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영화 <올드보이> 중 오대수)

[공감신문] 로맹가리의 소설<레이디L>(1958)을 읽고 있다. 샤를 드골 장군이 그의 소설 중 가장 좋아했다던 작품이다. 팔순 생일을 맞은 소설 속 주인공은 국가 공익에 헌신한 인물로 알려져 온 국민의 추앙을 받는다만, 사실은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자로 활약했었다. 물론 그 비밀을 꽁꽁 숨긴 채 살아왔었지만. 

예전에 소설<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메리셸리와 그녀의 배경에 대한 연극을 본 적이 있었다. 메리셸리의 아버지는 무정부주의의 시초로 알려진 영국의 철학자이며, 어머니는 여성의 인권을 옹호했던 작가이자 철학자였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자란 메리셸리가 남다른 사상과 가치관을 가지게 된 건 불 보듯 뻔하며, 그렇기에 사후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머나먼 지구 반대편 어느 도시 소극장에서 낯선 동양인들이 무대에 올리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프랑스의 작가이자 외교관이자 영화감독, 그리고 비행사였던 로맹가리(Romain Gary, 1914 – 1980)

로맹가리 소설의 나오는 주인공 레이디L 역시, 아나키스트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나 아마도 메리셸리와는 조금 달랐을 거라 감히 예상해본다.

이 소설 속 레이디L의 지인은 저서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예술은 상처에 붕대를 감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리는 것이라고. 미술관을 돌아보면 예술가의 거짓과 공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고. 루브르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모멸이라고. 민중들의 가난을 위한 오페라란 없다고 말이다. 아마도 그 때엔 그랬던 것 같다. 

그녀는 사실 아나키스트였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몹시 좋지 않았기에, 처음부터 아나키즘을 증오했었다. 그러다가 왜 그녀가 아나키즘 패거리의 핵심이 되었는지는 소설에서 확인하시고(...) 어쨌든 그녀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가진 예술에 대한 인상이 이랬다는 걸 기억하자. 

그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역적>이 떠올랐다. 민초들은 길동이를 따랐다. 길동이는 그들의 영도자이자 영웅이었다. 그러나 임금인 연산은 아니었다. 연산은 생전 예술을 가까이 두고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시(詩)를 남기기도 했으며 그 문장이 수려하다. 두 인물이 이렇게 다르다. 길동은 영웅이지만 예술가가 될 수 없으며, 연산은 예술가이지만 영웅 혹은 영도자가 될 수 없다. 그것들은 그들의 관심 밖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예술 지상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며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 예술가들은 자유를 꿈꾼다고 많이들 생각한다. 사람들은 예술을 사랑한다는 나에게, ‘넌 참 자유로운 영혼이야’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사람이야-보다 강력한 표현이다. 영혼, 넌 뼛속부터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쩌면 근본적으로 나를 더 붕-뜨게 만드는 것은 속박이 아닐는지! 그래서 난 정치적인 철학은 잘 모르겠고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채, 아나키즘에 반대한다. 

속박은 예술가에게 상당히 중요하다. 사실 상당히 많은 예술가들은 속박이라는 조개 속에서 깨어난 미의 조물주들이다. 그들은 그 두껍고 깜깜한 조가비 속을 견뎌야만 했다. 그럴 가치가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역사만 보더라도 많은 고전 문학작품들이 외세의 속박 안에서 탄생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감자들은 옥중에서 많은 일기를 써내려갔다. 전 세계 옥중 혹은 유배일기를 다 모으면 도서관 하나를 거뜬히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2003)에 나오는 오대수 역시 매일 일기를 썼다. 어느 몽상가의 이야기를 다룬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 역시 그런 문학 작품이며, 연인과 이별한-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이들은 스스로를 방에 가두고는 우울한 시인이 되어버린다. 조가비 속에서 깨어날 그 날을 기다리며!

영화 <올드보이>(2003) 중에서

자유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면, 속박은 예술가답게 살기 위하여 필요한 게 아닐까. 아직 로맹가리의 저 소설을 마저 읽지 못한 와중에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아주 오래전에 읽은 소설의 구절이 떠올랐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예술이나 문학을 원한다면 그리스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된다. 참다운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예 제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밭을 갈고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젓는 동안, 시민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시작(詩作:시 짓기)에 전념하고 수학과 씨름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의 의견과 반대되는 것 아니냐고? 속박받는 노예가 아닌 한가로운 시민이 예술을 하는데? 아니다. 내가 말하는 속박받았던 예술가들은 일평생동안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를 ‘맛 본’적이 있는 이들이기에, 그것을 갈망할 수 있던 것이다! 

‘어차피 먹어봤자 내가 아는 그 맛이에요!’라는 어느 몸짱 여자 연예인에 말에, ‘그러니까 더 먹고 싶은 거 아닌가?’라고 대답하고픈 맥락이다. 언제 먹어도 옳은 자유의 맛! 밤에 먹는 치킨이 더 맛있고 속박 속에 먹는 자유의 맛은 더욱 끝내준다. 

영화보다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신상호 최은희 부부의 일화를 다룬 영화<연인과 독재자>에서 인상 깊었던 건, 영화를 향한 북한 김정일의 열정이었다. 그는 대단한 영화광이었으며 수작(秀作)을 만들고 싶어 했다. 부부가 녹음한 김정일의 육성엔 ‘우리도 나갈만한 것들을(만들어야 한다)... 예술대회에 나갈만한 작품이 없단 말입니다’라고 했으며, ‘영화로 서양에 진출해야겠다. 우리는 그러니까 돈을 다 쏟아 붓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신 감독에 대한 기대가 그래서 크다는 겁니다’라고 했다. 

그가 신상호 감독을 얼마나 극진히, 또 아꼈는지 말투만 보아도 느껴지실 거다. 최은희에게는 ‘최 선생’이라는 호칭을 썼다. 하지만 끝끝내 김정일은 그런 영화를 제작하지 못했다. 아마도 속박과 자유, 두 가지가 어우러진 사회가 아니었으므로. 

영화 <연인과 독재자>(2016) 중에서

예술가들이 정치 현안에 많은 목소리를 내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웅이 되고자하는 건 아니다. 예술가들은 대중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아마도 떠나간 동료이자 연인의 모습은 아닐까? 곧 돌아오길 기대하게 되는, 나쁘지 않게 떠난 그리운 동료 혹은 옛 연인. 그들이 남긴 예술품은, 인상 깊은 지난날의 추억처럼 감상자의 겨드랑이 밑에 머물러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예술품에 온기와 영혼이 있어야 한다. 온기는 예술가가 남기는 것이지만 영혼은 감상자가 불어넣는 것이다. 속박될수록, 더욱 뜨거워진다. 남겨야만해! 그래야만해! ... 그렇게 ‘세기의 천재’와 ‘속박된 환경’의 콜라보를 통하여 불멸의 영혼을 가지게 된 예술품이 꽤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예술가들은 무엇에 속박되는가? 예술가들을 위하여 속박이 있어야 하고, 그 전에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자유가 필요하다고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자유? 돈이다. 자유롭게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자본을 원하고 어느 정도의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가 있다. 

A$AP ROCKY <WASSUP> M/V 중에서

실제로 수많은 저명한 대중 예술가들은 많은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며, 누군가는 ‘리스펙’한다고 말한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해서다. 이런 예술가들은 더욱 열심히 작업을 하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한다. 

예술가들은 예술가들끼리만 어울려선 안 된다. 편한 옷차림에 2000만원짜리 시계를 찬 자본가 친구들과도 어울려야한다. 화려한 식사 자리에 초대받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샴페인을 들이켜야 한다. 그리고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끝끝내 이런 생각에 도달해야지, 아- 돈 벌고 싶다! 돈 벌고 싶다! 돈의 노예가 되라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예술적 열망이 벌렁벌렁-해질 정도면 충분하다. 타고난 습성들이 너무 게으르니 이런 장치라도 써야하지 않겠나!

나 같은 경우엔 부자가 되어야지, 라는 마음은 크진 않다. 그저 지금처럼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하기 싫은 자질구레한 일들은 좀 안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은 안 봐도 되고, 내 친구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맘껏 사주고, 한 달에 한 벌 질좋은 옷을 사고, 가끔 제철 식재료의 음식을 좀 즐기고, 맛있는 위스키를 골고루 마시고 싶다. ...아 이렇게 살려면 돈이 훨씬 많이 있어야겠구나. 

당신이 꿈꾸는 삶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고 자유와 속박의 비율이, 거기에 걸맞은가. 이건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물론,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은 자유로움 혹은 한가로움 덕분이다. 난 아직도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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