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교양공감] 2005년 UN총회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해방된 날인 1월 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로 지정했다. 앞으로 이러한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회원국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고, 홀로코스트 역사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다.

2005년 UN총회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해방된 날인 1월 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로 지정했다.

따라서 추모일이 있는 일주일을 ‘홀로코스트 추모 주간’으로 설정해, 그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희생, 이후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올해 국내에서는 주한 독일 문화원, 이스라엘 대사관이 한국어를 제공하는 강연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펼치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단순히 어느 대륙, 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나약한 인간에게 행해진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교양공감팀도 오늘 홀로코스트에 대해 조금이나마 살펴보려 한다. 

국내에서는 주한 독일 문화원, 이스라엘 대사관이 한국어를 제공하는 강연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펼치고 있다.

■ 홀로코스트는 무엇인가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모든 행위를 칭하는 말이다. 

고유명사로 쓰일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당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대학살을 의미한다. 당시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은 독일과 독일 점령지 전반에 걸쳐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등 약 1100만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1945년 1월 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명에 이르는 유태인이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당에 의해 학살됐다. 특히 유태인의 세대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치당은 어린이까지 학살 대상에 포함했다.

이 사건은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예로,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이후에도 보스니아 내전이나 르완다의 종족분쟁, 킬링필드로 불리는 캄보디아 내전 등 세계 곳곳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되면서 홀로코스트는 여전히 국제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1944년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헝가리 유태인들

■ 히틀러는 왜 유태인을 증오했을까

독일의 정치가이며 독재자로 불리는 아돌프 히틀러. 그는 왜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했을까.

히틀러는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그의 유태인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강경한 입장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독일의 정치가이며 독재자로 불리는 아돌프 히틀러.

그렇다면 히틀러가 유태인을 증오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청소년 시절의 히틀러가 빈(오스트리아 수도)에서 생활할 때 여러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유태인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히틀러 모친이 유태인 의사의 실수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의사가 유방암 환자인 히틀러 모친을 성폭행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또 다른 설 가운데 하나는 히틀러가 빈에서 미술학교에 다닐 시절 짝사랑한 독일 여자가 돈 많은 유태인과 결혼하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독일 여성과 결혼하면 아리안(독일 민족)의 피를 흐려놓기 때문에 히틀러가 그들의 멸종을 기획했다는 설을 믿는 이들도 많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유태인을 학살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경제적, 정치적 이유였다. 히틀러는 유태인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가 붕괴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개인적인 감정 요소는 유태인을 학살하는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경제적, 정치적 이유였다. 

히틀러는 유태인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가 붕괴한 것으로 판단했다.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유태인들이 독일 경제를 재건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본 것이다. 

종전 직후인 1919년 독일의 민간은행의 약 절반은 유태인들이 소유하고 있었고, 증권시장도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 신문의 절반가량, 백화점의 80%도 유태인 소유였다. 한마디로 독일 경제와 언론을 유태인이 좌우했던 것인데, 히틀러는 유태인들로 인해 경제가 좌지우지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 집중적인 유태인 학살

이들 이유 외에도 다른 이유로 나치당은 유태인을 비롯해 슬라브족, 집시 등을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태워 수용소로 데려갔다. 이미 열차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으며 수용소 가스실에서 대부분 희생됐다.

1940년대 게토 길거리의 아이들

이 가운데 학살은 유태인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1100만명의 희생자 중 절반이 넘는 600만명이 유태인이었다. 그 중 사상자가 가장 많았던 건 1942년 4월부터 11월이었다. 250일 동안 250만명이 처형당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학살이었다. 

학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자행할 당시, 그 이후에도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그들의 범죄에 대해 방관했고, 유태인에 대해 차가운 입장을 취하면서 유태인들은 대학이나 사회 안에서 차별을 받아야 했다. 유태인들은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인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홀로코스트 추모 기념관을 찾은 유태인 부부

■ 독일의 진정성 있는 사과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

현재의 독일은 모든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모든 전쟁 범죄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깊이 사과하고 있다. 이들의 반성하는 자세는 다른 전범국가와 달리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홀로코스트를 잊기 쉬운 어린 세대들에게 교육을 통해 이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시는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말자는 의미에서다. 같은 의미에서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바로 옆에는 ‘홀로코스트 학살 피해 유태인 추모관’이 위치하고 있다.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추모 기념관

학살은 일반적으로 가혹하게, 별 다른 이유 없이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역시 역사적으로 가슴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해야하는 것은 지구상에서 더 이상 가슴 아픈 상처가 생기면 안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누구든 끔찍한 일을 당해서도 안 되지만 저질러서는 더욱 안 된다. 이번 홀로코스트 추모 주간을 통해 우리가 집단 속에서 누군가에게 가혹한 형벌 같은 차별이나 짐을 드리우는 건 아닌지 살펴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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