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여러 매체에 연애 칼럼을 썼었다보니 메일박스에 독자들의 관련 고민이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대게 세 가지의 시제(?)로 나눌 수 있겠다. 그 사람도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요? (전), 그 사람과 다시 잘 해볼 수 없을까요?(후), 그리고 마지막, 그 사람이 바람을 피웠어요. (ing)... 뭐, 여러 고민 사연들이 오지만 대부분은 이런 맥락이다. 오늘은 바람, 즉 외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고민자는 혼란스럽다. 그게 과연 단 한 번의 실수였던 건지 아니면 습관인건지. 또 고칠 수 있는 것인지. 

사진= 영화 <S러버> 중에서

나는 연애를 엄청 잘했었기에 연애 칼럼을 썼던 게 아니다. 단지 글을 쓰는 입장이다 보니 연애뿐만 아니라 여러 인간사에 관심이 많고 깊게 보고자 하는 편이다. 그게 어느 정도 습관이 된 것 같다. 내 연애는 못하면서 남 연애는 참 잘 본다. 

인간史라는 것이 재미있는 게, 모두 관계 속에서 벌어져왔다. ‘인간’이라는 단어 자체도 사람 인, 사이 간.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뜻 아니던가.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동창, 이웃, 사제... 그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단연, 남녀사이다.

우린 사랑에 빠지면서부터 겁을 먹는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은 말이 쉽지 정말 힘들다. 누구나 다 시련을 겪어봤기에 돌다리를 자꾸만 두드리고 또 두드려보려 한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당신은 그 다음 돌다리로 뻗은 발에 물이 차고 있음을 말해줄지도. 

바람을 피우는 연인을 둔 이들 역시도 처음부터 신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거다. 상대방이 믿음을 보여줬기에 관계를 맺게 됐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열고 믿음을 주었는데, 상대방이 바람피우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 배신감과 모욕감,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상대방이 보이는 데에서, 또 보이지 않는 데에서 너를 사랑했던 나의 마음들과 그 에너지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네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에 그건 진심이었을까, 그에게 기만당한 것인가에 대한 모욕감. 그리고 내가 알던 이의 모든 것이 진실하지만은 않았으며, 내가 알던 그 사람의 또 다른 면모를 알게 된 것에 대한 배신감. 누구라도 커다란 상처를 받아 이성을 잃고 자존감을 하락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일 것이다.

그래도 사랑한다면 우린 한 번 더 믿어보고 싶다. 사랑해서? 혹은 그 동안의 사랑이 아까워서 그러하다. 

그래서 얼굴도 본 적 없는 제 3자인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용서하고 한 번 더 믿어도 되는 지 아니면 이 사랑을 이대로 놓아버려야 하는 지. 대부분은 내가 ‘놓는 것이 맞을 거예요’라고 말해도 듣지 않는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나의 답변은 결과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난 그가 혹시나 불행히 다음에도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조금 더 현명한 답을 내리길 바라며 답장을 쓴다. 

사진= 영화 <S러버> 중에서

바람은 습관일까? 나는 바람의 패턴을 묻는다. 상대방이 바람을 피우는 대상이 한 명인지, 혹은 여럿인지 그게 가장 중요하다. 이건 바람을 피워본 적이 있어서 죄책감을 가져 본 이들도 주목해야할 이야기다. 왜 바람을 피우는 지 조금은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 곁에서 사랑과 믿음을 주는 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줄어들지도 모를 테니.

상대방이 만일 한 명의 대상과 바람을 피운다면 이것은 습관이 아닐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돌아올 확률이 크다. 대신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한 명의 대상과 꾸준히 바람을 피우다보면 그들 사이에 대화와 섹스는 늘어만 갈 것이다. 그들 사이에 교감과 비밀이 생긴다. 서로만의 대화 패턴이 생기고 서로가 서로를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해진다. 이를 테면 내가 야 하면 너는 예! 한다, 뭐 이러한. 

이럴 경우에 그들을 떼어놓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선택권은 바람을 피운 상대방에게 주어진다. 이미 두 개의 관계가 다 지속되어버린 이 시점에, 그는 누구에게라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애정의 크기가 어디가 더 크고 지속가능할지 판단해야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 경우는 바람을 피우게 된 상대방이 무지 심각하게 매력적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원래 연인에게 이전과 같은 애정을 느끼지 못해서 일이 벌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 회복이다. 그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애정이 회복되어야 또 다른 참사(?)를 방지할 수 있다. 평소에 서로에게 무엇이 불만이었는지 감정적이지 않은 대화로 풀어낼 필요가 있다.

사진= 영화 <S러버> 중에서

반대로 애정 전선과는 관계없이 바람을 피우는 이들도 있다. 이는 습관적이며, 대부분 다수의 이성과 바람을 피운다. 자신의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고 두 사람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바람을 피운다.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받고 싶어서 저런다. 무슨 얘기냐고?

착실한(?) 연애 상태에 들어가면, 오히려 이들은 견디지 못한다. 오로지 누구만의 연인, 누구의 남자친구 혹은 여자 친구가 된 스스로가 낯설기만 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난 오로지 저 사람에게만 매력적일까?’

이런 위험한 호기심에 빠질 때, 마침내 그들은 게임을 시작한다. 연인과는 다른 타입의 이성들에게 접근하여 매력을 발산한다. 내가 이들에게도 ‘먹히는 지’ 궁금한 것이다. 연인과 같은 사람이 나에게 충실한 사랑을 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즉, ‘나는 내 연인 같은 타입의 이성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며 저들이 나의 어떤 면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여기에는 오류가 있다. ‘연인 같은 타입의 이성들’이 아니라 연인 단 한사람이 그를 사랑해주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착각에 빠진 이들은 연인과는 굉장히 상반되거나 다른 타입의 이성에게 자신의 매력을 확인 받으려 한다. 그렇기에 당연히 바람을 피우는 대상의 외모와 직업, 나이 대는 다양해질 수 밖에. 이런 경우라면 연인이 충실한 사랑을 주면 줄수록, 바람기는 걷잡을 수 없이 되어버릴 것이다. 습관이다. 못 고친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부류들은 대부분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복지와 경제, 편의 시설 등 모든 것이 완벽한 나라에 성공적으로 이주했으면서도 ‘난 자랑스러운 이 나라의 국민입니다’라고 오랫동안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게 자기 정체성의 대부분이 될 거 같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꾸며내는 하나의 형용사가 자신을 지배할 수도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온전히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자꾸만 눈을 돌리는 것이다. 

사진= 영화 <S러버> 중에서

이들의 자존감이 높다고 할 수 없다. 타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어야만, 타인으로부터 매력을 인정받아야만 자신이 오롯하게 서는 기분을 느끼기에. 그런 타인들이 많아질수록 당연히 높은 자존감의 회복을 느낀다. 그들에겐 이것이 게임이다. 이 퀘스트를 다 깼는데 당연히 재도전할 이유는 없다. 레벨은 오른다. 

안타까운 건 이들이 자존감의 회복을 느낄수록, 정작 이들이 사랑하는 연인은 자존감에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는 것. 심지어 바람을 피우면서도 ‘난 널 사랑해’라고 말한다. 그건 맞다. 난 널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내 자신의 존재도 확인받고 싶어, 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잖아. 양심이 있지. 

이런 상대방에게 상처를 받게 되면 당연히 다음 연애가 무척 힘들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는데, 어떻게 건강한 연애가 가능하겠는가. 사랑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사실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우던 이들 역시 근본적으로는 자존감이 회복된 게 아니다. 순간 그렇게 느낀 것 일뿐. 그래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또 이런 상황을 반복한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뼈아픈 결말을 맞이한다. 

한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서로가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은 순간부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두 사람은 이 순간, 약속을 하게 된다. 서로의 관계에 책임이 생긴다.

한 사람만 오롯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힘든 일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연인’이라는 관계에 놓이는 순간부터 인간史가 시작된다. 사건과 사고가 빈번이 일어난다. 여기서 외도는 어느 역사 속 나라들의 전쟁처럼, 빈번하며 희생이 너무도 큰 사건인데다 결국 양쪽 모두 피해를 본다. 

‘바람피우지 맙시다’라고 결론지을 생각일랑 없다. 어차피 피우라해도 안 피울 사람은 안 피우고, 피울 사람은 다 피운다. 대신 책임감 있는 연인의 관계를 맺자고 말하고 싶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유로운 감정이지만 관계 맺는 것은 다르다.

드라마<아내의 조건>에서 극 중 윤서래(김희애 분)와 김태오(이성재 분)는 둘 다 유부남 유부녀의 신분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바람을 피우고 결국, 이혼한다. 이들은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타입들은 아니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그 마음을 외면하고 억눌러 보았지만, 이성보단 사랑의 크기가 훨씬 컸다. 이혼 후 이들이 바로 결혼을 하냐고? 그렇지 않다. 한참 동안 다른 도시에 떨어져 지내며 각자의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고 환경에 적응해간다. 이들 주변에선 ‘그래서 둘이 결혼은 했어?’라고 묻는다. 급한 건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들이었다. 두 사람은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관계를 성립해간다. 어찌되었건 외도의 사실은 잘못되었으나 새로운 사랑에서 이러한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 건 꽤 성숙하게 느껴졌다.

사진= 드라마 <아내의 자격> 중에서

‘너는 왜 연애안하니?’

이런 질문을 곧잘 받곤 한다. 

‘그렇게 연애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관심도 많으면서, 왜 안 해?’

고맙다. 왜 못해? 가 아닌, 안 해? 라고 물어주어서. 

못하는 것도 맞고 안하는 것도 맞다. 사랑에 빠질 만큼 매력적인 이들은 충분히 있었지만 내가 그 관계를 충실히 이어나갈 만큼 확신이 드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나의 즉흥적인 성격이랄까, 이기적인 일상들을 조금 양보하며 사랑할만한 사람은 너무 희귀해서, 감히 좋아하는 티는 엄청 내면서도 연애하자고는 못하겠더라. 

사실 사랑이 어려운가, 사랑하는 과정이 고되지. 원하는 게, 바라는 게, 기대하는 게 커서 그렇지. 그게 다 관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랑하는 관계가, 우리의 기대가 우릴 아프게 한다. 

오늘 글은 외도하는 상대방에게 상처받은 이들보단, 습관적으로 외도하는 이들이 더욱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다. 꼭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확인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그러니 어떤 소중한 사람이 당신에게 믿음직한 사랑을 준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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