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을 본다 우리가 서 있다 간신히 서서 / 서로를 비춘다 흰 눈 나린다.’
(빙판과 절벽 [영화 <파란만장>ost] / 어어부 프로젝트, 중에서)
 

[공감신문] 위로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이들에겐 다소 불편한 글이 될 수도 있겠다. 앞서 말하자면 이 글은 전통무속신앙에 대한 이야기다. 내용에 관련된 비판일랑 듣겠지만, 종교관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읽기가 꺼려지시는 분들은 여기서 그만 읽지 않는 게 좋으시리라 생각된다.  

신윤복, <굿(신들려 춤추는 무녀)>

우리네 삶에 위로가 필요한 순간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우리’라는 말의 어원은 ‘울타리’다. 내 식구, 내 마을, 내 고장, 내 나라의 울타리 안에서 평화롭게, 그저 이 한 몸 건사하며 살아가기란 녹록치 않은 일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누구나 잘 살아보겠노라, 마음먹는다. 각자의 삶을 열심히 꾸려나간다. 그런 과정 중에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하기도, 또 누군가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상실감을 마음에 얻기도 한다. 고작 100년도 안 되기에 누구라도 살만큼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생을 져버리는 그 순간에 눈에 밟히는 이들이, 하지 못한 말들이, 주지 못한 온기가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걸 죽은 자는 물론이요, 산 자도 알고 있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우리는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에게 할 수 있는 위로이자, 또 남은 자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모든 짐과 고통을 내려놓고 평화로운 곳에 가시기를. 

어릴 적 TV에서 봐온 ‘무당’의 존재는 나에게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늘 매서운 눈매를 하고 흉측한 일들을 저지르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서슬퍼런 칼날 위에 올라 춤을 추고 짐승의 피를 마시기도 했다. 

이후 매체에서 보여 진 ‘굿’에 대한 이미지도 별로 좋은 게 없었다. 심지어 얼마 전 국정농단 사태에 이런 샤머니즘에 관한 이야기까지 보도 되니 그런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을 수밖에. 

그런데 여기서 나의 흥미를 끈 것은 무속인들의 반응이었다. ‘그’는 무당이 아니니 언론 보도에 ‘무당’이라는 단어를 빼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도 그저 굿을 하면 다 무당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더라. 모태신앙인 내가 어릴 적부터 듣고 읽어 온 성경과 다르게 해석을 하는 어떤 교회들을 ‘이단’이라 부르듯이, 무속신앙에도 ‘사이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까? 

고려시대 이전, 이 땅에서 무당들의 위상은 꽤 높았다. 그들은 한 해 농사는 물론이요, 왕의 계승이나 전쟁 등 나라의 안녕을 위하는 일에도 큰 목소리를 냈었다. 유교를 토대로 건국된 조선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마을 곳곳에서는 전통적으로 굿이 행해져 왔었다. 물론 지방마다 구체적으로 염원하는 바는 물론이거니와 굿의 모습이 다 달랐다. 서울에선 만신, 전라도는 당골, 충청에서는 법사라 부르기도 했다. 

천연두를 피하고자,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어촌에서는 배에 고기를 가득 실어 만선이 되게 해달라고 온 동네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빌었다. 다함께 잘 살고자 하는 건 어느 지방이나 한마음 한뜻이었다. 그렇게 한 바탕 굿을 하고 나면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준비하느라 수고했다며 축제를 벌이듯 놀음굿도 했다.

만선을 바라는 의식으로 머리에 흰 종이를 두른 사람들. 영화 <영매> 중에서

전라도에서는 망자를 천도하는 굿으로 씻김굿을 한다. 생전에 부정한 일들일랑 모두 씻어 버리고 극락으로 가길 바라는 의식이다. 물론 다른 지방에도 이런 굿들이 존재한다. 경상도 오구굿, 경기는 지노귀굿 등이 있다. 이름이 다르듯 지역마다 방식도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무당’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우리는 그들이 영엄하다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점쟁이’는 사실 무당과 다르다. 유교 이후 들어온 주역이나 명리학을 가지고 통계학적으로 점을 치는 점쟁이가 있고, 신을 섬겨서 점을 치고 ‘굿’을 주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무당인 것이다. 무당은 대를 거쳐 오는 세습무와 신병을 통하여 입무하게 된 강신무가 있다. 주역이나 명리학으로 점을 치는 것은 사실 배우면 할 수 있지만, 무당은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신의 선택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무당’이라는 말은 問(물을 문), ‘묻다’에서 왔다. 지금의 한자 표기(巫堂)는 발음대로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이다. 그들은 산 자의 질문을 죽은 자에게 묻는다. 또 죽은 자들이 생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자신의 몸을 빌게 하여 산 자에게 전달한다. 이것이 무당들이 주로 해 온 일이다. 

위로,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준다는 뜻이다.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그렇게, 그 한 몸을 내받쳐 위로를 하고 있었다. 신을 받은 순간 이미, 온전히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그들이 모시는 신의 몸이며, 망자들의 입이 되었고, 그들 대신 육신의 눈물을 쏟아내었다. 

어느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한 무당의 인터뷰가 나왔다. 다시 태어나면 이쁘게 생기고, 노래를 아주 잘하는 가수나 국악인이 되고 싶다고. 하긴 이제와 ‘무당’이라 은근스런 핍박을 당해 온 그 설움을 누가 알아줄까. 그러나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이야기를 넘나들으며 깨달았을 것이다. 한 평생, 거진 제 뜻대로 살다가 죽는 이가 누가 있겠느냐고. 그러니 그녀들은 그 삶을 받아들이고는, 짧다면 짧고 멀다면 먼 이후에 삶에 대하여 소박한 꿈을 품어볼 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영매>(2002) 중에서

여든 넘은 어느 당골(무당)은 요즘 하는 굿을 못 보겠다고 한다. 요즘 굿은 굿이 아니라고. 진짜 당골들이 하는 굿은 이제 없다고 말이다. 슬펐다. 그들이 하는 의식은 어떤 종교관을 넘어, 이 땅에서 계승되어 온 위로의 역사였다. 지나간 이들을 추억하게 하는, 가슴 속에 맺힌 이야기들을 꺼내놓게 하는, 산 사람들을 더욱 살게 하는 역동적인 우리네 위로의 역사였다. 

그래, 맞다. 어느 저 늙은 당골레(무당)의 말대로, 그 동네 어르신들 말대로라면 요즘 어디 무당은 무당도 아니다. 그 의식을 겉치레로 따라하듯, 위로, 화해 그리고 화합이 없는 허례허식이 더욱 많을 테니까. 나도 이젠 그걸 굿이라 부르지 않으련다. 

우리나라 최초의 무당은 설화 속 ‘바리데기’였다고 한다. 삼나라의 일곱 번째 공주였던 바리데기는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기꺼이 저승국으로 떠난다. 최초의 무당인 그녀야말로 화해와 용서의 모티브다. 한편, 여기 저기 돌며 기술을 파는 이들을 가리켜 ‘바리’를 가져다붙인 게 ‘돌팔이’의 어원이라는 얘기도 있다. 

<바리데기>(1988), 홍성담

미신의 반대말은 종교가 아니다. 과학이다. 종교의 반대말도 미신이 아니다, 그 역시도 과학일 것이다. 다만 나는 굿이나 무당을 단지 미신이 아닌 ‘전통 문화’라 생각하고 싶다. 무속신앙이야말로 진짜 우리 문화다.  사주팔자도 중국에서 들여 온 것이고, 불교, 기독교 등 다른 종교가 모두 그러하다. 

중세 시대 유럽의 미술이나 건축 등 대부분의 문화 예술은 교회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보존해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의 석굴암이나 해인사 팔만대장경 역시 불교를 섬겼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때 제작된 것이다. 자랑스럽게도 우리의 ‘굿’ 역시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진심이 담긴 예술은 그 호소력이 짙을 수밖에. ‘한’이라는 특유의 정서를 가진 우리 민족 정취가 녹아 든 문화에, 굿을 빼놓을 수 없지. 

우리가 감히 헤아리지 못했던 누군가의 마음이 참 깊더라.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가엽더라.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가상하더라. 그리고 그것들을 위로하는 마음이 곱더라. 그게 우리 조상들이 품고 계승해 온 방식이었다. 

화면을 통해 어느 굿을 보았다. 어린 아들을 여읜 어느 어미의 통곡에, 아들 말을 전하는 당골레를 보며 나 역시도 눈물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던 아들은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한 맺힌 말들을 마구 퍼부었다. 객지에 있던 자신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못 먹인 게 한스럽지 않느냐며 섭섭함도 마구 토로한다. 어머니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을 것이다. 가족들은 꺽꺽 소리도 못 내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렇게 한 바탕 이야기를 하던 아들이 마무리를 짓는다. 어머니에게, 누나에게, 동생에게 걱정과 잔소리, 당부를 전한다. 

‘너희들은 살았으니까 좋지, 나는...’이라며 한스럽게 울던 이가, ‘내 못 살은 명까지 선임하고 가니까 엄마 오래 살아요.’라 말하며 어머니 손을 꼭 잡는다. 어린 아들일지라도, 망자는 망자였다.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어느 큰 것을 넘은 자의 말이었다.

‘동정녀 마리아’에서 ‘동정’이라는 뜻도 모르고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던 때에, 난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무속신앙을 믿지 않았다, 아니 그것이 가진 모든 가치에 대하여 고개를 돌렸었다.

나는 이제 조금 알게 되었다. 한 개인으로서, 의식이나 형식은 모를 지라도 우리 조상들의 뜨겁고 적극적인 위로의 방식이 계승되고자 하는 마음은 가질 수 있지 않은가. 망자의 마음은커녕 제 마음도 챙기기 힘든,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더욱이. 

지금은 새벽 4시 반이다. 그 전에도 올 해에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써왔다. 나의 이야기, 주변 인물, 소설과 영화의 등장인물 혹은 역사 속 그 누군가의 이야기. 가만 보면 타인의 이야기를 자기 언어로 피력하는 나 역시도 그들의 삶과 다르지 아니한 것 같다. 

단지 내 글도 때론 위로가 되는 지 그것을 問,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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