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츤데레. 오다가도 꽃을 주워서 오는 남자, 버릴 건데 너 가지라며 여자 옷을 건네는 남자, 개도 안 걸리는 여름감기에 걸리냐며 감기약을 집어 던지- 아니 툭 하니 내미는 남자... 나도 한 때는 좋아했었다.

츤데레. 그 속성에 대해 한국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으나 ‘마초형 새침데기’ 정도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어원은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일본어에서 왔다. ‘새침하고 퉁명스러운 모습’을 뜻하는 츤츤(つんつん)과 ‘부끄러워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레데레(でれでれ) 두 의태어가 합쳐진 것.

사진 1 = 영화<미녀와 야수> 중에서

현대 서양의 멜로물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매체에서 보여주는 남자 주인공들은 이른바 ‘츤데레 성향’이 강한 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드라마’에서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는 거다. 드라마, 주 시청 성별이 ‘여성’인 매체다. 요즘 국내에서 제작되는 드라마들은 다양한 장르와 소재를 다룬다. 

하지만 예전에는 전형적인 멜로물이 주를 이루었다. 여기엔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선호하는 남성상이 그려지기도 했다. 물론 이야기의 흐름 역시 여성 취향을 따랐으며, 지금 사회적 분위기에선 조금 불편할 정도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주를 이루었다. 말 그대로, ‘판타지’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성 중 하나는, 칭찬을 다룰 줄 모른다는 것이다. 캐주얼한 칭찬을 건네는 것에 인색한 편이기도 하지만, 칭찬을 받았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른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오래된 통념을 넘어, 정말 이것을 다루는 것에 대해 어색해한다. 그래서 츤데레가 잘 먹히는 것 같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보이면서도,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츤데레들에게 큰 매력을 느꼈었는데, 그건 내가 ‘보편적인 한국인’이라서- 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가정환경이 꽤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어릴 적 나의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아빠는 평소 애정 표현을 잘 하시는 분이었으나, 칭찬에 있어서는 조금 인색하셨다. 환경상 내가 조금 더 독립적으로 성장하길 바라셨던 아빠는, 내가 무언가를 혼자 해내었을 때 매우 기특해하셨다. 

사진 2 =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였던 에리히 프롬(1900-1980)

이후에 나는 어느 책(아마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었던 것 같다)에서 부정 父情에 대한 더 놀라운 비밀을 발견했었다. 생물학적으로, 어머니들의 사랑 표현은 ‘무조건적’에 가깝기 쉽다는 것. 왜냐하면 자신의 몸에서 자식이 분리되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한 일부라고 느끼기 더욱 쉽다는 것.

반면 아버지들의 사랑 표현은 좀 다르다. 아버지들- 그러니까 남성들의 세계는 예전부터 ‘결과물’로 평가를 해왔었다. 그들이 그런 체계에서 자라왔기에, 자식에게도 성과나 결과에 대해 칭찬하고 표현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모정과 부정, 어느 것이 더 강하다- 약하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자녀가 잘 자라는 데 있어서 이 두 사랑 표현 방식 모두가 필요하다. 다만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의 경우, 이런 식의 애정 표현 방식이 더 익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진 3 = 구스타브 클림트의 <여성의 세 시기>

그런데 어제, 지인들과 저녁을 먹다가 아는 오빠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신 역시 지금껏 여자친구들에게 ‘츤데레’적인 남자친구였는데... 실은 그게 자기변명이라는 게 아닌가? ‘나는 츤데레야’라고 그는 말했고- 여자들은 그저 표현이 인색한 남자들에게 ‘츤데레’라는 장르물 적인 이름을 건넸다는 거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다- 정말 금방 공감해버리고 말았다. 

사실 지금의 나는 ‘츤데레’들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정말 그의 말처럼, ‘표현이 인색한’ 성격의 보유자라는 데에 더 초점이 쏠린다. 예전에는 ‘그가 챙겨준다’라는 것, 또는 ‘애정 표현을 하고 싶어 한다’는 속내에 집중했었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이른바 ‘츤데레’적 표현을 하지 않을 때에도- 그러니까 ‘츤츤’거릴 때에도 ‘저 안에는 나에게 애정표현을 하고 싶어 하는 욕구와 사랑이 존재 한다’고 감히 추측했었다. 

그런 내리짐작이 가능했던 것은, 여성과 달리 남성의 경우- 말보다는 행동으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습성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매번 표현하는 것은 아니니- 그저 내리짐작이 맞았던 거다(...) 하긴 뭐- 사랑은 처음에 다 호기심과 상상으로 시작되어서, 오해와 오해의 오해에 오해로 끝나기도 하니까. 어떤 츤데레들에게 난, 나에 대한 애정이 식었음을 츤츤거리고 있다며 오해했던 것이다. 나는 지인인 아는 오빠의 자기 고백이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고- 명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츤데레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학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심리학적으론 여기에 ‘득실효과’를 제시할 수 있다. 득과 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득(보상)’이 될 만한 사람에게 호감을 드러낸다. 여기에 재미있는 특징은, 항상 좋아해주는 사람보다 처음에는 무관심하다가도 점차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끌려한다는 것.

사진 4 = 구스타브 클림트의 <키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맞는 얘긴 것 같다. 남녀를 떠나 생각해보자. 초등학생 시절, 하교 길에 동네 교회에서는 휴지를 자주 나누어주었었다. ‘누구나’에게 ‘득’을 주었다. 물론 감사한 마음이 있지만- 이 휴지 자체가 매력적이거나 희소하게 느껴질 리 없다. 그와 경제적으로 균등한 가치를 가지는 공책을 생각해보자. 그 당시 학교에서 착한 일을 하면, ‘상’이라는 도장이 찍힌 공책이 상품으로 주었었다. 500원 짜리 공책은 누구나 문방구에서 살 수 있었지만, ‘상’이라는 도장이 찍혔다는 건- 수상자에게만 허락된 영광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보상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질 수 밖에.

득실효과는 ‘점진적’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처음부터 잘해주는 것보다 점진적으로 잘해줄수록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이전의 보상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교환이론에 의하여 상대방에게 들이는 비용(노력, 사랑, 그 외의 모든 것...)에 비하여 내가 얻는 보상이 없다고 느낄 경우에, 관계는 종결되기 쉽다. 
‘츤데레’인줄 알았던 그가- 츤데레는 과거형일 뿐, 지금은 나에게 애정이 식은 거구나! 깨닫는... 뭐 그런 흔한 상황인 거다.

사실 나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학구적으로 쓰고 있는 내 자신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 자체로 너무도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었으면 한다. 물론 학술적인 이론들은 매우 논리적인 ‘이론’일뿐, 우주만큼 복잡한 사람 마음을 어찌 다 서술하겠는가! 독자 여러분 역시 그것을 아시리라는 전제 하에 쓰긴 했지만, 그래도 썩- 내키지가 않는다.

다만 사실 어떤 감정이나 행동, 가졌던 마음에 대해 이랬다- 저랬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현재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과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중요한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 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 저렇게 이성적인 어투의 학술 연구 자체도... 
‘저 사람이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
‘도대체 사랑이 뭔데 날 이렇게!’라는 매우 나약하고 인간적인 질문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다소 주관적이면서도 따수운 나의 추측을, 열풍선 같이 불어넣어 이 글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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