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의 승자들이 코파카바나 해변 노점상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다

 

[공감신문 김인영 기자] 필자는 1999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방문한 적이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은 세계적인 관광지다. 비키니 차림의 늘씬한 여인들이 해변을 따라 조깅을 즐기는 수백여m의 백사장 대로가 어둑어둑해지면 노점상들로 가득 찬다. 조악하게 가공한 보석류, 가난한 화가의 그림, 싼 웃가지들이 전등불 하나에 의지해 진열됐다. 야시장의 노점상들은 하오 7시가 되면 하나 둘씩 나타나 자정까지 인근의 부유층과 관광객들을 기다린다.

뉴욕에 살다가 귀국해 이곳에서 보석 진열대를 차려 놓은 70대 노인은 “여기에 있는 노점상들은 사실상 실업자”라며 “뉴욕 월가는 수익만 내길 바라지 실업율 따위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세계 금융센터인 뉴욕 월가와 리우데자네이루의 실업 인구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젊은 시절에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이 노인네는 “미국 은행들이 브라질에 빌려준 빚을 받아내기 위해 실업을 강요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 리우 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 야경

 

정치가 말아먹은 경제

20세기말 브라질 경제 위기는 정치 위기에서 출발했다. 사건의 발단은 브라질 2위의 경제력을 보유한 미나스 제라이스 주가 1999년 새해 벽두에 중앙정부에 대해 90일간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것. 이타마르 프랑코 주지사는 1월 6일 “중앙정부 부채 185억 헤알(150억 달러 상당)에 대해 상환을 3개월 유예한다”고 선언, 페르디난두 엔리케 카르도수 대통령의 연방정부에 정면 도전했다.

프랑코 주지사는 카르도수 대통령에 앞서 지난 1992~94년에 대통령을 지냈으며, 카르도수는 당시 재무장관이었다. 프랑코는 카르도수 정부에 늘상 불만을 품어왔다. 부하였던 카르도수가 자신을 밀어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업적인 ‘헤알 개혁’을 카르도수가 도용, 공치사하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비판했다. 그는 정치재개를 위해 주지사에 출마, 당선돼 새해 1월 정식 취임하면서 중앙정부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보냈다. 카르도수와 프랑코의 정치적 갈등은 나라를 수렁에 빠뜨렸다.

두 정치인 사이는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앙숙 관계였다. 프랑코가 미나스 제라이스 주의 상원의원에서 중앙무대에 나선 것은 1991년에 당시 페르디난도 콜로르 대통령이 그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고부터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콜로르 대통령은 부패 혐의로 1년만에 하야하고, 인기 없던 프랑코가 대통령직에 물려받았다.

대통령에 오른 프랑코는 비판 여론을 의식, 1년만에 대통령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으나, 2년을 채웠으며, 짧은 재임기간이었지만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도탄지경에 이르렀지만, 경제에는 무관심했다. 자신에게 여론의 화살이 돌아오면 장관을 갈아치우다 보니 재임 2년만에 43명의 장관이 교체됐다. 대사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 갈아치웠다. 언론과 신문 만평은 프랑코 대통령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좋은 소재감으로 삼았다. 속옷도 입지 않고 미녀 모델들과 춤을 추는 모습, 광대 차림으로 카니발에 참여한 행동등....

여론의 타깃이 되다보니 공보담당 장관이 죽을 지경이었다. 프랑코의 분노를 사 해임당한 루이사 에른디나 공보장관마저 “프랑코보다 더 바보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혹평을 했다. 이에 대한 프랑코의 대답인즉, “내가 저런 여자를 장관으로 지명했다니, 미친 것이 분명하군” 하며 껄걸 웃었다는 일화가 있다.

어쨋든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던 프랑코가 재임중 유일한 업적이라면 카르도수를 재무장관에 임명했다는 사실이다. 카르도수는 이른바 ‘헤알 정책’을 실시하면서 국내외 투자자들의 호감을 샀다. 카르도수의 개혁 정책은 헤알화를 일단 안정시켰으며, 치솟던 물가의 고삐를 잡기 시작했다.

헤알 정책의 성공은 카르도수로 하여금 대통령에 오르게 했다. 이때부터 프랑코는 칼을 갈았다. 그는 “헤알 정책은 내가 했는데, 카르도수가 그 공을 다 차지했다. 카르도수는 내 덕분에 대통령이 됐다”며 증오심을 폭발시켰다.

1998년 그는 민주운동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그 정당은 카르도수의 연임을 지지하며 후보를 내지 않았다. 자신의 정당에서도 물을 먹은 프랑코는 고향인 미나스 제라이스로 돌아가 주지사에 당선됐고, 취임 첫날 카르도수에가 쌓이고 쌓였던 분풀이를 쏟아냈던 것이다.

프랑코의 폭탄 선언으로 타격을 받은 것은 카르도수에 그치질 않고 브라질 경제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해외투자가들은 보따리를 싸들고 브라질을 떠났다.

카르도수 대통령은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냈으니, 다름아닌 헤알화 절하였다.

 

통화절하의 승자는 대형 뱅커

일국의 통화가치가 폭락하면 그 나라는 전체적으로 가난해진다. 달러로 표시되는 GDP와 1인당 국민 소득이 줄어든다. 그러나 모두가 패자는 것은 아니다. 이 와중에서도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

브라질 헤알화 절하의 승자는 월가 은행과 현지 대형은행들이었다. 패자는 전체 국민과 브라질 소형은행, 절대로 평가절하를 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말을 믿고 있던 기업들이었다.

미국의 체이스 맨해튼 은행 브라질 현지법인은 헤알화 절하가 단행된 1999년 1월 한달동안 1억5,000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 이 금액은 자그마치 한해전인 98년 연간 이익의 두배에 해당한다. 뉴욕 월가의 대형은행인 JP 모건도 그해 1월 브라질에서 돈을 쓸어 담았다.

브라질에서 내로라는 투자은행인 방코 마트릭스도 헤알화 절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 은행은 누차에 걸친 정부의 다짐에도 불구, 평가 절하가 단행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 돈을 달러로 바꿔놓았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평가 절하후 한달동안 수익이 한해전의 연간 수익을 4배나 됐다. 몇 년을 땀을 흘려 벌어야 할 돈을 정확한 선견지명으로 한달만에 보충한 것이다. 마트릭스 은행의 로베르토 루만 이사는 “환율 정책이 변할 때 이익이 나는 방향쪽으로 기회를 포착했다”고 말했다.

금융시장은 돈을 놓고 돈을 먹는 투전판이다. 은행이라고 다를바 없다. 은행은 다른 투기자보다 많은 정보와 판단력을 보유하고 있고, 또한 엄청난 판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두번 지더라도 상대방을 꺾을 수 있는 기회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은행이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자금력이 약한 중소 은행들은 대부분이 경제위기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헤알화 절하 게임에서 리우데자네이루의 방코 폰테 신담 은행은 정부를 신뢰하다 망한 케이스다. 이 은행은 절대로 헤알화가 절하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 헤알화를 달러로 환전하는등 헤지를 하지 않고 있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파산직전에 몰린 이 은행은 얼마후 프랑스 은행에 팔려나갔다.

경제 위기는 가난한 국민들로 하여금 길거리로 내몰지만, 월가 은행들과 브라질 대형은행들에겐 특수를 누리는 기회를 부여한다.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현상이 가중되고, 경제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 글로벌 금융시장이 창출한 결과다.

그러면 대형 은행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브라질 좌익 야당은 정부가 평가 절하를 단행하기 이전에 몇몇 은행들에게 이 사실을 흘렸고, 은행들은 내부 정보를 이용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야당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었다. 금융계 동향을 잘 이해하는 뱅커라면 헤알화 절하가 시간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가 은행과 브라질 은행들은 두가지 방법을 썼다. 첫 번째가 평가 절하에 대비, 달러로 전환해 두는 것이고, 둘째가 파생금융상품의 일종인 통화 선물 계약을 체결해두는 방법이이다. 브라질 정부는 외채 상환을 위해 달러 표시 국채를 대거 발행했는데, 이 채권을 사둔 은행들은 헤알화가 절하되자 가만 앉아서 며칠만에 높은 수익을 얻었던 것이다.

브라질 은행들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데 익숙해 있었다. 브라질 정부는 1990년대초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채권 발행을 통해 통화를 흡수했었다. 그 채권은 아주 높은 금리가 적용됐다. 은행들은 채권을 대거 매입함으로써 높은 이자 수익을 챙겼다.

금융은 제로섬 게임이다. 따는 자가 있으면 잃는 자가 생긴다. 큰 돈을 번 사람이 있으면 잃는 쪽에선 손실이 커진다. 은행들이 경제 위기에서 큰 돈을 벌었지만, 브라질 국민들 대다수는 가난의 질곡에서 허덕여야 했다.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빈부 격차가 컸다. 정부 통계로 전국민중 상위 부유층 10%의 소득이 하위 빈민층 10%의 44배나 된다. 외국은행이든 현지 은행이든 투전판의 승자들은 코파카바나 해변의 노점상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던 것이다.

 

위기해결사는 헤지펀드 매니저

브라질을 금융위기에서 탈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중앙은행의 아르미니오 프라가(Arminio Fraga) 총재가 꼽힌다. 42세의 젊은 나이에 1억7,000만 인구의 브라질 중앙은행의 총수에 오른 그는 뉴욕 월가에서 펀드매니저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 1999년 브라질이 금융위기 해결사로 초빙한 아르미니오 프라가 중앙은행 총재

카르도수 대통령은 헤알화 절하 직후 구스타보 프랑코 총재를 경질, 프란시스코 로페스씨를 그 자리에 앉혔으나, 금융위기는 조금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카루도수 대통령은 3주만에 월가에서 사람을 데려왔으니, 그가 바로 프라가였다.

프라가는 미국 동부의 명문대 프린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한후 브라질 중앙은행에 잠시 근무한 적이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금융수업을 받은 곳은 뉴욕 월가였다. 그는 월가 투자은행인 살로먼 브러더스를 거쳐 헤지펀드의 거장 조지 소로스 밑에서 펀드 매니저로 활약했다.

그가 중앙은행 총재에 취임한 다음날 금리를 39%에서 45%로 올렸다. 어느 나라건 중앙은행 총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금리 인상이다. 그러나 프라가는 살인적인 금리를 무기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발을 묶어두고, 환율 안정을 위해 어떤 수단을 쓸 수도 있다는 의지를 국제금융계에 확인시켰다. 그후 외국인 투자자들이 브라질을 다시 찾아왔다. 이에 힘입어 프라가는 수차례에 걸쳐 금리인하를 단행할 수 있었다.

그는 국제금융시장의 논리를 아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위기를 간신히 수습했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