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들의 식민성, 그리고 우리들의 트라우마에 대하여

[공감신문] 사실 중학생 시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지나고 보니 추억이네, 싶은 일들도 별로 없어서 마음과의 합의하에 대부분 지워진 것 같다. 하지만 1학년이었던 2002년은 기억에 남는다. 혁명적이었던 여름과 가을, 인상적이었던 사건들로 점철되었던 순간들. 가을에 있던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당시 여름날의 분위기만 이야기하고자한다.  

2002. 06. 18 주한미군 보병 2사단의 「촛불 추모 행사」(Candle-Light Vigil Ceremony)

아시다시피 그 해엔 월드컵이 있었고 우리 대표팀은 역사적인 기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창 연예인을 좋아할 나이의 우리들은 대표팀 선수들 이름을 책상에 새겼다. 단축 수업을 하는 경기 날엔 의정부 공설운동장에 모여 한뜻으로 응원했다. 기말고사 준비고 나발이고, 뜻도 모르는 ‘Be the reds’ 티를 구해 입었다. 그즈음, 옆동네 양주시에서 한 학년 언니 둘이 미군 부대 장갑차에 깔려죽었더랬다. 

우리 가족이 의정부에 살았던 건, 아빠가 한 때 주한 미8군의 기자이셨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우리 집은 부대에서 멀지 않았었고, 그 곳은 나에게 어릴 적 수영장이자 축제의 장소이기도 했다. 중학교 때 내 단짝 친구 혜인이는 양주시에 살았으며 그녀 아버지 역시 미군부대에 근무하고 계셨었다. 

빨갛게 물든 시청광장의 단결력은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소개됐다. 우리 대표팀 선수가 부상을 입으면, 우린 마치 이슬람 사람들처럼 유럽 국가들의 이름을 악독하게 불러댔다. 그 당시 우린- 키가 우리만 했을 거란 형체를 알 수 없이 뭉게어진 사진을 보고, 학교에 가기 위하여 미군들과 같은 버스에 올라야했다. 내 또래의 아이를 둔 부모님들은 미군들과 얼굴을 맞대고 일하셔야 했다. 

그들의 태연함은 권력이었다. 개인주의? 아니다. 그들은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아니, 이 사건에 대해선 거의 오만한 수준이었다. 그동안 우리 정부가 다 받아주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되지도 않는 영어로 당시 부시 미국 전 대통령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주소가 아직도 생생하다. 

bush@whitehouse.go...뭐 이런 거였다. 바로 답장이 오더라, 자동답장. 당신의 의견이 부시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정확한 수사와 정당한 재판을 요구하던 학생들의 목소리

나보다 적극적인 아이는 대표팀 응원이 아닌 다른 대표가 되어 거리로 나섰다. ‘네가 부시한테 메일을 보낸다고 읽겠니?’ ... 우리가 화가 났던 건, 그 와중에도 환타에 소주를 섞어 마시며 희희낙락 하는 미군들을 내버려두는 우리나라 어른들이었다.

며칠 전 프랑스 문화원이 공동 주최한 <사유의 밤>이라는 행사에 다녀왔다. 인류학, 사회학 등 한불 양국 네 명의 학자가 ‘권력의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토론하는 자리였다. 이런 저런 이야길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휴대폰을 하다가, 낯선 이름을 보았다. 서지현 검사. 한 여인의 용기 있는, 아니 사활을 건 외침. 

그날 밤 <사유의 밤>에서 이기상이라는 철학자 분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 사회의 문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지식인들의 식민성’에 있다고 했다. 소위 똑똑하다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알아서 긴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민낯을 바라보자면, 우린 늘 어느 편에 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오지 않았었나.

어느 집단에서나 흔히들 ‘라인 탄다’고 한다. 누구와 뜻을 함께 모은다는 얘기가 아니라, 권력형 구도로 ‘누구’에게 어느 정도의 복종을 스스로 허락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근대성을 ‘압축성’이라고들 표현한다. 오랜 기간 식민 지배를 당했던 대부분의 국가가 점진적인 근대화를 거치지 않았기에 이런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는다.

<사유의 밤> 행사

우리 아빠 나이 또래 분들의 특징이 있다. 누가 유학을 갔다 왔으면, ‘쟤 미국에서 공부 했어’라는 이야길 앞에 꼭 가져다 붙인다. 그가 미국에서 공부를 했는지, 파티만 즐겼는지 알게 뭐람? 하지만 어른들은 ‘미국’, 그리고 그가 당시 유학을 갈 만큼 집이 부유했다는 것에 이미 경외심을 표한다. 그래서 이들은 젊은 시절부터 비교적 쉽게 좋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 알아서 길을 터주었으므로.

이런 트라우마가 여태껏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습적인 구조가 지금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도 강요되고 있다. 업무 이외의 불필요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이들은 ‘모두가’ 그래왔기 때문에 너희도 그래야한다고 한다. 폭력적이다. 법을 집행하는 최고 기관인 사법부 내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니. 나름의 오랜 체계와 전통을 가진 이와 같은 다른 사회 기관들도 얼마나 더욱 그 덩어리가 크겠는가. 미시적 권력의 덩어리.

우릴 짓누르는 그 덩어리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려고 수많은 노력을 해왔었다. 누군가 사법고시에 패스해서 검사가 되었던 것처럼. 예전에 어느 체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선배들의 가혹 행위로 사망한 학생도 있었다. 그게 전통이랬다. 예체능 계열 전공들의 선후배 관계가 소위 ‘빡센’ 건 들어왔지만 그러려고 입시 내내 땀방울을 흘린 건 아니었을 거다. 

어제 배우 허정도 씨의 칼럼 ‘모든 드라마는 불법이다’를 읽었다. 그는 드라마 현장에서 조단역 배우들과 스텝들이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해 폭로했다. 오랜 시간 지속되었던 방송계 임금 지급 문제들이 얼마 전부터 터져 나오고 있었고, 그의 글은 조금 더 현실을 느껴지게 해주었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아마도 분위기를 타고 사법부 내에서 이런 목소리가 더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나 이런 이야길 꺼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조직과 영영 끝이라 생각했기에 그러질 못했을 거다. 다른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허정도 배우는 ‘이 글을 쓰고 나면 드라마와는 영영 끝이겠지’라고 했다. 그들의 이러한 외침은 스스로에겐 조직과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하지만 자신이 그 일의 마지막이길 바라는 묵직한 ‘One Last Cry’였다.

이런 용기를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건 않다. 결단력도 마찬가지다. 그런 일을 용인한건 아니지만, 침묵한다고 정의롭지 않은 건 아니다. 개인의 성향문제다. 서지현 검사도 비슷한 피해를 겪었을 피해자들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꼭 말해주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다고 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욱 정의로운 누군가의 몫이라면- 우리의 역할은 거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단 한 사람이 아닌 어느 누군가의 일이며, 혹 한 사람의 일이더라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이 사회다. 

그들이 입을 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어쩌면 그러한 폭로 때문에 인생의 반을 넘게 쏟아 부은 그 길을 포기해야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기에, 내린 결정이었을 거다. 소중한 친구와 연인 사이에도 좋은 이야기만 할 순 없다. 서로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는 더 크게 곪아터지기 전에 대화해야 하는 것과 같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래야한다. 네가 나의 친구인 것이 행복했으면 좋겠는 것처럼, 사회 조직도 그런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프리다칼로 자화상 <부서진 기둥>, 1944

트라우마다, 트라우마 때문이다. 모든 책임이 트라우마에 있는 건 절대 아니지만, 아예 없다고 볼 순 없지. 다들 아파서 그래. 사랑한다면 이런 아픔도 조금은 돌보아주어야지. 

그렇기에- 이곳에 함께 도생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목소리를 낸다. 잠깐의 이별을 불사하며 독배를 드는 줄리엣과 같은 사랑과 용기를 가진 이들의 One Last Cry에 박수와 격려를! 그리고 여기에 귀 기울여듣는 마음들이 오래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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