해보아도 나쁘지 않을 생산성이 충만한 삶인가? 아마 그 후엔 그것이 과제가 아닌 감사함의 충만함으로 다가올 지도. 이 좁은 지구에 당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사람들이 무수히도 많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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