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서부터 신은 나에게 사과 하나를 주었다. 그 사과의 이름을 불안이었다.
삶이란 이 사과를 모두 씹어 먹어야 하는 것이다. (2007년 어느 날 나의 일기 중에)

[공감신문] 대단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 집 밖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집에서 휴대폰 속을 들여다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어린 나이에 이미 많은 돈을 벌어 남부러울 것 없이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젊은 시절 많은 걸 일구어 놓은 데다 자기관리를 잘해서 20대 뺨치는 피부와 몸매를 유지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 중 일부는 무언가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20대가 20대다워 보이지 않아서, 또는 외모는 무지 동안인데 뭔지 모르는 노련함이 느껴져서 그랬다. 위생부터 조리과정 하나하나 모든 것이 완벽했던 요리에서 단 하나 마지막, 플레이팅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랄까. 그 마침표는, 눈빛이었다. 그게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918

요즘은 정말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외모가 동안인 사람들이 많다. 외모가 자기관리의 큰 부분으로 여겨지며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기 엄마들은 처녀 때보다 훨씬 열심히 몸을 가꾸어 피트니스 대회에 도전하기도 한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20대이지만 과연 그녀들의 눈빛도 그럴까? 아니다. 그녀들 눈빛엔 여유로움이 있다. (이러한 대조가 굉장한 관능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20대의 눈빛은 영락없이 불안하다. 대부분이 이러하다. 당연하다. 20대엔 답이 없는 게 ‘평범’한 것이다. 약 20년 가까운 시간을 가족과 학교, 사회의 보호 아래에 살았으며 해야 할 일과 목표도 대부분 정해져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는 다르다. 자유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책임이 생긴다. 앞으로 몇 십년동안 ‘성인’으로 살게 될 텐데, 이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학습하는 시간이 바로 20대다. 

우리는 가끔 무모한 행동을 저지른다. 특히 불안할 때 더욱 그럴 수 있다. 뭘 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을 때 ‘질러보자’가 될 수 있다. 심지어 20대엔 더욱 이런 충동질이 쉽다. 왜? 비교적 잃을 게 없어서 그렇다. 그렇게 저지른 경험에 무언가를 깨닫게 되면 마치 인생을 다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가 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고... 이렇게 불안함과 무모함이 점철된 시간이 20대다. 20대는 이러한 눈빛을 숨길 수 없다. 제 아무리 안 그런 척 해보려 해도 어쩔 수 없다. 진심은 읽히는 법이니까. 

영화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그래서 어색해보였다. 자기 또래 평균에 비해 화려한 삶을 즐기는 이들 중에는 그런 불안한 기색을 감추려들려는 사람들도 꽤 많다. 자신이 사는 집과 타는 자동차가 그런 불안함엔 어울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20대’가 불안한 데 비해 자신은 모든 면에서 여유로워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SNS에서 보아 온 몇몇에게서 감히, 불안한 눈빛을 읽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근데 불안함이 왜 나쁜가. 왜 숨기려 드는가. 20대엔 그게 당연한 건데.

나이를 떠나 아무리 성공한 사람이라도 불안할 수 있다. 무모하진 못해도. 오히려 잃을 게 많을수록 더욱 불안해질 수 있다.

불안함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생각해보면 난 10대 때 정말 많이 우울했고 아슬아슬했던 것 같다. 당시 썼던 글들을 통해 ‘나’를 돌이켜보면, 조금만 툭 건드려도 부서질 것만 같더라.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고 2때, 난 미니홈피 비공개 게시판에 이렇게 썼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은 나에게 사과 하나를 주었다. 그 사과의 이름은 불안이었다.
삶이란 이 사과를 모두 씹어 먹어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열 여덟 살 때 무엇이 날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었던 걸까. 꿈? 그것도 아니었다. 난 당시 하고 싶은 일이 뚜렷했었다. 곧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도 불안함을 갖고 있지만, 저만큼의 경지(?)에 도달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The Son of Man, 르네 마그리트 1964

불안하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이다. 젊은 날 불안함을 유독 많이 느끼는 건? 살아갈 날이 더욱 많기에 그러하다. 요즘 노인들이 옛날 노인들보다 불안한 것 역시, 대비해야 할 앞날이 몹시 길어졌기 때문이다. ‘불안함’의 대상들은 이처럼 앞으로 찾아올 시간들에 놓여있다. 이후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이 우리를 긴장하게 만드는데 아무래도 어린 나이일수록 살아갈 날이 훨씬 많으니 불안함이 큰 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성숙해지면 이런 불안함이라는 감정에 조금은 익숙해진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눈앞에 일들에 열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책임감의 무게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해내지 못했을 때 더욱 큰 불안감을 느끼게 될 거라는 걸 잘 안다. 사회에서 웬만한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그게 실력이고 그 사람의 인성이라고 판단한다. 우선 해야할 일들이 많지 않을뿐더러 책임의 무게가 적은 20대는, 할 일이 있으면서도 이게 맞는지 묻고 또 되물을 수밖에. 

나약한 짐승이 맹수 앞에서 벌벌 떠는 불안함과는 다르다. 그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도 우린 충분히 어린 시절을 불안해하며 보낸다. 그 눈빛은 굉장히 역동적이다. 삶을 삶으로서 흠뻑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니까. 나태할 땐 하염없이 나태해지고 열정적일 땐 한없이 열정적이며 무모해질 땐 밑도 끝도 없어진다. 

우리는 삶을 삶처럼 살아갈 때 이처럼 불안하고 긴장을 하며 신경질적이 되거나 감격한다. 한없이 예민해진다. 마치 타인의 삶을 지켜보듯 수수방관한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에단호크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젊은 여배우가 분장실에서 대기 중인 베테랑 연극배우 사라를 찾아간다. 공연 전에 사라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사라를 본 젊은 여배우는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한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너무 긴장하신 것 같아요. 저는 왜 연기할 때 긴장이 안 될까요?”

그러자 사라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이렇게 말했단다.

“가엾기도 해라. 연기를 잘하게 되면 긴장하게 될 거예요.”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중에서

무대에 서는 이들은 늘 그 순간 가장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상대 퍼포머의 미세한 호흡과 움직임과 소리, 음악과 조명, 관객의 반응, 그리고 자신의 내적인 변화까지 그들은 고스란히, 여과 없이 느낀다. 긴장한 상태가 되면 그렇게 된다. 그러니 그 순간은 어느 때보다 살아있는 상태가 아닐까.

불안한 감정이 지배적일 때, 어느 철학자의 이야기나 강의를 보며 잠시나마 그걸 떨쳐내고자 했었다. 물론 그리되더라도 오래가진 않더라. 잔인하지만 시나 소설 영화 따위를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당신 역시도 불안이라는 사과를 씹어 먹고 있구나 싶어 위안을 받았었다. 사과는 그대로였다. 

불안이라는 사과를 씹어 먹을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당연한 것만 같은 ‘앞날’이 주는 무게를 통렬히 느끼게 된다. 이 사과는 모두 나의 몫이므로 내가 다 먹어야한다. 어쩌면 아직 나에게 남은 사과 덕분에 어딘가 무모해보이면서도 역동적인 눈빛을 가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많더라도 그렇게 큰 사과를 가진 이들은 그러하더라. 얼굴에 아무리 주름이 져도 그 눈빛은 숨길 수 없다. 그렇다면 난 평생을 그렇게 살고 싶다. 신이 나에게 준 사과를 야금야금 아껴 먹을 생각일랑 없다. 난 그렇게 겁쟁이가 아니니까. 

불안함을 느낄 때엔 그게 ‘사과’라고 생각하시라. 삶은 이걸 다 먹어내는 거라고. 당신의 몫이라고. 중요한 건 당신에겐 하나의 사과만이 주어져있을 뿐이다. 온전히 당신만의 것이라면 남 주지 말고 다 먹어치우시길 바란다. 꼭꼭 씹어 넘겨야 탈이 나지 않는다. 분명 그 열매는 달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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