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어쩌면 내가 상당히 편협한 취향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일단 이 말 자체가 굉장히 모순적이다. 취향이란 것 자체가 편협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어딘지 모르게 ‘장르적’이다. 어떤 것에 대한 장르? 내가 웬만큼 경험해본 것에 우리는 ‘취향’을 논할 자격이 생긴다. 한식만 먹어본 사람이 ‘난 한식 취향이야’라고 말하는 건 어딘가 납득이 되질 않잖아.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시’에 대한 취향이다. 나는 시를 무척 좋아한다. 글쎄, 고인이 된 마광수 선생님의 에세이를 읽고 굉장히 부러웠던 건 그때엔 보편적으로 ‘낭만’을 가졌었더라는 것. 물론 그의 주변 사람들만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어른들을 보면 일부는 그렇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드니까. 어쨌든 그의 젊은 시절, 그 주변에는 좋아하는 시 하나쯤은 언제든 읊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더라는 것.

화가 이중섭(1916~1956)이 아내 마사코에게 썼던 편지

물론 굳이 ‘시’일 필요는 없다. 지금 내 친구들도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 구절 정도는 당연히 하나- 둘, 아니 세 개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것도 물론 내 주변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거의 아마 내 주변에서 가장 꾸준히 시를 읽는 유일한 인간 중 하나인 것 같다. 

내 시의 취향을 말하자면, 일단 시집의 제목들이 너무 발칙하고도 슬프다. 개인적으로 외국 시인 중엔 셰익스피어와 찰스 부코스키, 보들레르의 시를 좋아한다. 찰스 부코스키의 시집 제목은 <사랑은 지옥에서온 개(Love is a Dog from Hell (1977))>이다. 그 외에도 진은영 시인의 <훔쳐가는 노래>, 박언준 시인의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그리고 채호기 시인의 시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들은 너무 아프다. 생동감 있게, 아프다. 시에는 리듬이 있다. 좋은 시란, 글로 읽어서 좋은 것뿐만 아니라 읊어서 좋아야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도, ‘시 낭독 대회’라는 것을 하나보다. 나는 그 때도 시를 무척 좋아했는데, 이상하게 시 낭독(암송)대회에선 장려상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미 그 때 ‘시’를 어떻게 읽어야하는 지 알고 있던 것이다. 

영화 <아가씨>의 아가씨인 히데코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에게 소설을 ‘낭독’하는 훈련을 호되게 받는다. 그녀의 낭독은 청중(실은 고객)들로 하여금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단어를 하나하나 살아있게 만든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시를 그렇게 암송, 아니 낭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하던 엄마와 주변에 노래와 노랫말을 쓰는 이모 삼촌들 덕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런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이 무척 쑥스러워서 였다. 그냥 애들처럼 운율에 맞게 외워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영화<아가씨>중에서

시마다 다르지만, 시에서 표현하는 상황이나 감정들은 ‘끝내 터져 나온’ 것들이다. 노래 가사들이 그러하듯, 어느 격정적인 순간이나 격정적인 감정- 혹은 단조로움 그 자체에 대한 격정이다. 무언가에 대해 묘사하고 자기 자신을 투영하고- 아니 그 세계에 자신을 담가 현상해내는 것이다. 그 자체가 세계가 된다. 시는, 살아 움직인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는 존댓말 투로 되어있는 데다, 세상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이 넘친다. 가끔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유튜브에서 그녀의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 내 시 취향은 그녀와 맞지 않는다. 난 아픈 것들이 좋다. 정말 사랑이 지옥에서 온 개-새끼라고 말하는 것들이 나에게 살아 움직인다. 음, 소설...? 글쎄, 지금 누군가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능동적으로 읽어줄 여유가 나에겐 없다. 

그렇게 나는 살아있는 아픈 것들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것들에 내 시간과 마음, 정신을 할애할 수 있다. 그리고 가만 보니 사랑에 상처받은 시의 화자들은, 그 사랑의 대상이 ‘살아있기에’ 아파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존재한다는 얘기다. 물리학적으로 존재한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타자는 우리가 의식을 활발히 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결핍을 느낀다. 왜냐하면 타자는 늘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자유의지가 있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할 자유의지가 있듯이, 타자는 나도- 또 다른 사람도 사랑할 자유 의지가 있다. 우린 그런 타자를, 사랑한다. 살아있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에곤쉴레 <앉아있는 커플>

물론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해주길 원하는 마음은 당연할 수 있다. 나 말고 다른 이를 사랑한다면 무지 슬플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에게도 그런 자유의지가 있기에, 나를 사랑해주었을 때에 우린 더 감사함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요즘에와 보니, 우린 ‘죽어있는 것들’에 대해 사랑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비롯한 많은 청춘들이 사랑에 겁을 낸다. 그것이 과연 경제적, 사회적인 이유 때문일까? 과연 사회의 분위기가, 지갑 사정이 사랑을 방해하는가?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더욱 큰 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 사랑하길 겁내는 심리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것들이 마음대로 되질 않는 요즈음에- 심지어는 자기 스스로의 멘탈 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지금의 삶에서, ‘사랑’에까지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차라리 안하려는 건 아닐까. 

예전에 그런 이야길 들었었다. 부모가 아이에게 ‘우리 아이는 원래 머리가 좋아.’ ‘얘는 하면 정말 잘해’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해온 다면, 아이가 이후에 공부를 열심히 할 확률이 낮다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 부모가 만족해 할 만한 성적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아이는 부모와 자신이 느끼게 될 실망감에 이미 겁을 내는 것이다. 나는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죽어있는 것들을, 사랑하려고 하는 것 같다... 혹은 곧 죽을 것들, 곧 없어져버릴 것들을 말이다.

장 미쉘 바스키아 <알폰소 왕>

단지 이것은 사랑만 가지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너무도 피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주려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안쓰러움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으려는, 무엇에 대한 희망도 갖지 않으려하는,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모호함과 불안함- 그것에 대해 마음과 호기심을 둘 여유가 없어 옹졸하게 소심해진 내가 슬프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하지 않나.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니, 동병상련의 이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은 살아있으며 나는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를 쓰지 않는다. 그들의 말엔 비유가 없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지 않은 건 시와 비슷하다. 상실감은 살아서 움직인다. 여전히 우주를 떠도는 스푸트니크 호처럼 그냥 둥둥 떠서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헤매이는 곳들이 자기 자리라는 냥, 결핍된 눈들로 말이다.

우리에겐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할 용기가 필요하다. 변화무쌍한 것들을 받아들일 용기를! 그리고 스스로도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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