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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정세음 칼럼] 보이지 않는 엘프의 마을-밀포드 사운드

[공감신문] 어린 시절 영화관에서 봤던 <반지의 제왕>은 나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J.R.R. 톨킨의 흥미로운 세계관 때문도 아니었고, 입이 벌어지는 CG 때문도 아니었고, 잘생겼다고 난리였던 레골라스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스크린에 꽉 찬 대자연에 압도 당했다. 당시 작은 꼬마였던 나는 광활한 평원이 나올 때마다 어딘지 모를 ‘미지의 땅’에 점점 마음을 빼앗겼다. ‘저런 곳이 실제로 존재 한다면 대체 어디일까?’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도 믿지 못했던 것 같다. 매혹적인 미지의 땅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런 곳’이 뉴질랜드라는 걸 알았을 때, 나에게 뉴질랜드는 꿈이자 환상의 나라가 되었다. 친구들이 어디로 여행 가고 싶은지 물어볼 때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히 뉴질랜드!”라고 답했고, 작고 답답한 방 안에서 대자연을 꿈꿨다. 나이가 들면서 뉴질랜드는 점점 순위에서 밀려났지만 처음으로 꿈꿨던 여행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밀포드 사운드로 가는 길, 잊고 있던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니 나 지금 엘프의 마을에 가고 있잖아!’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꿈꾸기만 했던 꼬마가 성인이 되어 스크린 안으로 들어온 거였다. 물론 엘프의 마을은 스크린 안에서만 존재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산과 산 사이에 난 길게 뻗은 도로.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한 바람에 크루즈 배편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산책했다. 건너편 폭포에서 일으키는 물보라가 내가 있는 곳에서도 보였다. 한창 폭포를 감상하는데, 모자를 푹 눌러 쓴 한 소녀가 말을 걸었다. “혹시 돈 있어요?” 우리는 난데없이 나타나 돈이 있냐고 물어보는 소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깬 건 소녀였다. 본인이 이상한 사람 아니라는 소녀의 말이 오히려 더 수상했지만 소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부모님 어디 계시니?” S가 물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마을에 가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뱃삯이 없다며 방법이 없겠냐고 되레 물었다. J가 이 근처엔 밀포드 사운드 한 바퀴를 도는 크루즈 밖에 없다고 했지만 소녀는 자기가 타야 하는 배도 크루즈라고 했다. 나는 누군가 이 소녀를 시켜 돈을 뜯어내려는 건 아닐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소녀는 진지해보였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샐먼 씨를 떠올렸고 왠지 소녀 또한 집에 가도록 도와줘야 할 것 같아 결국 티켓을 끊어 주었다. 마침 출발 시간이 다 되었고 우리는 함께 배에 올랐다. 목도리를 뚤뚤 둘러매고 뱃머리에 섰지만 매서운 겨울 바람을 이기지 못했다. 객실로 들어와 창 너머로 밀포드 사운드를 감상했다. 가끔씩 크루즈가 멈추면 그때서야 주변 경관을 볼 수 있었는데 소녀는 우리를 끌고 난간 앞에 섰다.

소녀가 대뜸 우리에게 말했다. “저기가 마을이에요.” 나는 소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있는 거라곤 푸른 산과 폭포 그리고 바위들 뿐이었다. 이따금 물개들도 보였지만 소녀가 찾는다는 마을 비슷한 것 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고개를 저으니 소녀는 조금 실망한 듯했다.

이어서 자기가 사실은 북섬에서 마지막으로 생존한 엘프이며 피난처를 찾아 남섬까지 내려왔다고 했다. 우리는 어린 소녀의 상상력에 감탄했고 뭐라고 하는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사실 여기도 그리 안전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수 년 전 할리우드 사람들한테 들키지만 않았더라도 우리의 역사는 계속되었을지도 몰라요.”

나는 소녀의 상상력에 딴지를 걸었다. “그건 다 컴퓨터 그래픽이야.” S는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엘프의 마을은 스크린 안에서만 존재해. 보다시피 밀포드 사운드에 있는 거라곤 이런 자연뿐이야. 거대한 마을이 눈에 안 띌 리가 없잖아. 더욱이나 엘프의 마을이라면 사람들 입에 안 오르내릴 수가 없다고.” J는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진짜 집으로 갈 시간이야.”

소녀는 나를 비웃었다. 아니, 나는 소녀가 나를 비웃었다고 느꼈다. “언니 같은 사람들 덕에 우리의 역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거예요. 세상엔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요. 다만 그 할리우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던 것을 카메라로 담아낸 것뿐이죠. 엘프의 마을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제 눈앞에 있어요.” 나는 다시 소녀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마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나는 마을을 볼 수 없었다.

“언젠가는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제 소녀는 나를 위로해주었다. 옆에 있던 S와 J는 마을을 찾지 못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소녀는 정말 엘프일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스크린에 담겼던 그 아름다운 마을이 내 눈앞에 있지만 나는 보지 못한다. 하지만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모든 게 소녀의 발칙한 장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소녀는 갑자기 난간에 올라섰고 우리는 위험하다며 붙잡으려 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소녀는 뛰어내렸고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내려다보았다. 찰랑거리는 물 위에 소녀가 서있었다. 손을 흔들더니 더 깊은 곳으로 총총 뛰어가 버렸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른 여행자들은 소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물 위를 뛰어가는 소녀보다 바위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물개들이 더 재밌는 듯했다.

배는 다시 출발하여 선착장으로 향했고 소녀는 점점 멀어져 갔다. 아무것도 없는 저 산중에 정말 엘프의 마을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우리가 물 위를 걷는 소녀를 보았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할 방법 또한 없다.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나는 마을은 보지 못했어도 물 위에 서있는 소녀는 보았다.

[작가의 여행기에 상상력을 덧붙인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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