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남자는 역시 핑크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역설적이었다. ‘핑크’는 당연히 여자들의 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다들 여기엔 강조하는 말투를 쓴다. ‘남자는 역시 파랑이지!’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자라왔기에. 

어린 시절 나는 핑크색을 좋아했었다. 핑크색을 띄는 물건은 모두 가지고 싶었다. 마치 만화영화 속 공주가 된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즐겨보던 <웨딩 피치>의 핑크색 머릿결 역시 탐이 났었다. 그래, 핑크는 역시 여자 색이지. 그러다가 꽤 오래전 어느 영화에서 핑크색 디올 셔츠를 입은 주드로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랫동안 그 컬러의 농도와 셔츠의 질감, 그 안의 주드로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그렇구나, 남자는... 핑크구나...?

영화 <나를 책임져, 알피> 중에서

핑크색은 가히 섹슈얼한 느낌을 연상시킨다. 남녀불문하고 핑크색의 ‘그 무엇’은 농염하진 않다만 한번쯤 손대어보고 싶은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핫핑크 같은 짙은 핑크가 아닌 이상,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핑크는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느낌을 준다. 굉장히 매력적이다. 

이렇듯 남녀를 불문하고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데, 우린 언제부터 핑크를 ‘여자 색’으로 분류하게 된 걸까? 본능적으로 그렇게 분류된 게 아닐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아마도 컬러TV와 인쇄술의 발달이, ‘핑크’가 여자 색이라는 이미지로 구축되는 데에 큰 공을 들이진 않았을까? 적어도 예닐곱 살의 난, 핑크색 물건이면 그것이 어떠한 형태든 다 가지고 싶어 했었으니까. 그런 나 같은 아이들이 어디 한 둘이었겠는가. 장난감 회사가 딸 가진 부모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우리에게 핑크가 여자 색으로 굳어진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역사를 거슬러, 많이도 거스를 것 없이 조금만, 그러니까 세계 2차 대전 직후로 넘어가면 그 배경을 알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 때, 여성들은 주로 어떤 색의 옷을 입었을까? 보통 검정과 파랑색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은 모든 삶의 형태를 위협하려 들었을 것이다. 세탁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도 않았을 텐데 자주 빨아야 되는 밝은 컬러의 옷보다는 짙은 색이 실용적이었을 것이다. 그 뿐인가? 아마도 핑크색을 보면 빨강색이 떠올랐을 지도 모르지. 아마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피’를 연상시키는 그 무엇이라도 보면 미쳐버렸을 것만 같다.

Women's Canteen at Phoenix Works Bradford, 플로라 라이언 作

1939년 발발한 이 세계 대전은 1945년에 끝이 난다. 한반도를 식민지화했던 일본도 이 전쟁에서 패망했었다. 전승국인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장군은, 1944년에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1953년에는 미국의 제 34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전승국 영부인은 과연 남편만큼이나 과감했다! 영부인 마이미 아이젠하워(Mamie Eisenhower)는 남편의 취임식 때 굉장히 인상적인 핑크 드레스를 입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에도 그녀는 수많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핑크를 입었으며, 많은 보도 자료들은 그녀의 수식어에 ‘핑크(pink)’를 넣었다. 어릴 때부터 ‘여자는 핑크색을 입어야해’라고 듣고 자랐기에 핑크를 입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그저 핑크색을 유달리 좋아했던 거다. 그래서 생애 가장 기뻤을 순간 중에 하나인 남편의 취임식에도 저 색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미국 여성들 역시 핑크색을 선호하게 된다. 수많은 영화나 매체를 통해 더욱 그러한 색으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알던 핑크색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다들 ‘컬러 테라피’에 한번쯤 들어보셨을 만큼, 색이 주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다. 전후의 침체된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어주는 데에 핑크색 역시 한 몫 했을 거다. 침울한 감정은 벗어던지고 발랄해져도 될 것 같잖아? 여물지 않은 핑크의 유쾌함이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마이미 아이젠하워

미국의 정치인이자 전 영부인인 힐러리 클린턴 역시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주 핑크색을 입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마이미와 달리 그녀는 ‘정치인’이다. 정치는 이미지다. 힐러리 클린턴은 조금 강한 ‘핫’핑크를 주로 입었는데 이것은 역동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 유권자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효과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주드로는 다르게 핑크를 썼다.

‘여자 색’이라고 굳혀진 이 색을 무지 잘 소화하며, 여성들에게 마치 ‘난 널 이해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남성적이고 선굵은 마초 이미지만이 섹시한 줄 알았던 이들을 크게 한방 먹인 거다. 메트로 섹슈얼(metro sexual) 열풍을 몰고 오며 그 셔츠 밑의 연분홍의 무언가를 떠올리게 까지 만드는 대단한 전략(?)이었다! 아마도 전략이 맞을 거다. 왜? 그는 그 영화에서 ‘색’외의 질감도 중요시 했으니까. 그러니 굳이 디올(Dior)을 택한 거라구!

옷차림은 사회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정체성(identity)이다. 우린 옷차림으로 상대방의 상황과 개성을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내가 작가가 되었을 때, 아니 조금 더 본격적으로 작가 일을 하게 되자 우리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작가답게 입어라.’

나는 과연 고민했다. 평소의 내 SNS를 보시는 독자 분들은 알겠지만 난 과감하다면 과감한 분위기에, 정장 차림보다는 편안하고 활동성 있는 옷들을 즐겨 입는다. 출퇴근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봤을 때 내가 ‘작가’스러워야 하는 게 맞는 지 생각해보았다. 흔히 떠올리는(나 역시 작가가 되기 전에 생각했던) 채도가 낮은 체크무늬 셔츠와 쥐색 가디건, 면바지, 질끈 묶은 생머리에 뿔테 안경... 뭐 이런 거? 맙소사, 내가 지금 떠오르는 건 ‘작가’라기 보다 홍상수 감독 영화의 여자 주연들인걸.

옷차림에 대한 나의 고민은 얼마 가지 않았다. 작가들 무리에서 난 눈에 띄는 편이었다. 그래, 내 옷차림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무슨 글을 쓰는 지 궁금해 했다. 아마 호기심을 확인하는 데에서 끝났더라면 당신은 이 글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그들의 호기심 밑에 숨어있던 의심을 깨고는 어느 정도 나의 글을 좋아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내가 하의에 레깅스만 입고 출판사에 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게 작가님다워요.’

내 옷차림과 내 글은 다행히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난 작가가 맞고,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 그런데 여기엔 조금의 디테일이 더 있다. 난 옳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내 이야기에 신빙성을 주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런 맘이 없지는 않은데, 그것보다 더 큰 마음이 있다.
난 믿고 싶은- 혹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내 이야기에 공감과 호감을 얻고 싶다. 난 훌륭한 사람보다는 더불어 함께 살고 싶어지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한다.

과감한 의상? 나는 창피하지 않다. 매주 나의 상처와 경험들과 실수들까지 드러내어 글을 쓰는데 더 이상 무엇이 창피하겠는가? 오, 나야말로 핑크를 더욱 입어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여물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완성인 나에게 ‘완벽’이나 ‘훌륭함’보단, 그저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친구라는 인상을 가지시길 바란다. 

사실 내가 SNS에 술을 마시는 사진을 자주 올리는 데에도 약간의 이런 이유가 있다. 누군가는 안 좋게 볼 수 있겠지만, ‘작가 지해수’가 아닌 ‘인간 지해수’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치를 떨어뜨리는 게 내가 더 행복하기 때문에. 그럼 여러분은 내가 가끔 ‘열 번에 한번’ 잘 쓴 글로 행하는 위로에, 날 더욱 사랑스럽고 기특하게 생각할 거 아냐!

나는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라서 사랑스럽게 보이고자 이러한 정체성을 내비치려는 것일 수 있다. 꾸며내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강조하고 싶을 뿐. 정치인, 연예인, 예술가, 인플루언서(influencer)들에게만 이러한 이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핑크색이 이런 상징이 될지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당신 역시 누군가에게 어떠한 정체성으로 비춰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당신의 삶 전반부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삶의 전반부는 당신의 내면과 매일매일 교통할 것이다.

금방 날씨가 쌀쌀해졌다. 거리마다 쇼윈도에 걸린 예쁜 코트와 질 좋은 니트들은 어서 그 속으로 파고들라고 하는 것만 같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길 원하는가? 당신만이 알고 있는, 누군가 돌보아주었으면 하는 그 내면의 모습이, 여러 색을 가진 오묘한 그 눈동자에서 반짝반짝 발현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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