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낙규의 축제이야기] 鵬이 될수 없더라도, 그를 비웃는 어리석은 짓은 말아야

 

▲ 강낙규 이사

[공감신문 강낙규 기술보증기금 이사] 장자(莊子 BC369~289)는 초나라 부근인 몽(蒙)에서 옻나무동산의 하급관리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자」에는 다양한 식물과 곤충, 새와 물고기가 등장한다.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 등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만 장자가 썼고 나머지는 장자의 추종자들이 썼다는 것이 정설이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미국의 H. G. 크릴(Creel) 교수는 노자(老子)가 정치적이고 목적적이라면, 장자(莊子)는 관조적이고 명상적이며 내면적이라고 했다.

「장자(莊子)」의 핵심 키워드는 변화다. 사물을 다양한 시각으로 보면서 스스로 변화할 때 자유와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달아 무한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소요유(逍遙遊)

내편 첫 이야기가 소요유다. 소요유에서는 장자 전체의 주제를 보여준다.

소요(逍遙)란 아무런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며 걷는 것이고 유(遊)란 창조적인 활동을 말한다. 하루가 30장이므로, 1장 동안 소요하는데 48분정도 된다. 요즘 하루 운동 권장량이 1시간정도라고 하는데 2,400년 전과 현재의 적정운동량이 비슷한 것이 신기하다.

소요유 첫 장은 곤(鯤)이란 물고기가 붕(鵬)이란 거대한 새로 변신해서 구만리를 날아올라 남쪽으로 수 천리를 날아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를 본 메추라기(마을의 관리나 신하 또는 군주를 은유)가 수풀을 뒤적이는 게 비행의 극치가 아니냐며 무엇 때문에 수만리를 날아가느냐고 비웃는다.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바닷가에서 생선이나 주워 먹지 않고 높이 나는 조나단 리빙스턴 씨걸을 비웃는 것 같다.

화(化)란 새로운 것, 시작, 창조, 생성을 의미하며 현실을 바꾸거나 창조적으로 개선하는 활동을 말한다. 물고기가 새가 되는 불가능을 넘어가는 것(遊無窮의 변화)은 한계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뚫고 가는 과정이다.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창조는 것을 의미한다. 명(冥)에서 청(靑)으로, 곤(鯤)에서 붕(鵬)으로 극에서 극으로 공간 이동한다. 소요유는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목적과 삶의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삶은 더 풍요해지며 창조적으로 살 수 있음을 들려준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至人無己),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공을 내세우지 않으며(神人無功), 성인은 이름을 구하지 않는다(聖人無名).

우리가 붕(鵬)이 될 수는 없을 지라도 비웃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 막대사탕을 문 아이 /사진=강낙규
양행(兩行 삶의 지혜)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가 있고, 삶의 방식 또한 다르다. 장자는 한쪽을 기준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여러 각도로 바라보라고 한다. 이렇게 양쪽을 다 인정하면 시비(是非)를 일으키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천균(天均).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균형이다.

천지의 본 모습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 즉 포일(抱一), 제일(齊一)이다. 유무(有無), 선악(善惡), 미추(美醜), 시비(是非) 등은 상대적 개념이다. 도의 관점에서 미추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기(氣)이기 때문이다. 나의 내부와 외부가 오가는 흐름으로 순간순간 외부의 힘을 감지하여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이다. 모장과 여희가 사람에게는 미인이지만 물고기나 새는 달아난다. 각자의 입장에서 다르게 볼 수 있으며 그것이 자연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간섭하지 않는다. 관점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고 상호 영향을 주어 공통의 흐름을 만들어 것이 중요하다. 소통을 통하여 변화가 일어나고 그 전에 없던 공통의 흐름으로 동적인 통일성을 이룬다.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없음의 쓸모

혜자가 장자에게 “선생의 말씀은 쓸모가 없습니다.” 라고 하자 장자는,

“쓸모가 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 곳을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땅이란 넓고도 크기가 한이 없지만, 사람들이 걸을 때 쓰이는 것은 발로 밟는 부분뿐입니다.(人之所用容足耳) 그렇다고 발 크기에 맞추어 발자국만큼의 땅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은 황천에 이르도록 깎아낸다면 그래도 그 땅이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혜자가 “쓸 모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쓸모없는 것의 쓰임도 잘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然則无用之爲用也) <외물>

쓸모 있으면 쓸모 있음을 알고, 쓸모없음의 쓸모는 알지 못한다.

쓸모없는 삶이 큰 쓰임이 될 수도 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는 무위의 상태(염담무위 恬淡無爲)로 살지 잘난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괴롭힐 필요가 있을까? <거협>

무위(無爲)란 ‘함’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이어서 보통의 ‘함’과 다른 ‘함’이다. 따라서 ‘함’이라고 할 수 없는 ‘함’이다. 도(道)는 무위지위(無爲之爲)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도와 하나 된 상태에서 도와 함께 ‘저절로 나오는 함’을 하며 산다. 무위의 지도자는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마치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다. (治大國若烹小鮮) 쓸데없이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들쑤시지 않고 한 쪽이 잘 익기 전에는 뒤집지도 않는다.

“아내는 애 놓고 몸 푸는데 전쟁 나가면 누가 농사짓고 누가 가족을 돌보느냐” 인위가 아닌 무위의 정치인 이유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은 추구할 줄 알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추구할 줄 모른다.

 

빈 배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 와서 내 배에 부딪히면 비록 속이 좁은 사람이라도 화를 내지 않지만,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떨어지라고 소리를 지른다. 한 번 소리를 쳐서 말을 듣지 않으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세 번째 소리를 치고 그 후에는 욕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나중에 화를 내는 이유는 처음에는 빈 배였지만 나중의 배는 누군가가 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비우고 산다면 그 누가 욕을 하겠는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대방과 다투거나 싸울 때 상대방을 빈 배처럼 생각하면 싸울 일이 없다. <산목>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배가 어디로 가든 사람이 책임져야 하지만 빈 배는 아무렇게나 떠다니고 아무데나 부딪치기 때문에 빈 배에 부딪혀도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책임과 부담을 떨쳐버리고 생명도 없고 의식도 없는 사물과 같이 자신을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해칠까?

마음이 비어있으면(虛)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인생에 실(實)만 있고 허(虛)가 없다. ‘내’가 없다. 허(虛)란 텅 빈 것이 아니라 얽매여 있지 않은 것으로 무한한 에너지의 잠재적 장(場)이다.

▲ 공연을 보며 활짝 웃으시는 할아버지 /사진=강낙규
장자의 아내와 장자의 죽음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혜자가 문상을 가니 장자는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자네는 늙도록 부인과 함께 살면서 자식을 키우지 않았나. 울지 않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노래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고 하자 “그게 아니네. 어찌 나라고 슬퍼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겠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원래 아무것도 없다가 삶이 생겼지. 그리고 그 삶이 변해서 죽음이 된거야.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면서 되풀이하듯 너무 당연한 거지. 내 아내는 변화의 가운데 편안히 누워 있는 것이네. 내가 그런 사람 붙잡고 운다면 운명을 거슬리는 것이야.” <지락>

장자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제자들은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하자

“하늘과 땅이 안팎의 널이요, 해와 달이 한 쌍의 옥이요, 별과 별자리가 구슬이다. 이에 무엇을 더 한다는 말인가?”

제자들이 까마귀나 솔개가 시신을 먹을까봐 걱정하자

“땅위에 있으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되거늘 어찌 한 쪽 것을 빼앗아 딴 쪽에 주어 한 쪽 편만 들려고 하는가?” <열어구>

“대지는 나에게 형체를 주어 삶으로써 나를 수고롭게 하고, 늙음으로써 나를 편안하게 하며, 죽음으로써 나를 쉬게한다.” <대종사>

죽음을 존재의 한 상태로 본다.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로 본다.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하나의 물(物)에서 다른 물(物)로 변화하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와 같이 자연스러운 사태로 죽음을 극복하고 있다.

죽음은 물(物)의 운동에 의한 변화로 죽음과 삶은 동일한 사물의 두 면이다.

혼돈에서 기(氣 운동과 변화를 일으키는 힘)가 모여 형체를 만들고 거기서 삶이 나타나고 죽는다. 죽어서도 우주 밖으로 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에 돌아간다. 세상 내에서 초월해야 한다.

‘기’라는 다리하나 달린 벌레가 ‘지네’를 보고 다리가 많아 부럽다고 하니 ‘지네’왈 이 많은 다리를 박자 맞춰 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며 다리 없는 ‘뱀’이 부럽다고 한다. 그러자 ‘뱀’왈 그런 소리하지 말라. 배로 기어가다 가시덤불이 나오면 얼마나 아픈 줄 아느냐? 저 소리도 없이 날아가는 ‘바람’이 정말 부럽다고 하자 바람이 하는 말이 사람의 생각은 한 순간에 천리만리를 달리는데 나랑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한숨짓는다.

 

무한한 상상력은 우주 끝까지도 한달음에 갔다 온다. 처음에 시작한 나비세상에서의 느릿느릿한 소요는 이렇게 번개처럼 온 우주를 주유하며 서서히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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