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천사 또한 악마가 되었는지는 의심은 하되 바로 묻지 못하네’(셰익스피어 <소네트> 중)

[공감신문] 시(詩)는 나에게 큰 기쁨 중 하나다.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엔, 도서관에 가서 기분에 맞는 시집을 골라 읽는다. 시로, 해장을 마무리한다. 전날 밤 술잔에도 기분이 있듯, 해장에도 그러한 정서가 있다. 인생이 뭐-같을 때는 찰스 부코스키나 박노해를, 도시풍경에 동정심이 들땐 위대한 보들레르를, 위로가 필요할 땐 천양희나 나태주를 고른다. 시가 있는 서가는 나에게 김밥천국 메뉴판이다.

찐하게 마셨던 작년의 마지막 날- 하지만 1월 1일엔 도서관도 휴일이었을 테지. 해장이 필요했던 난, 전에 빌려두고 읽지 않던 시집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올해 읽은 첫 책의 제목은…<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난 시쓰기도 좋아한다. 혼술할 때에 특히 많이 쓰는데, 다음날 읽기에도 불편하지 않은 시들이 꽤 모였기에 몇 편 더 쓰이면 출간할 것이다. 시 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연산군과 피카소, 존 레논도 시 쓰기를 즐겼다. (음, 개인적으로 존 레논의 시는 별로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시 희곡작가이자-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진짜 잘하는 극단이 아닌 이상, 국내에서 공연되는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좀 어색하다. 말투가 좀- 오그라들잖아? 상당히, 시적이라 그렇다. 그래서 그의 시는, 쉽게 읽히며 무지 아름답다. 

그저께는 자괴감에 빠져 한잔했었는데 다음날도 기분이 풀리지 않더라. 어김없이 도서관에 갔다. 그날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집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그의 단어들을 보며 기분전환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만, 뜻밖의 문장들을 마주하고 말았다. 

‘내 정열의 주인공 그대는 자연이 스스로 그린 여자의 고운 얼굴을 가졌노니, 여성의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으되 거짓된 여자 같은 변덕에 물들지 않고(...)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여성들의 영혼을 황홀케 한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그 다음이 굉장하다. 

‘그대는 먼저 여자로 창조되었으되 자연의 여신이 스스로 만든 그대에게 매혹되어 부가물을 달아 그대를 나에게 빼앗았으니, 하나를 더 부가하는 것은 나에게 의미 없는 짓.’ …! ‘그러나 자연은 여성의 기쁨을 위해 그대에게 남근을 달았노니, 나의 기쁨은 그대의 사랑, 그대 사랑의 기교는 여성의 보물.’

맙소사... 셰익스피어 게이였어? 나는 이 시를 다시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도 게이 같았다. 하지만 시 한편으로 단정 짓지 말고 의혹만 품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장이 끝나갈 무렵 마주친 144번째 소네트(시) 한편에, 난 확신하고야 말았다. 

‘훌륭한 천사는 아주 고운 남자. 악령은 검은 빛깔의 여자’라고 쓰여 있었다. 여자 악마는 ‘추한 성’으로 그의 순결을 빼앗아 부패시키려한다고. 그리고 화자는- 사랑에 아파하는 여느 남자들처럼 절망한다.

‘내 천사 또한 악마가 되었는지 의심은 하되 바로 묻지는 못하네. 둘이 내게서 떠나 서로 친숙해졌으니 천사가 지옥에 있게 된 모양인지’

그의 희곡 속 인물들의 담대함은 어디로 간 걸까? 사랑에 목숨까지 거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멕베드 부인이나 오셀로는? 이 소네트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의심할 뿐 알 수는 없는 일. 악한 천사가 선한 천사에게 성병을 주고 쫓을 때까지는’ …아- 역시 사랑 앞에서 치졸해지는 건 다들 어쩔 수 없나보다.

16세기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이 불었다. 성경 위주의 삶을 중시함은 물론, 거기 위배되는 건 모두 박해했다. 영국에선 동성애자를 사형시키는 법까지 제정되었다. 심지어 남자끼리 키스하면 병에 걸려 죽는다는 괴담을 퍼뜨리는 이들도 있었다.(물론 믿는 이들도...) 

영국이 낳은 최고의 극작가로 불리는 셰익스피어는, 그 당시에도 잘나갔었다. 한마디로 잃을 게 많은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사랑의 기쁨보다 성공의 맛을 먼저 알아버렸을 지도 모르지. 시대에 허락 받지 못할 그의 사랑에, 그는 손에 쥔 것들을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을 거다. 심지어 그는 결혼까지 했는걸? 물론 여자랑. 애도 셋이나 낳았다. 

셰익스피어는 말하고 싶었을 거다! 동성애는 허용될 수 있는 사랑이라고. 그리고 그의 마음을 빼앗은 이에게도 ‘내가 널 사랑하는 감정은 죄가 아니야’라고 설득하고 싶었을 거다. 그러니 ‘넌 사실 처음엔 여자로 창조되었어’라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는 무죄가 된다. 

하지만 가정이 있던 그는, 애인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껴도 ‘그 여자 사랑하니?’라고 물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에라이, 성병 걸려서 소박이나 맞아라!’하고 홀로 노트에 외칠 수밖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게이였다는 썰이 있다. 그의 다이어리에 쓰인 짧은 글 때문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그의 첫 기억. 요람 속에 누워있던 그에게 독수리가 날아와서 꼬리를 그의 입술 속에 넣고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는 것이다! 

독수리의 꼬리라…그건 남근의 상징일거라고 학자들은 감히 유추했다. 그렇다면 독수리의 이 행위는 펠라티오를 연상시키게 된다. 다빈치는 스스로 타고난 동성애자라 이야기하고 있던 거다. 왜냐하면 정말 독수리가 그랬을 리도 없고, 그렇다하더라도 요람속 일이 정말 기억난다고?

모나리자의 얼굴 역시 중성적인 편이다.

그러나 이 방면에 소극적이었던 그는, 실제로 연애를 하진 않은 것 같다. 천재 다빈치에게 뛰어난 제자가 없던 건, 제자 선별 기준이 외모였기 때문이었단다. 그렇게 많은 업적을 남긴 다빈치는 유산의 반을 미소년 제자에게 남기고 죽는다. 그로부터 약 100년 뒤 태어난 셰익스피어는 다빈치의 위대함과 더불어 고통 역시, 깊게 추모할 수 있었으리라. 

‘로미오와 줄리엣’은 전세계적으로 비극적 사랑의 아이콘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햄릿, 오델로, 리어왕, 멕베드)에 그들은 입성하지 못했다. 왜? 인물들의 상황과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다른 4대 비극들과 차이점이 있다는 등 그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 중, 4대 비극 인물들과 달리 로미오와 줄리엣은- 타고난 운명 때문이 아닌 자신들의 어리석은 선택에 의해 그런 상황에 처했기에 때문이란 얘기도 있다! 

아니, ‘오- 로미오 당신의 이름은 왜 로미오 인가요?’라는 상황이 비극이 아니라고? 로미오가 스스로 로미오라 이름 지은 게 아니잖아! 아니, 도대체 ‘4대 비극’은 누가 정한거야? ‘여기 사장 나와 보라 그래!’라는 심정으로 알아보니, A.C.브래들리라는 사람이 나왔다. 120년 전에 ‘셰익스피어 비극론’으로 저명해진 평론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어마어마하게 사랑했나보다. 

어떤 사람이었기에 ‘4대 비극’을 이리 정한건지 궁금해서 풀네임을 따다가 백과사전에 치니 머리 아픈 영어가 막- 그러다 한 줄이 눈에 뿅! 들어왔다. ‘Bradley never married’ 그는 한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이것이 나에게 답을 주는 듯 했다.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관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건 비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브래들리의 논리가 저 부분에서만 석연치 않은 것은... 시대의 기쁨보단 말 못할 슬픔을 누려야했던, 위대한 작가를 위한 슬픈 궤변이 아니었을까.

줄리엣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는 로미오에게, 신부는 고통을 덜어낼 ‘갑옷’으로 철학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로미오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이 줄리엣을 만들 수 없다면 그딴 건 집어치워요!”... 

줄리엣과의 사랑 때문에 추방당하고 가문을 잃을 위기에 놓였던 로미오. 어쩌면 셰익스피어 그 자신이 아니었을까? ‘자연이 스스로 그린 고운 여자의 얼굴 가진’ 천사는, 줄리엣.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줄거리를 보니, 한 때 슬럼프에 빠져있던 셰익스피어에게 점성술사가 ‘사랑만이 당신의 천재성을 되살려 줄 것'이라 했단다. 이후 그는 오디션을 보러왔던 미소년에게 반했는데, 알고 보니 남장여자였다고 한다. 그녀는 최고의 뮤즈였고, 그래서 나온 게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남장여자를 연기한 기네스 팰트로,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

하지만 우린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셰익스피어가 중성적인 매력에 끌렸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남근이 달려있지만- 그대가 가진 사랑의 기교는 여성의 보물이랬다. 만일 그가 양성 혹은 동성애자였다면, 관계 속에서 어떠한 역할이었는지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로미오로서, 줄리엣이 필요했던 거다. 

셰익스피어는 스스로 최고임을 알고 있었다. <소네트> 시 대부분은 자신의 시를 옹호하며 끝맺었다. 이제보니 그건 잘난 척이 아니었다. 그의 시 대부분은 자신의 사랑을 옹호하는 것이었으니 결국, 100편이 넘는 이 소네트들은 자기 사랑을 옹호하기 위해 쓰인 거였다. 

그와 다빈치의 공통점은 ‘최고’였다는 것! 학자들은 다빈치가 적극적으로 동성애를 하지 않았기에 그런 열망이 학문적 탐구로 대체된 거랬다. 셰익스피어 역시 한평생 열심히 썼다. 한(恨)을 위해 일부러 눈을 멀게 한 서편제처럼, 거세당한 그들의 뜨거운 사랑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

기대하던 해장의 맛은 아니었다. 치즈돈까스를 시켰는데 치즈라면이 나온 느낌이랄까? 하지만 당황했던 것도 잠시- 국물까지 맛있게 비울 수 있었다. 자괴감에 빠져있던 나에게, ‘그래도 너의 철학은 줄리엣을 만들 수도, 사랑을 입밖으로 꺼낼 수도 있잖아?’라고 그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16세기를 살다간 어느 위대한 작가와, 진심으로 소통하는 기분이었고 시에 쓰인 그의 진심에 고마웠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흩어진 사랑 때문에, 혹은 ‘사느냐 죽느냐’하는 문제에 괴로운 날엔 어김없이 술잔을 비우고, 해가 떠오르면 건조해진 눈으로 시집을 바라볼 것이다. 넉넉한 말들을 하진 않지만, 여백처럼 낙낙한 위로가 있기에. 시를 만나기 위하여 오늘도, 이 잔에 여백을 허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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