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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교양공감] 역사 뒤에 숨겨진 진짜 위인들

[공감신문 교양공감] 과거 ‘개그콘서트’가 우리의 일요일 밤을 책임지던 시절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아무리 잘 해도 최고가 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의미로 당시 사회상을 정확히 꼬집은 말이다.

예전 개그콘서트에서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인기 있었다. 기분 나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 참 안타깝다. [KBS2 ‘개그콘서트’]

그 시절에는 저 유행어를 듣고 많은 부분 공감하고 분노(?)했으나, 요즘에는 이런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역사를 되짚어 보자. 예컨대 한산도대첩·명량대첩·노량대첩을 들으면 가장 먼저 누가 생각나시는지? 십중팔구는 이순신 장군이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을 승리로 이끈 이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대부분 이순신 장군을 생각할 것이다. [장우성, 충무공 이순신 초상]

전투에 임했던 휘하 병졸이나, 주변에서 제언한 참모들을 떠올리며 영웅이라고 말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주변에 질문을 해보시길. 조심스레 없을 거라고 예상한다.

아무리 의미 있고 대단한 일을 해내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으면 잊히는 게 순리인가 보다. 앞선 물음에 적과 맞서 싸운 모두라고 대답한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이라고 대답한 게 바로 방증이 되겠다. 

과거를 돌아보면 누가 봐도 위대한 일을 해내고도 세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 뒤에 숨겨진 위인들’이 꽤 많다. 오늘 교양공감 포스트는 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이레나 센들러’, 유대인 어린이 2500명을 구한 영웅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은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수용소에 감금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Wikipedia]

‘홀로코스트’. 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하는 단어다. 당시 독일은 반유대주의 정책을 펼치며 600여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현재 한국의 전체 인구가 5000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600만명이라는 수는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숫자임이 분명하다. 

젊은 시절 2500여명에 달하는 유대인 어린이를 구출한 ‘이레나 센들러’ [Wikipedia]

아무튼, 유대인 입장에서 지옥 같았던 시기에 그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이들도 존재했다. 이번에 소개할 ‘이레나 센들러’가 그 중 한명이다.

이레나 센들러는 1910년 2월 15일 태어난 폴란드 출신 간호사로,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 어린이 2500여명을 구출했다.

홀로코스트로부터 살아남은 유대인 어린이들. 나치독일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유대인이라면 학살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Wikipedia]

그녀는 제고타(Zegota)라는 비밀 유대인 지원 단체를 만들어 나치의 눈을 피해 각종 기발한 방법으로 유대인 어린이들을 구출했다. 그녀는 관이나 쓰레기 봉투, 중환자 후송차량에 몰래 아이들을 숨기는 방법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녀의 선행은 나치 독일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나치군에 발각된 이레나는 곧바로 감옥에 수감돼 온갖 고문에 시달렸으며 끝내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이레나 센들러의 선행은 약 50여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2007년에서야 세상에 밝혀졌다. 사진은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그녀의 모습 [Wikipedia]

다행히 한 조력자의 도움으로 운이 좋게 탈옥에 성공한 이레나는, 이름을 개명하고 조용히 생을 살아갔다. 그러던 중 지난 2007년 뒤늦게 공로가 세상에 밝혀져 폴란드 의회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또 유력한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거론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다음해인 2008년에 향년 98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뒀다.

 

■ ‘김상옥’, 일기당천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이 참 많지만, 이름 몇 글자만 남긴 채 역사 속에서 잊혀가는 이들도 많다. 이번에 소개할 ‘김상옥 의사’도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다. 

김상옥 의사는 혼자서 수백명의 일본경찰을 상대한 일기당천의 정신을 가진 독립운동가였다. 사진은 김상옥 의사 전신 영정. [국가보훈처]

많은 기록이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사건은 김상옥 의사 혼자서 수백명의 일본 무장경찰과 접전을 벌인 것이겠다. 그는 권총사격의 달인으로 불렸는데 실제 10발을 쏘면 9발 이상은 매번 명중했다고 전해진다.

아마 사격을 해본 분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권총은 길이가 짧고 사거리가 짧아 목표를 정확히 맞추기 쉽지 않다.

김상옥 의사는 단 두자루의 권총으로 일본군 수십명을 사살했다. 권총의 명중률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사격실력이 훌륭했던 것. [Pixabay / CC0 Creative Commons]

아무튼, 그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쌍권총을 이용해 적들과 대치했다. 더 대단한 점은 가옥 5채의 지붕을 넘나들면서 무려 3시간에 걸쳐 적과 대치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놀라운 건 일본경찰 수십명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운은 길지 않았다. 총알아 다 떨어지게 된 것. 생의 마지막을 느낀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한 발을 남겨 자결하는 데 사용했다. 기록에 의하면 자결하기 전에 “대한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다고 한다.

김상옥 의사는 일본경찰에 잡히기 전 마지막 남은 총알 하나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3.1운동 당시 덕수궁 앞에서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 [역사편찬위원회]

김상옥 의사. 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아마 ‘일기당천’(一騎當千)이 아닐까 싶다. 당장 여러분에게 권총 두 자루만 쥐어주고 수백명의 무장경찰과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하면 응하시겠는지? 아마 보통 배포와 신념으로는 불가능할 듯싶다.

대한독립을 원했던 김상옥의 정신과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정확히 방증하는 사례가 또 있다. 그가 장렬히 숨을 거둔 후 몸을 살펴보니 총 11발의 총상이 발견된 점이다. 

한두 발도 아닌 10발이 넘는 총알을 맞고도 수 시간 동안 버틴 그에게 존경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겠다.

 

■ ‘김재현 기관사’, 62년 만에 드러난 공훈
흔히 전쟁하면, 군인과 군인끼리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걸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기자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전쟁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히면, 전쟁에서 주역은 군인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들의 역할이 더 크다는 걸 깨닫게 된다.

6.25전쟁 당시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지게를 메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누볐던 지게부대 [국가기록원]

한산대첩 때 어부 김천손이 이순신 장군에게 적의 동향을 보고해 승리의 발판을 마련해 준 것과 6.25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지게를 이용해 물자를 운반하던 ‘지게부대’가 적절한 예시겠다.

6.25전쟁에 숨은 영웅이 있다. 바로 ‘김재현 기관사’다. 사실 전쟁과 기관사는 잘 연관이 되지 않는 단어다. ‘기관사가 무엇을 했길래 위인이라고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됐다. 수적·질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인 당시 국군은 북한군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후퇴만 거듭했다. 미군이 참전해 국군을 도왔으나 상황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딘 소장 구출작전에 이용한 ‘미카3-129호’ 기관차. 김재현 기관사가 자진해서 운전을 맡았다. [국가보훈처]

그러던 중 미군 24사단을 지휘하던 ‘딘 소장’이 후퇴 도중 북한군에 잡혔는데, 당시 군은 열악한 도로보다 상황이 나은 철로를 이용해 딘 소장을 구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무모한 작전에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 작전에 지원한 이가 있으니 바로 ‘김재현 기관사’다.

기관차 운전석에 앉은 김재현 기관사의 모습 [국가보훈처]

김재현 기관사는 당시 1남 1녀를 둔 28살의 젊은 청년가장으로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말을 가족에게 남기고, 미군 33명과 함께 적진으로 기관차를 몰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재현 기관사는 대기하고 있던 북한군에 의해 작전 중 숨을 거뒀다.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김재현 기관사의 훈화는 지난 2012년 미 국방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또 한국인 최초로 ‘특별민간봉사상’을 받았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위치한 김재현 기관사의 묘 [국가보훈처]

현재 나라를 위해 희생한 기관사는 300여명이 넘지만, 김재현 기관사를 포함한 단 세 명만 국립현충원에 안치돼 있다.

 

■ ‘텐진 노르가이’, 최초 에베레스트 등반의 조력가

옆에서 힘을 다해 도왔음에도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조력가’들도 있다. 마치 배트맨과 알프레드처럼 말이다. [영화 ‘배트맨 다크나이트’ 스틸컷]

앞서 설명한 것과 달리, 기록은 남겼으나 조력가라는 이유로 조명을 받지 못했던 이들도 있다.

역사를 보면 대부분 업적을 이룬 한 명을 조명하지, 도움을 준 이들을 비추지 않기 때문. 그들이 관심을 받게 되는 경우는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졌거나 새로운 기록이 발견됐을 때가 대부분이다.

에베레스 산 최초 정복에 큰 공을 세웠지만, 역사에 가려진 이가 존재한다. 참고로에베레스트 산의 높이는 8848m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Pixabay / CC0 Creative Commons]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등산가의 무덤으로 불리는 에베레스트 산에도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지금은 등산장비의 현대화, 등반 루트 확보 등 여러 이유로 오르기 수월해졌지만, 불과 70여년 전에 에베레스트는 인류가 오를 수 없는 거대한 자연 그 자체로 여겨졌다. 

공식적으로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성공했다고 알려진 ‘에드먼트 힐러리’ [Wikipedia]

인류가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공식 기록은 1953년 5월 29일로, 대부분 뉴질랜드 출신 등산가 ‘에드먼트 힐러리’가 그 주인공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에드먼트 힐러리는 당시 에베레스트 등산에 실패할 뻔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도운 ‘텐진 노르가이’가 없었다면 말이다.

텐진은 1953년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기 위해 구성한 ‘존 헌트 원정대’를 돕기 위해 고용된 현지인 출신 ‘세르파’였다. 다들 아시겠지만, 세르파는 에베레스트 등산을 위해 고용되는 현지인들로 현재도 그들의 도움 없이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왼쪽부터 ‘에드먼트 힐러리’, ‘텐진 노르가이’ [Wikipedia]

당시 힐러리는 정상을 눈앞에 두고 무려 30분이나 탈진상태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처했었다.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텐진’이 30분이나 힐러리를 기다려줬다. 

또 텐진은 움직이기 힘든 힐러리를 생명줄로 연결한 상태로 정상 바로 밑에 있는 높이 12m 수직방벽을 올랐다고 전해진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찍은 최초의 사진. 처음에는 사진의 인물이 ‘에드먼트 힐러리’라고 모두 알고 있었으나, 추후 ‘텐진 노르가이’인 것으로 밝혀졌다. [Wikipedia]

당시 시대상 백인우월주의 때문인지, 세르파를 단순한 가이드로 생각해선지 모르겠으나 공식적으로 에베레스트 등산에 성공한 이는 힐러리로 남아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찍힌 최초 사진의 주인공이 텐진임이 밝혀졌음에도 말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텐진이 사망한 1986년, 힐러리가 “텐진이 내게 영광을 양보한 것이며 둘이 함께 오른 것”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 역사는 그들을 잊었지만, 우리는 기억하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역사의 뒷면에 가려지면 그걸로 끝이다. 아무것도 남길 수 없다.

아무리 살아생전 훌륭한 이라도 역사가 외면한다면, 사람이 찾지 않는 건물처럼 천천히 잊히기 마련이다. [Pixabay / CC0 Creative Commons]

지금까지 소개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분명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보통 사람이라면 흉내 내기도 힘든, 타의 모범이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들의 공을, 아니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더 큰 문제는 세간에서 잊혔거나, 잊히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 우리가 모르는 숨은 영웅들이 수십, 아니 수백 수천명 더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가 그들에게서 등돌렸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자 [Pixabay / CC0 Creative Commons]

그들을 위해 우리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겠지만, 최소한 기억해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다. 역사는 그들을 등지고 잊었으나, 우리는 그렇지 않기를. 기자의 최소한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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