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자

[공감신문] 시간 앞에 말없이 무릎을 꿇는 11월, 달 밝은 가을밤 창가에 서면 근원을 모르는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른다. 사방에서 영혼이 앓는 소리가 들린다. 길가에서 연약한 몸으로 가녀린 손짓을 하는 코스모스 행렬, 무리 지어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들국화의 애잔한 미소, 붉게 물든 빨간 단풍잎, 북풍에 황금빛을 더해 가는 노란 은행잎, 청명한 하늘에 낮게 날다가 꽃잎에 살포시 내려앉아 휴식을 취하는 빨간 고추잠자리, 풀벌레들의 합창들이 이제 막 떠났다. 

가을이 없었다면 인간에게 철학이 없었을 것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깊어가는 밤에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치열하게 달려온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나의 정원에서 딴 사과를 보며 회상에 잠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가을이 오면 저절로 보이는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어딜 가나 수북수북 붉은 단풍의 양탄자가 된 푹신한 단풍을 밟으며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란 글을 생각하기도 하고. 가을인 듯, 겨울인 듯 분간이 안 가는 만추의 길을 거닐면서 첫사랑에 애타는 소년, 소녀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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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나는 부전공으로 불문학을 공부했다. 불어를 잘 해서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웠고 불어 시간이 재미있었다. 또 프랑스 시인인 구르몽의 낙엽이라는 시를 참 좋아했다. 나는 사계절 중에서도 유독 가을을 좋아해 가을이 먼저 온 곳을 찾아 먼저 만나러 간다. 혜화동 대학로를 지나다 보면 어김없이 고엽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커피하우스에서든, 몰에서든. 또 한편의 시가 세상을 가득 채운다. 

“시몬, 나뭇잎새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쓸쓸하다/ 낙엽은 덧없이 버림을 받아 땅 위에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석양의 낙엽 모습은 쓸쓸하다/ 바람에 불릴 적마다 낙엽은 상냥스러이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 이리라/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었다. 바람이 몸에 스민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R. 구르몽/낙엽 )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리라' 이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한때 울창한 푸르름을 자랑하기도 하고 노란 자태를 뽐내기도 했던 그 잎새들이 쓸쓸히 낙엽이 되어 이리저리 차이고 있는 것을 보면 울적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나이가 들수록 가을은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과 고백의 시간이 된다. 늙어가는 것이 서글퍼서, 아니면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 또 시인 R 구르몽처럼 낙엽 밝는 소리가 처연하게 들린다.

낙엽의 매력은 무엇일까? 첫째는 봄을 위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다. 생명의 재창조를 위해 나무에 달린 잎새를 털어내는 것이다.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탈 리(脫離)' 나무에 달린 수많은 잎들이 떨어지고 소량의 양분으로 나무는 겨울을 견딘다. 너를 위한 나의 버림, 너의 자리를 위해 나의 자리를 비워주는 마음이 나무의 마음이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희생적인 사랑이다.

그렇게 떨어진 낙엽은 그 나무가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나무에게 따뜻한 이불이 되어주고, 바람의 도움을 얻어 이리저리 밀려가 여름 폭우로 패인 자리, 드러난 뿌리들을 가만히 덮어준다. 따스한 봄이 오고 새싹이 나올 때면 봄비에 자신의 몸을 적셔 이제는 썩어서 나무에게 거름이 되어준다. 기력이 쇠한 나무를 위해서 자신을 썩혀 거름이 되어주는 것으로 비로소 모든 것을 마감하는 낙엽의 일생, 그 매력, 숭고함이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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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잎들은 쇄락부터 죽음까지 연상하게 한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 '낙엽' 중에도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보게 한다'가 나온다. 화려함의 정점 한가운데서 떨어지는 낙엽이니 아름다움과 사라져 가는 쓸쓸함이 공존한다. 다만 누구에게는 쓸쓸함이 누구에게는 아름다움이 각자의 상황에 따라 느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또 누구는 윤회의 한 과정이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치열하게 경쟁하는 건조한 삶이 계속될수록 자연이 주는 울림은 깊고 강하다. 의식주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조건이라 한다면, 감정과 사유는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우리는 자연을 가까이 해야만 삶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가 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에 의해 치유도 되지만 사람에 의해 치유받지 못할 때가 있다. 사람의 힘으로도 안 되는 치유를 자연이 해준다. 그래서 봄에는 봄꽃 구경, 여름에는 바다로 산으로 휴가를, 가을에는 단풍구경, 겨울에는 눈꽃을 보기 위해 떠나는 거다.

누군가가 말했다. "가을은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이루지 못한 게 무엇인지, 그리고 내년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볼 만한 완벽한 시간이다"라고. 

계속 반복되는 계절 중 누군가가 12월을 일 년의 끝으로 설정해 놓았다. 모든 자연이 마치 죽음을 맞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일까? 아무튼 우리는 이제 종점인 겨울을 향해 치닫고 있다. 물빛은 가을빛에서 겨울빛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쿵' 하고 가슴을 친다. 불과 일주일 전에 가을을 찬양하며 들었던 윤도현 씨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점점 낯설어지고 조용필 씨의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노래가 문을 두드린다. 

못내 아쉬워 다홍빛 여운을 남기고 파란 하늘을 지우며 바람처럼 허무하게 사라진다. 가을이 떠난다. 이제 눈부신 봄과 화려했던 여름의 기억, 붉은 단풍의 진한 감동을 훌훌 털어내자. 다시 무채색 겨울로 들어가자. 낙엽을 떨구고 옷을 벗는 나무, 벌거벗은 나약한 그 몸으로 겨울을 견뎌내는 단단한 나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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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말씀으로 일 년 열두 달을 명시한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는 달'이라고 했다. 그렇다. 아름답게 갈무리를 하며 반성과 계획으로 떠나보내고 또 새로운 준비를 하자. 마냥 후회하고 반선하고 탓하기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성취'만을 고집하지 말고 계절 따라 변화하며 새 옷을 갈아입는 자연처럼 진정한 거둬들임과 비움을 생각하자. 천천히 단순하면서도 나의 행복을 발견해내는 지혜를 품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두고 머뭇거리지 말자. 눈부신 봄과 화려했던 여름의 기억을 훌훌 털어내고 무채색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 가을과 겨울의 아름다운 경계에서 모호하게 겹치는 그 비밀의 통로로 들어가자. 

시인 릴케가 노래한 것처럼 잠들지 못하는 사유의 시간에는 오래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자.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내년에는 평생 방랑자가 아닌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아늑한 집을 짓기 위해. 내 안으로 깊숙이 빠져들어 고뇌하고 또 고뇌하여 깨달음으로 바로 서자. 너도 아닌, 그도 아닌 순수한 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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