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모님.” -영화 <친절한 금자씨> 중 백선생

[공감신문] 사랑한다는 것은 천국을 미리 엿보는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아마도 그들은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천사라지요?”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첫 대사다. 그녀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서 우린 천국에 입장하는 사람의 표정을 미리 엿볼 수 있었다. 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수감자들에게, 그녀는 천국을 엿보게 해주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중에서

그러나 금자는 묻는다. 정말 천사가 있다면, 자기가 그러는 동안 그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고! (...) 이후 13년의 세월을 천사로 살아온 그녀가 마침내 복수를 시작할 때에, 금자는 그녀 안에 천사를 단번에 꺼뜨려버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천국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천사는 존재하지 않았었기에 그녀는 망설임이 없었다. 

여기, 그녀처럼 혐오스러우며 허무한 또 한 명의 천사가 있다. 그 역시도 더 정확하게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엿보게 해준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도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18세기 프랑스에서도 가장 악취가 심한 곳에서 태어났는데, 이름은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였다. 직업은 조향사, <향수>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마 영화나 소설을 통하여 다들 그를 아실 거라 생각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가겠다. 

마침내 그르누이가 완벽한 향수를 세상에 꺼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었나. 카톨릭 신부는 마치 금자씨의 복역 동기들처럼 그를 향해, “천사이시다!”라고 외쳤다. 악명 높은 연쇄 살인마의 최후를 보기 위하여 거기 모인 시민들은, 성호를 긋고 절하더니 그대로 엎어져 그 천사 앞에서 그룹 섹스를 했다. 

사랑에 도취된 카톨릭 신부 역시 에로스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과연 천국의 향기였다. 그 향수를 만든 장본인도 마음 속 그녀에게 사죄의 악수를 건넬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모두 먹어치웠다. 

영화 <향수> 중에서

그르누이의 천재적 후각은 타고난 것이었다. 그는 몇몇 소녀들을 제외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겐 ‘악취’가 난다고 생각했다. 악취의 숙주 같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세상.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떤 냄새가 났을까? 그는, ‘무취’였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 수 있었다. 금자씨가 천국 근처에 가본 적이 없기에 천사였던 것처럼. 나는 놀랍게도 역사적으로 ‘완벽’에 가깝다는 대부분의 것들이 ‘무(無)’의 세계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악성(樂聖),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는 베토벤도 아시다시피 청각 장애인이었다. 그가 역사적으로 길이 남은 건 ‘장애를 극복’해서가 아니었다. 과연 그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무언가 또 다른 이해시스템이 있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대단한 음악들을 작곡했다. 

베토벤이 사용하던 보청기

그가 처음부터 듣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청각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평생 고통스러웠던 베토벤은, 제발 자기 뇌를 해부해서 왜 아팠는지 밝혀달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훗날 그의 머리카락이 경매에 나왔는데, 어떤 미국인이 이 머리카락을 사서 연구소에 넘겼다. 베토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머리카락을 토대로 밝혀진 건, 베토벤이 심각한 납중독이었단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귀가 멀고 극심한 두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보청기를 통해 얕게 느낄 수 있던 진동들은, 아마 뇌 주름 사이사이에 닿아 더욱 격렬한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소리를 잃었었다. 

21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 역시 ‘잃어버린’ 사람이다. 일찌감치 루게릭병을 진단받아 투병중인 그는 ‘운동’을 잃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태양계 최고의 피지컬리스트(physicalist)다. 

스티븐 호킹, Stephen Hawkin

사랑도 마찬가지. 완벽한 사랑이 되기 위해선, ‘섹스’가 없어야 한다. 영어에서 섹스를 ‘making love’라 관용적으로 표현하지만, 섹스가 없어야 사랑은 완벽에 가까워진다. 아가페적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또 유치원 때 하는 사랑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섹스가 끼어드는 순간 사랑은 깨어지기 쉬운, 완벽과 거리가 먼 것이 된다. 

자기혐오와 우울, 비관론이 팽배해서 심지어 그것을 느끼지 조차 못하는 현대의 우리들은, 갖지 못한 것에만 꽂혀있다. 그리고 그것을 ‘나만’ 가지지 못했다고 느낀다. 누가 우리를 어느 큰 후라이팬에 넣고 달달 볶아내는 것 같다. 

우린 왜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할까? 이게 다, 외로워서 그런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서. ‘감탄’에 대한 향수(鄕愁)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우릴 그렇게 더욱, 외롭게 만든다. 

포유류 중 가장 유약한 인간의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눈앞에 커다란 젖도 스스로 빨지 못한다. 정말 이렇게 하찮았던 인간들은 지구 생명체 중 유일하게 우주정복까지 꿈꾸는 족속들인데, 그건 우리가 할 줄 아는 게 ‘없었기에’ 가능했다. 

우린 일종의 숨소리를 듣고 이만큼 컸는데, 이게 바로 ‘감탄’이다. 도리도리, 잼잼, 똥만 잘 싸도 감탄을 토하는 부모들의 숨소리는 사랑 그 자체였으며, 우린 이 덕에 성취감에 대한 훈련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뭐라도 하나 더 손에 쥐고는 보여주고 싶던 거다. 사랑받고 싶어서, 외롭지 않고 싶어서, 당신의 감탄사가 무지 듣고 싶어서! 아, 이런 귀엽고 안쓰러운 인간들 같으니라구. 

이쯤에서 알 수 있는 건, 신이야말로 제대로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거다. 그가 창조한 세상과 우리들을 보면 알 수 있잖아?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믿는다. 증거가 없으니, 완벽히 믿을 수 있다. 

단 한 번도 천국을 영접했던 적이 없던 금자씨는, 복역 당시부터 천사 같은 얼굴로 달콤한 꿈을 꾸었다. 이미 작전을 개시하고 있었으니까. 치매 노인의 수발을 자처했던 것도, 급성 신부전증에 걸린 동기에게 교복 호주머니 떼어주듯 콩팥도 줄 수 있던 것도 모두 이 덕분이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중에서

‘무’의 상태에서 천재성을 드러낸 이들은, 어쩌면 그 반전의 매커니즘을 이미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일부러 장애를 얻은 건 아니었지만, 이 매커니즘을 이해했기에 더욱 폭발적이 되었을 지도. 아니, 우리가 ‘완벽’한걸 본적이 있긴 할까? 검정색을 본 적이 있을지언정, 완벽한 검정을 본 적이 있었을까? 검정을 모르거나 잊은 천재가 나온다면, 그는 완벽한 검정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들과 달리 자꾸만 쓸데없는 것들을 채워 넣어 완벽에서 멀어지려 한다. 이성에게 매혹적으로 보이기 위해 옷을 여러 벌이나 장만하지만, 사실 그의 눈길을 가장 오랫동안 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을 때잖아. 

그래서 난 갖지 못한 것이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게 압도적으로 많은 인간이다. 그러니 앞으로 받을 것이 더 많은 사람이 된다. 심지어 완벽에 가까운 것들을! 그것들이 선사할 풍요로움을 막연히 상상하노라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미소를 띄울 수 있을 것 같아. 

소설 <은교>에 ‘관능엔 생로병사가 없다’라고 쓴 박범신 작가는, 어딘가 결핍이 있는 사람이 관능적이랬다. 나는 나의 관능이 가져다 줄 선물상자를 기대하는 이들을 사랑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어딘가 비워진 이들을 사랑하며 그 자리에 감탄을 불어넣을래. 완벽치 않게, 완벽히 서투르게, 다른 말로는- 관능적으로. 그것이야말로 과연 가장 더나할 위없는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