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중세는 과연 신들의 시대였다. 모든 것이 신 중심이었던 당시, 인간의 의식이 담긴 모든 행위는 그 곳으로 향해야했다. 그 중 가장 으뜸인 것은 당연히 예술이었다. 어느 시대이든지 중심이 있는 곳에 돈이 모인다. 

중세시대엔 당연히 신을 섬기는 교회가 그러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당시 모든 예술적 판단의 기준이었다. 따뜻하고 숭고한 느낌의 중세 시대 교회 미술은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거기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물론 교회가 세운 기준일 것. 그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못생긴 아기 얼굴’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못생긴 아기 예수 얼굴’이다!

이탈리아 화가 두치오의 <성모와 아기예수>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을 구하러 온 아기 천사 예수가 이런 모습이었던가? 물론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수많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예수가 잘생긴 백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많다. 그가 태어난 예루살렘의 사람들만 보아도 그렇지 않나. 하지만 이 그림들은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그림들을 살펴보자.

조토 디 본도네 <성모와 아기예수>

조토 디 본도네는 중세는 물론 르네상스 시기에도 활동한 화가이지만, 이 그림은 중세풍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어떻게 예수를 섬기면서 미화는 못할 지언정, 저렇게 못생기게 그릴 수가 있단 말인가! 탈모는 물론이거니와 생경함이랄까 그런것도 없이, 인생의 쓴맛도 좀 아는 중년 아저씨같은 표정이라니!

중세를 지나 이후 인간이 중심이 된다는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를 맞이한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아는 사랑스러운 아기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아기들이 다 어여쁜건 아니다. 나도 어릴적에 너무 못생겨서 사람들이 절대 딸일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윽! 그래도 아기들은 모두 사랑스럽다는 공통점이 있다. 르네상스 이후 미술 속 아기들은 이제 좀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자코포 다 폰토르모, 성모와 아기 예수 및 어린 세례 요한

중세와 르네상스, 변한 건 단지 미술 속 아기들의 모습 뿐이 아니다.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나름 ‘파격’적인 변화를 맞이하자 당연히 예술은 물론 사회 전반부에 변혁이 일어났다. 더 이상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교회가 되진 않았다. 스스로도 아름다움이 대해 다앙한 견해로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해도 그 시대마다 높게 평가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시대들부터 살펴보자. 1940년대는 과연 핀업걸이 대세였다. 1939년 발발한 세계 2차 대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참전한 용사들은 말 그대로 피튀기는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싸워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들끓는 청춘들. 위안이 되어준 건 친절하고도 유혹적인, 생각이 많지 않고 백치미가 넘쳐보이는 여성들의 사진이었다. 그걸 벽에 꽂아두면 그나마 위안이 됐었으리라. 물론 그녀들은 군복과는 상이한 색의 옷을 입어 상황의 심각성을 거부하는 발칙함마저 꽤했다.

당시 최고 여배우, 베티 그레이블
베티 그레이블

전후인 50년대에는 다양한 매력의 여배우들의 스크린을 수놓는다. 사람들은 그녀들의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뿐만 아니라 영롱한 눈빛도 읽어낼 여유가 생겼다. 오드리 햅번 같은 전설적인 여배우는 물론이거니와, 우아함의 상징인 그레이스 켈리 역시 이때 활동했으며, 뿐만 아니라 섹시함의 심볼인 마릴린 먼로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을 만큼 다양한 매력을 인정했다.

80년대는 과연 슈퍼모델들의 전성시대였는데, 탄력진 피부에 굴곡진 몸매, 찰랑이는 머릿결, 딱 보아도 건강해보이고 키큰 여자들이 인기였다. 하지만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90년대엔 또 다른 스타일의 모델들이 인기를 누린다. 케이트 모스처럼 삐쩍 마르고 어딘가 아파보이는 모델들이 대세를 이루게 된것이다! 하얀 건치를 드러낸 웃음을 짓기는커녕 퇴폐미를 퍽퍽 풍겨내는 모델들이 전세계 패션 화보를 수놓았다. 이때부터 우리는 마른 모델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선 발이 작은 사람이 미인이었다. 거기엔 역사적인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그 영향이 지금도 없잖아 남아있다. 얇은 허리에 창백한 피부, 거기에 큰 눈에 작은 발이 미인의 상징이었고 요즘 중국 드라마를 보아도 그런 미인들이 주연을 꿰차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선? 단연코 날씬해야 한다. 아니 어찌보면 통상적으로 ‘말랐다’는 기준에 가까워야 날씬하다고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여성들은 그런 몸이 될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다. 외국 사람들은 한국 여자들이 이미 날씬한데 왜 그렇게 다이어트에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밤에 치맥은 왜 찾냐며, 하하...

하지만 한국도 변화하고 있다. 최근 머슬마니아를 비롯 수 많은 피트니스 대회들이 유행이다. 피트니스 선수나 연예인 뿐만 아니라 이젠 일반인들도 근육질 몸매를 가지는 시대다. 더 이상 마르기만 한 몸매에 열광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선 종아리 근육이 있는 다리의 여성을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다만 외국에선 다르다. 그걸 섹시하다고 여긴다. 우리도 점점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전에 헐리웃 스타들의 투머치한 힙을 보며 거부감이 좀 들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낯설지 않다.

이렇듯 미의 기준이 너무도 빠르게 바뀌는 건 통신의 영향이 없지 않다. 다시 위로 거슬러 쭉- 올라가 중세로 가보자. 르네상스 이후 미술에서 왜 아기 예수는 사랑스러워 졌는가? 그건 빠른 예술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들 역시 경제적으로 부흥했기 때문이었다! 이젠 교회 뿐만 아니아 일반 가정에서도 원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초상화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사실적으로, 혹은 고객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살짝 더 미화해서 그려낸 것일지도.

그럼 중세엔 왜 사실적이 아니었냐고? 거기엔 사실 교회의 의도가 있었다. 우린 예수가 사람의 몸을 빌려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났다고 알고 있다. 교회에선 말하고 싶었던 거다. 예수님도 아기 때에는 무지 평범한 모습이었다고. 처음부터 구원자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이것을 ‘호문쿨루스’(Homunculus)라고 한다. 연금술에 관련된 것으로 종종 알려진 단어이긴 한데, 사실 라틴어로 작은 인간이란 뜻이다. 중세 교회 미술 속 못생긴 아기 예수 얼굴엔, 이런 깊은 뜻이 숨어있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올때엔 그 속도가 정말 느렸다. 당시엔 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지구 반대편에서 열리는 패션쇼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원하는 미인상은 물론이거니와 성형 트렌드 역시 바뀐다. 우리 역시 호문쿨루스 같다. 성형이라는 연금술로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려는 작은 인간들 같다. 난 성형을 지지하지도 그렇다고 지지하지 않지도 않는다. 컴플렉스가 있다면 하는 것에 대해선 찬성한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변하는 미의 기준에 마구 연금술을 쏟아내는 건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가치는 무얼까? 그건 바로 젊음이다. 성숙미를 추구하던 시대에도 어느 정도껏 젊은 모습을 선호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젊음을 유지시키다보면 언젠가 나랑 비슷한 기준일 때도 오지 않겠어? 시대을 잘못 타고난 사람이란 없는 거다. 너무도 빨리 변하니까 언젠가 내 얼굴, 당신 얼굴의 시대도 올 거란 얘기다! 그러니 젊음을 지속시켜야 한다.

남들이 말하는 가치 기준에 휘둘리지 마시길. 그건 엄청난 스트레스와 자존감 하락을 유발할거고 당신의 노화를 촉진시킬 게 분명하다. 가치의 속변은 자본주의 사회에 어쩔 수 없는 특징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럴 때일수록 불변의 가치를 추구하시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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