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가을서리 내리기 시작할 즈음의 궁궐은 서울 도심에서도 제대로 된 가을단풍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창덕궁 후원에는 160여종의 다양한 나무들이 있으며 이 가운데 70여종이 3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후원 단풍은 후원 입구 함양문에서 부터 화려함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후원 입구의 농익은 단풍들의 잔치

사람들은 어딘가에 자신들의 삶의 흔적을 그림이나 글 등으로 남기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갖고 살아간다. 선사시대 한반도에 살았던 인류는 바위에 여러 종류의 동물과 인간, 그리고 다양한 기하하적 문양을 새겨놓았다. 국보로 잘 알려진 울산광역시 태화강가 절벽의 암각화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러한 욕망은 후원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암각서(巖刻書)”는 바위에 새긴 글씨로 문인들이나 학자들에 의해 쓰여 진 것이 대부분이다. 후원에는 정자 편액이나 시문에 관련된 글씨를 자연스럽게 암각 할 수 있는 단단한 화강암 계통의 너럭바위와 절벽이 몇 군데 있다. ‘옥류천’(玉流川)과 ‘빙천(氷泉)’, 신선원전 구역의 단단한 바위들이다.

인조 14년(1636)에 조성된 ‘옥류천’ 일원은 후원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으로 관람지에서 깔딱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매우 더운 여름철이나 추운 겨울에는 관람객의 안전을 위하여 관람이 종종 제한된다.

여기에는 소요암과 상림삼정(上林三亭)으로 불리는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그리고 농산정, 취한정이 자리 잡고 있다. 소요암(=위이암)에는 평평한 암반에 홈을 파서 구불구불한 물길을 내놓은 곡수거(曲水渠)를 설치하여 당시 상류사회에서 즐기던 놀이문화로 술잔을 띄워 연회를 즐기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수직바위에는 게판 형식으로 오언절구가, 아래쪽에는 인조어필이 편액 형식으로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라는 뜻의 “옥류천(玉流川)”이 각자되어 있다.

해설사들은 궁궐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무엇이든지 박학다식하게 공부를 한다. 때로는 시 한 편 정도는 필히 외워서 해설을 하여야 할 경우도 있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1690년 소요암의 암각서 숙종 어제 시다.

옥류천의 소요암, 유상곡수, 폭포 / 우측 상단: 동궐도 옥류천과 소요정

“비류삼백척(飛流三百尺) 흘러내리나니 물줄기는 삼백척(80m)이요,

요락구천래(遙落九天來) 아득히 구천 저 멀리에서 내려오는구나.

간시백홍기(看是白虹起) 잠시 머물러 보고 있노라니 흰 무지개 일어나고,

번성만학뢰(飜成萬壑雷)“ 물 넘처 흐르는 우레 소리가 골짜기에 가득 하도다”.

 

처음 해설을 하던 어느 날 위 시를 옥류천 주위의 경관을 약간 과장하여 지은 시라고 소개하는 과정 중에 ‘비류삼백척’을 ‘비류삼천척’으로 해설하는 실수를 범했는데 이를 다음 장소로 이동하던 중 알아차리고 정정해준 경험이 있다.

동궐도상에는 “물소리가 아름답게 울리는 곳”이라는 의미의 천성동이 있다. 이곳은 궁궐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해방 후 ‘빙천(氷泉)’이라고 쓰인 각자 때문에 ‘빙천’으로 명명되었다고 하며 70년대에는 주요 관람 장소로 개방되었다.” 이곳은 민간 신앙과 관련된 시설이 갖추어진 곳으로 정상 쪽에는 ‘능허정’이, 주위에는 ‘암각서’가 있다.

동궐도의 천성동 예필과 암각서 (현재의 빙천구역)

이곳 지명을 세자가 쓴 글씨인 예필로 천성동이라고 각자되어 있다.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며 ‘시불(詩佛)’이라는 자연시인 왕웨이(王維)의 ‘산골 집의 가을 저녁’이라는 오언율시 “산거추명(山居秋溟)”에 있는 글 중 세 번째 네 번째 구가 새겨져 있다.

 

“明月松間照(명월송간조) 밝은 달빛은 소나무 사이를 비추고,

淸泉石上流(청천석상류) 맑은 샘물은 바위 위를 흘러내리네.”

 

이곳의 암각서는 동궐도상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현재 위치와 각자 상태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미공개 보호구역으로 묶여있다. 이 각서의 예필은 두보(杜甫)와 왕웨이(王維)를 좋아했던 효명세자가 영향을 받아 각서 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현재 미공개 지역인 후원 깊숙한 곳에는 과거 궁궐을 수비하고 임금을 경호하였던 북영(北營)이 있었던 곳으로 ‘신선원전’과 ‘몽답정’, ‘괘궁정‘이 위치하고 있다. 몽답정은 편액을 직접 정자에 걸지 않고 정자 뒤 자연바위 하단에 음평각(=글자의 테두리를 음각으로 파내고 파내어진 바닥면을 평면으로 고르는 서각 방법)으로 ‘꿈길을 밝고 간다’는 의미의 “夢踏亭”을 새겨 놓았다.

몽답정 / 우측하단 : 바위에 새긴 몽답정 편액

조선은 청, 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침략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팔도 여러 곳에서 ‘괘궁정’이라는 편액을 걸어둔 정자가 발견된다. 괘궁은 ‘활을 걸어 놓는다.’라는 의미며 괘궁정은 활쏘기 연습 장면을 지켜보는 정자다. 신선원전 구역에 위치한 괘궁정은 자연적인 바위에 편액을 각자한 것이 특이하다.

괘궁정 기단부와 자연바위에 새긴 ‘괘궁정’ 편액

조선의 왕들 중에서 활쏘기 실력이 출중했던 정조는 평소에도 신하들에게 군사훈련을 자주 시켰다. 규장각에서 각신으로 근무하던 정약용이 활쏘기 실력이 형편없자 북영에서 열흘간 연습 시키면서 지켜보았다고 한다. 태평성대일수록 적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활쏘기와 같은 훈련을 수시로 했던 것처럼 국가안보를 위한 유비무환의 정신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창덕궁의 가을단풍 속에 감춰진 암각서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고 미공개 된 부분도 다수 있다. 후원의 암각서는 문화재 보호라는 측면에서 특별 관리할 필요성도 있지만 천성동 구역의 경우는 과거 70년대 국민들에게 공개했듯이 국민공유라는 측면에서 잘 준비하여 빠른 시일 내에 일반에게 공개했으면 한다.

후원 가을 단풍 향연의 으뜸은 관람지와 그 주위를 둘러선 정자들의 어울림이다. 수령 250년, 높이 22.4m, 둘레 5m의 창덕궁에서 가장 나이 많은 존덕정 뒤 은행나무가 가장 늦은 단풍잎들의 향연을 펼치게 된다.

가을의 후원 노란 은행나무 잎 가득한 존덕지 / 촬영 : 길라잡이 이한복

늦가을 연못 위로 노란 은행잎들이 자유낙하 비행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존덕지 위로 저마다의 얼굴을 내미는 모습은 색동옷 입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 같아 그 또한 예쁘다. 11월 둘째 주. 노란 은행잎들이 연출해 내는 환상적인 가을단풍의 향연이 펼쳐지고 암각서가 있는 이곳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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