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몇 년 전 읽었던 에세이의 제목이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란 없다. 알 법도 할 것 같다는 순간, 우리는 겪어보지 못한 어색한 상황 혹은 위기에 마주하고 또 그렇게 인생을 배워간다. 쌓아올려진 경험들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기에 누구 하나 똑같은 삶은 없다. 타인이 겪는 아픔에 대해서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 역시 오만하다. 

Khnopff, <I locked the door upon myself>, 1891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삶은 사실 가까이에 있지 않다. 현대적인 일상이 우리에게 배신감으로 다가오는 순간에야, 우리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삶에 다다른다.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 실직, 이별, 이혼, 실패와 같은 좌절의 순간에 특히 그러하다. 

어린 아이들의 일상이라고는 삶을 학습하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잘 노는 것. 그리고 아이들은 착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을 때, 무언가를 바란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는 아이들도 있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언젠가 나타날 산타에게 뭔가를 가지고 싶다고 바라는 아이들도 있다. 

니체는 인간이 세 가지 과정을 밟는다고 했는데, 그 중 마지막이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물론 니체가 비유한 어린 아이의 모습과는 의미가 다르지만 난 어린 아이의 삶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불면증이 심했을 때 그렇게 느꼈다. 제 시간에 잘 먹는 것- 심지어 어린 아이들은 술이나 인스턴트식품과 같이 자극적인 것이 아닌 대부분 몸에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 그것은 나로서 쉽지 않은 일이다. 

잘 노는 것! 그것은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인데 그조차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른들은 생각이 너무 많다. 잘 자는 것! 이것이 제일 어렵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불면증을 앓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린 아이의 삶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험난하진 않지만 분명 어렵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삶에서 우울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대부분 사랑에 배신을 겪어보지 않았다. 단지 자신과 어머니, 그리고 세계가 다르다는 것, 그런 분리의 경험이 전부다. 아이들은 이렇듯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기에 우울하지 않다. 우리 어른들의 삶은 이로부터 많이 동떨어져 있기에 우울하고 무기력해지기 쉽다. 

영화 <셰임>중에서

얼마 전 친한 지인이 정신과를 찾았다. 그녀는 우울하다기보다 무기력감을 너무 많이 느낀다기에 병원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병원에서 그녀에게 내린 처방은, 제 때에 밥을 먹으라는 것이었다. 평소 생활 패턴이 불규칙한 편이던 그녀는 식사 시간에 맞춰 밥을 먹기 보다는 배가 고플 때 챙겨먹었다. 의사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남자친구 사귀어본 적 있죠?”

“네.”

“그럼 그때 연락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참고 또 참다가 연락했어요?”

“아니요, 평소에 했죠.”

“마찬가지에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제 때에 밥 주죠?”

“그럼요.”

“마찬가지에요. 강아지도, 남자친구에게 하는 연락도, 그리고 본인한테도. 이건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처방이 내려진 거랬다. 의사는 그녀에게 규칙적인 식사부터 연습할 것을 권했다. 잠도 피곤해서 자는 게 아니라 잘 때가 되면 자는 거랬다. 사실 직장 생활을 하지 않기에 피곤할 때까지 깨어 있다가 잠이 드는 나 역시도 이 얘길 전해 듣고는 속으로 무지 뜨끔했다.

그녀를 보며 나 역시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다시 어린 아이로 돌아가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삶을 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난 사랑에 대한 글을 정말 많이 썼었다. 기승전 ‘사랑’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정원 가꾸기>같은 어느 외국 리빙 잡지에 나올 것 같은 제목의 칼럼도 썼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같은 계절의 글인데도 작년보다 더 바삭, 아니 메마른 느낌의 글이 많다. 난 사랑하고 있지 않다. 기도도 하지 않는다. 먹는 것만 더럽게 잘 먹을 뿐.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고대 어느 나라의 속담(?)이 있다. 난 분명 건강하지 않은 신체를 가진 게 분명하다. 그러니 건강한 정신을 가지지 못하는 거다. 물론 무지 건강하기만 한 것들은 매력이 없다. 그러나 어떠한 욕구를 가지기 위해서 최소한 어느 정도 건강해야하는 것은 맞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중에서

우린 왜 날씬해지려고 하는가? 건강해지려고? 아니 우리 솔직해져보자. 사랑받기 위해서다. 음식이 나의 식탁에 오기까지의 과정들을, 거기에 조금이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면 우린 식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랑받기 위하여 기꺼이 맛있는 음식들을 포기하며 우린 스스로를 학대해오기도 하지 않았나!

...방금 우리가 주문한 피자로 인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난 이 피자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실제로 이 피자도 날 사랑해줄 거라고 믿는 환각 상태에 빠져버렸다. 나는 이 피자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거의 불륜이나 다름없는 연애를.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 중에서)

이전에 몸이 좋지 않아 한의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한의사는 나에게 ‘섭생’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내 체질에 맞는 삶을 살아오고 있지 않다는 얘기였다. 내 체질에 맞는 섭생이란 이러했다. 육류보다는 해산물을, 뿌리채소보다는 잎채소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운동 역시 뛰는 것보다는 걷는 운동을, 근력 운동보다는 유산소를, 등산이나 요가보다는 수영이 좋다고 했다. 단지 섭취하는 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이 놀라웠다. 

이후 한의원에서 받아 온 종이를 냉장고에 붙여두고는 속는 셈 치고 내 섭생에 맞게 먹어보았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건강은 빠르게 좋아졌다. 그리고 내 섭생에는 맞지 않지만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 이를 테면 술이나 근력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당시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했던 것 같다. 요즘은 뭘 해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가장 최근 언제 기도했는지 기억해본다. 다행히(?)도 바로 어젠가 그저께였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기도였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지인이 좋은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내가 보아 온 그는 늘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그 곳에 가서는 애쓰지 말고, 힘든 건 힘들다고 말하며 살길 기도했다. 이전의 기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나의 삶에 대하여서는 별로 기도할 만한 게 없었나보다. 그만큼 가슴을 들썩이게 하는 무언가가 없어서였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알게 하는 그 순간까지 다다르고 싶지 않다. 나에게 그것은 몇 년 전이었는데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가 오기 전에 미리 서둘러 먹고 기도하고 사랑할 것이다. 제 때에 맞춰 먹고, 사사로운 것들에 감사하는 기도를 올릴 것이다. 스쳐가는 것들도 스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겨울이 다가옴에, 바람이 쌩쌩 불어 스치는 걸 거다. 눈길로 따스히 잡아두어 그것들을 사랑하겠다.

“Manners maketh man.” 매너(예의)가 사람을 만든다.

오, 정말 그런 것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 자신에 대한 예의. 그것부터가 우선이 되어야겠다. 사람다운 삶을 위하여, 행복한 삶을 위하여.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