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종교도 다른 종교들처럼 존엄하고, 사랑은 지옥도 천국도 다 비웃겠지.’- 보들레르 <레스보스> 중에서

[공감신문]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왕비님이 제일 아름다우십니다. 여자를 제대로 알고도 남을 나이가 훌쩍 지난 왕의 선택을 받은 그녀였다. 왕비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경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누리는 이 모든 게, 바로 자신의 미모 덕택이었으니까. 그래서 매일 기뻐하고 경배하는 모양새로 거울 앞에 설 수 있었다. 여전한 하루인 줄 알았던 어느 날, 거울은 머뭇거리다 이렇게 대답한다. 

“백설 공주님이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1937

왕비는 참을 수가 없어 공주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설 공주>이야기다. 그런데 사실, 공주는 왕의 ‘딸’이었으며 그녀의 경쟁 상대도 아니었다. 왜 그녀는 공주를 죽여야만 했을까? 그리고 왜 뒤늦게야 거울은 공주가 아름답다고 말한 걸까? 아니, 그건 정말 거울의 대답이었을까?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아니고?

혹시... 왕비는 백설 공주를 사랑하게 된 동성애자였으며, 한 집에 사는 게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게 아닐까. 점점 여성미를 풍기며 자라나는 백설 공주에 대한 마음이 커져서, 왕비는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왕비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거울’이 그걸 말해주는 것 같거든. 

그녀는 굉장한 나르시시스트였던 것 같다! 사실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은 나르키소스라는 이름에서 나왔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인 그는,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을 계속 감상하려다가 빠져죽었다고 한다. 그렇다. 수면위에 드리운 아름다운 소년은, 자기 자신 ‘나르키소스’였다.

그래서 그가 죽은 자리에 피었다는 수선화(narcissus)의 꽃말이 ‘자아도취’, ‘자기애’인 것이다. 이게 나르시시즘이다. 아마 <백설 공주>속 왕비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정호승과 정지용의 시를 보고 펑펑 울었을지 모른다. 정호승은 수선화에게 인간은 다 외롭다했고, 정지용은 보고픈 마음이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호수, 그러니까 ‘거울’에 비치는 백설 공주의 얼굴이 떠오르니 눈 감을 수밖에. 

나르키소스는 호수 속 소년이 자기 자신인 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 소년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그에게 ‘동성애적 성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동성애적 성향 역시 어느 정도 가진다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킨제이 보고서(1948)가 약 5500명 백인 남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약 37%가 사춘기 이후 동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오르가즘을 경험했고, 13%는 관계는 없었으나 충동을 느꼈다고 답했다. 

비슷한 시기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적은 비율이었으나 13%가 실제로 동성애 성관계를 통해 오르가즘을 경험했다고 대답했다. 물론 동성애가 지속되는 비율은 높지 않았다. 남녀 모두 5%이내였다. 하지만 상당수가 충동을 느꼈었단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서구권은 개방적이라 그런 거 아니냐고? 천만에 말씀. 오늘날 동성애를 가장 적극적으로 규탄하는 기독교는, 한때 그들 삶의 총체였다. 그들은 신앙심으로 십자군 전쟁을 치렀으며, 미국도 청교도들의 근간 위에 세워졌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뼛속부터 동성애를 배척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동성애는 예수가 이 세상에 나오기전부터 존재해왔다. 익사한 나르키소스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며, 플라톤 등 고대 철학자와 예술가들 역시 동성애를 인정했었다. 그들은 역시나 지혜로웠다. 그건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성애자들은, 우리 모두가 인간적인 삶을 사는 데에 엄청 큰 도움이 되었었다!

혹시 <대뇌피질의 그랜드 카니발>이라는 나의 작년 글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있으시려나. 거기에서 ‘던바의 숫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대뇌피질의 부피가 클수록- 인식할 수 있는 개체의 수가 많다는 원리다. 주로 무리를 이루어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들일수록, 이 숫자가 크다. 

페이스북 친구가 5000명이나 되는 우리 인간들도 던바의 숫자가 큰 편인데, 실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건 보편적으로 100명이 좀 넘는 정도란다. 우리보다 던바의 숫자가 큰 건, 돌고래다. 이들의 무리는 200마리까지도 된다! 

옷도 안 입어서 구별도 안가고,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한 돌고래가 아닐 수 없다(...). 침팬지와 같은 유인원, 또한 펭귄도 던바의 숫자가 높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 이렇게 던바의 숫자가 높은 사회적 동물들은 동성애적 기질이 상당히 다분하다는 거다.

돌고래의 경우는 구강성교와 애널 섹스, 애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오르가즘을 즐기는데, 여기에 동성애도 포함된다. 인간과 유전인자가 약 98% 비슷하다는 보노보 원숭이들은 거의 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대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취향이 관대(?)하다는데, 물론 동성도 예외는 아니다. 

왜 그랬을까? 실은 동물 진화학적으로 보자면, 이들은 무리 안에서 갈등을 피하기 위하여 동성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강력한 무리를 이루기 위해, 종족 번식의 짝짓기 경쟁에서 도태되었을지라도- 하나의 개체라도 더 보존하는 게 그들에겐 유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저렇게 다양하게 오르가즘을 즐기는 돌고래라면, 그들은 서로 갈등 해소를 넘어- 되게 많이 친해졌을 것이다! 

아 물론, 후대의 돌고래들은 이런 기원을 모를 테지만 말이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돌고래 / 사진=BBC EARTH

인간 사회에서도 동성애가 필요에 의한 진화였다는 주장이 있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보다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이 패션과 같은 예술업계에서 큰 두각을 드러내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타인의 감정에 대한 이해와 공감능력이 남다른 편이라 한다. 과거 어느 집단의 강력한 두 인물이 마찰을 빚었을 때, 이들의 중재를 도운 게 동성애자였을 지도 모른다는 거다! 덕분에 그 집단은 계속 영위될 수 있었으리라. 

이밖에 유전학적으로 일정 비율이 그렇게 태어난다는 주장도 있고, 여러 학설이 다양하다만- 어쨌든 그들의 이타심은 남다르게 구현되어져 왔다는 거다. 게이나 레즈비언 커플들의 수입이 이성 커플들보다 높은 편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이건 그들이 어느 직장에 필요한 사회 구성원일 확률이 높단 얘기다. 자신만의 역량을 발휘하여, 대체할 수 없는 누군가가 되기도 할 것이다. 직장 내에서 그들을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게이나 레즈비언 중에 ‘꼰대’는 못 본 것 같다. 사실 이들이 고집 센 이성애자들과 키보드 전쟁을 벌이지 않는 건, 단순히 스스로를 약자라고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의 타고난 융통성과 이해심 때문이 아닐까? ...아, 그래서 그렇게 연애를 잘 하는 거였어?!

먼 훗날, 정말 외계인의 침공을 받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 때, 게이나 레즈비언들 중에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할 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 더 다가가 외계인들의 기분과 말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어쩌면 우리의 발할라를 지켜낼 수 있을 지도! 

영화 <컨택트> 중에서

나는 아직 동성에게 단 한 번의 성적 충동도 느껴보지 않은 이성애자다. 동시에- 거울과 셀카를 즐기며, 나와 비슷한 성향이나 취향을 가진 이성에게 끌려함은 물론, 심지어 다시 태어나도 ‘나’로 태어나고 싶은 어마어마한 ‘나르시시스트’다. 이런 나에겐 동성애자 친구들이 있으며 우린 서로의 사랑을 존중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여자도 사랑했던 최초의 여류시인 사포(Sappho)는 자기 여제자에게 에로틱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녀 시를 읽은 플라톤은, 예술을 관장하는 아홉 명의 뮤즈가 있다면 10번째는 사포가 되어야 한다며 극찬했었다. 

애기세줄 나비, 학명으론 Neptis sappho pallas. (아마도 불나방 비슷한 나비 같다) 라틴/희랍어로 neptis는 손녀, pallas는 아테네의 여신을 뜻한다. 저 나비의 이름은 ‘뮤즈 사포의 손녀’? 어느 시에선 그 나비가 뛰어드는 불빛이 환한 ‘거울’이 아니었을까, 하고 묻는다. 그리고 짝 잃어 슬퍼하다 거울을 만난 문조도.

‘거울에 비친 자기를 제 짝인 양 / 생이 다하도록 행복해 했다는 이야기’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중에서)

다소 진부하지만, 누군가 나를 사랑하길 원한다면 스스로부터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사랑스러움에 나르시시즘은 필수적인 것이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는, ‘조금 다른 사랑’을 하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나르시시즘 역시 가지고 있지 않을까. 타인을 지나치게 힐난하는 마음은, 어쩌면 호숫가에 자기 얼굴을 드리우기 무서워서인 걸지도. 

영화 <위대한 유산> 중에서

하지만 자기 얼굴을 드리우는 사람만이- 그리운 누군가의 얼굴도 그려낼 수 있는 법. 혹시 모르지. 거기에 그려진 얼굴이 금세 다가와- 호수보다 촉촉하고 깊게 입을 맞추어줄지도! 그런 순간을 기대하고 존중하는 마음들이, 뭉게뭉게 피어났으면 한다. 나르시시즘 역시, 우리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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