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명언이 있지, 음미하지 않은 인생은 매우 달콤하고 환상적이게 보이지만 이미 음미한 인생은 재미가 없다는 거야.”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 중에서)
 

[공감신문] 자타공인 나는 누군가에게 잘 반한다. 사랑에 빠진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반한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falling in love’까지는 아니고, ‘into’라 할 수 있겠다. 사랑까지는 꽤 신중한 편이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데도 느린 편이다. 

한번 연애를 시작하면 그 기간이 짧지 않다. 하지만 ‘반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르다. 속전속결이다. 사랑까지 가지 않는다면 금방 빠져나온다. 상대방 개성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내 쪽에서 모방해볼까, 하는 순간 나는 그에게 ‘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라라랜드> 중에서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변화한다.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알지? 상대에게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 궁금할 때 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난 그에게 상처받기를 각오하였는가?’

‘난 그의 마음을 내 마음보다 혹은 그만큼 아끼는가?’

‘그로 인하여 변하는 나 자신을 감당해낼 자신이 있는가?’

이러한 것들이다. 아마 더 있을 텐데 사랑에 빠진지가 오래라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몇 가지 물음들은 위의 것들보다는 더욱 뜨겁고 오묘한, 이성이 배제된 시적인 것들이리라.

사랑에 빠지기에 앞서 우리는 반한다. 나는 왜 남들보다 잘 반할까? 그런데 왜 사랑에는 잘 빠지지 않을까? 반대로 누군가들은 비교적 나보다는 남들에게 잘 반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사랑에 빠지기는 쉽다. 내가 또래 친구들보다는 연애 횟수가 적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줄 것이다. 나에게 연애 횟수를 물어보던 이들은, ‘생각보다 엄청 적은데?’라며 놀라곤 하더라.

이유야 많겠지만 가장 큰 건 이거다. 나는 잘 반하는 게 맞다.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상대방의 개성들, 그것들을 내 쪽에서 모방해볼까(혹은 접목시킬까) 싶은 것들이 많다는 얘기다. 그건 상대방의 어느 ‘특성’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도 나 스스로가 궁금하다. 20대 초반,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올해 초의 내 성격이 또 지금과는 다르다. 나는 계속 나를 찾아 나선다.

세계 어디를 가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지만, 분명 그 특성들은 다르다. 난 마치 여행을 가듯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구경하고 체험하려 든다.

‘이건 뭔데? 재밌어? 나도 한번 볼래!’

그렇게 쿡쿡 건드려보는 거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나랑 잘 맞을 리 없다. 여행지에서 마주하게 된 어떤 운동이나 음식이 정말 잘 맞아서 이후에도 취미로 삼았던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시간 그 자리에 두고 온다.

심지어 난 호불호가 많이 강하다. 조직 생활을 하면서 무언가 다함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하는 뭐 그런 일을 하지 않다보니 더욱 그렇게 되었다. 내가 좋은 게 가장 좋은 것, 이라는 가치관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보니 반했다가도 금방 스스로 튕겨져 나온다. 음, 막상 해보니 나랑 안 맞아, 라고 느낀다. 고기도 씹어본 놈이, 여행도 다녔던 사람들이 잘 다닌다. 반하는 것이 여행이라면, 나는 꽤 베테랑 여행자다. 여기서 대상은 단지 연애 상대뿐만 아니라 그냥 모든 ‘사람’이다. 난 금방 알 수 있다. 저 사람은 나랑 맞아, 안 맞아.

그러다가 정말 꽂히는 여행지가 생길 수 있다. 난 예상했던 것보다 얼마간 더 머무르기를 원한다. 그 도시가 기대 이상 나와 잘 어울린다면, 거기에 속한 내가 몹시 마음에 든다면, 변덕스러운 날씨나 교통 체증이 날 괴롭히더라도 이 도시라서 괜찮다면, 거기에서 변화하는 내가 궁금하다면, 난 기꺼이 머무르고자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방은 날 사랑할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난 짝사랑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도시가 좋아진 게 내 자유이듯, 상대방이 날 거부할 자유도 있을 테니. 단지, 알아주기만을 바란다. 지금 난 널 사랑하고 있어. 언제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날지 모르겠지만 말야.

영화 <로마 위드 러브> 중에서

짝사랑 역시 나를 변화시킨다. 반하는 단계를 지나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누군가를 짝사랑한 적이 있었다.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닐 거다.

짧지 않은 시간 그를 좋아하면서 많이 힘들었냐고? 아니, 난 내가 변화하는 모습이 맘에 들었다. 때문에 난 생각보다 그를 오래 좋아했다. 내 일을 더욱 좋아하게 된 것도 그 당시 짝사랑이 한 몫을 했다. 내 친구들 역시 당시의 나는 어느 정도 감정적으로 혼란과 외로움을 겪었다는 걸 알지만, 긍정적인 시너지가 있었다는 것도 인정해준다. 난 그 시절의 나 역시도 좋아했다.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누가 사랑해주냐고들 말하지. 근데 이런 것도 있다. 스스로 사랑하는 여자라도, 누가 안 사랑해줄 수도 있다.

그만큼 그 사람은 나에게 많은 영감과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반했다가, 서서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물론 나를 사랑할 마음이 없던 그를 알기에 나는 다른 데에 반할 마음들을 열어두었다. 조금 반했던 이들은 있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누군가 나를 비정상적이라고 말할 거다. 그럴지도 모르지. 정상과 비정상이라 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은 거라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다. 왜 다른가? 왜 평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왜 잘 반하지 않고 사랑이나 연애는 이보다는 쉬울까?

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 보길 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교적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살아보기를 원하지만, 대부분이 원하는 삶의 모습엔 비슷한 청사진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가진 삶의 특성 중에, 그 청사진과 비슷한 색채를 가진 사람에게만 반한다.

‘아니, 난 정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살아보고 싶은데?’

그래, 내가 평범하다 말하는 누군가 이렇게 발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가 추구하는 것은 다양한 경험이지, 여러 가지 모습의 삶은 아닐 거다. 다양한 경험들 중에서도 대부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일 테지.

자유롭고 싶다면서 안정적인, 꾸준히 오래일 할 직장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그게 어떻게 여러 가지 삶을 살게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모습의 삶이란, 비상식적인 장면 역시도 포함한다.

영화 <오피스> 중에서

현대 사회는 지금보다 더욱 각박해질 거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아니 앞으로 더 많은 젊은이들은 사회의 노인들을 부양해야 한다. 시장의 많은 부분들을 기계와 인공 지능이 대체하고 있으며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무한 경쟁의 구도는 훨씬 심화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아마도 나보다 경쟁에 유리한 사람에게 반할 확률이 커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며 불확실한 것 보다는 확실하면서도 안전한 것들에 이끌린다. 그러니 그런 특성을 가진 상대방에게 반할 확률이 커진다. 배우자를 고를 때 안정적인 수입 역시 고려 대상일 수밖에 없다. 아니, 더욱 중요해졌다. 그런 꽤 까다로운 ‘반하는 조건’을 통과했다면 사랑에 빠지기란 이보단 쉬울 수 있다. 서로 그려내는 청사진이 어느 정도 비슷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두 사람의 성격이 다를지 언정,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부럽다. 효율적이라 좋겠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 하는 일이나 삶에 만족하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다. 지금도 정말 좋다. 하지만 또 어떻게 내가 변하고 바뀔지 몹시 궁금하다. 인생은 무지 짧고 사랑할 시간은 더 짧다고 한다. 이런 짧은 생에 짝사랑도 나쁘지 않다만, 진짜 교감이 있는 사랑도 받아봐야 할 텐데! 너무 많은 호기심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잖아.

사랑은 커녕, 심지어 요즘은 반해있는 상태도 아니다.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그 때가 정말 하루하루 선물 같았는데! 오늘은 또 어떤 깨달음이 있을까, 또 어떤 그의 작은 행동이 나를 설레게 할까, 또 어떤 감상이 나올까, 또 어떤 감동이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책상 위 화분에 물을 준 지 좀 된 것 같다. 파릇하던 나뭇잎이 계절을 타듯 바삭해져간다. 얼른 물을 줘야겠다, 그래, 너도 그 당시의 나처럼 기다렸겠지. 

그 시절이 그립다.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내가 그리워지는 서늘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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