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멕시코시티의 아침

“납치범이면 어떡해?” 

S의 물음에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그 생각을 못했네. 멕시코에 도착하기 며칠 전, 나는 현지인의 집에서 머무를 수 있는 카우치 서핑을 시도하기 위해 사이트에서 한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름은 뻴리뻬. 멕시코시티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역에 살며 여행을 좋아하는 (아마도) 삼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뻴리뻬의 프로필을 보아하니 그의 집에서 머물렀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인 글을 남겼고, 그의 사진 속 인상 또한 선해 보였다. 게다가 공항까지 배웅 나와준다고 하니, 이렇게 친절한 호스트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심지어 새벽 여섯 시 반에 도착하는데!).

그런데 S는 그가 납치범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여행하기 전에 멕시코에 대한 (염려스러운)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우리는 살짝 ‘쫄아’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온라인상의 뻴리뻬는 알아도 ‘진짜 뻴리뻬’는 모른다.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도망가자는 S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랑 배낭 하나 메고 왔으니 수틀리면 잽싸게 도망갈 수 있을 테다.

게이트를 나가니 우리를 먼저 알아 본 뻴리뻬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비엔베니도스!” 동그란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뻴리뻬가 생글생글 웃었다. 사진에서 본대로 그는 선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친절하게 안부를 물어보는 뻴리뻬를 보며 나의 경계는 서서히 풀어졌지만 S는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긴장을 놓지 않았다. 

나는 S에게 괜찮을 거라고 말하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해가 밝아오고 어둠에 잠겼던 멕시코시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그동안 잠시 잊고 있던 여행 괴담들이 떠올랐고 나는 설마 내 인생이 멕시코 갱단에게 총을 맞고 끝나진 않을 거라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설마 그러진 않을 거다. 설마. 한두 마디 나누니 차에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장시간 비행으로 너무 피곤했고 뻴리뻬 또한 잠시 자라며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완전히 해가 떠오를 때쯤 무사히 (어두운 뒷골목이나 폐허가 아닌) 큰 대로변에 위치한 하얀 빌라에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와 비슷한 빌라들이 늘어서 있었고 꽤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주거 지역인 듯했다. 역시 뻴리뻬는 돈 많은 갱인 걸까. 

긴장한 채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간 했던 여행을 통틀어 현지인의 집에서 묵는 건 처음이었다. 간단히 집을 둘러보았다. 혼자 살기에 적당한 크기였고 인테리어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뻴리뻬가 갱이라는 흔적은 없다. 우리는 작은 손님방으로 안내받았다. 뻴리뻬는 오후엔 회사에 나가봐야 한다며 그전까지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긴 채 방문을 닫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나니 순식간에 모든 긴장이 풀렸고 우리는 금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멕시코시티의 낮

“끝나고 전화할게!” 

뻴리뻬는 (이 주변이 볼거리가 많다며) 멕시코시티 어딘가에 우리를 내려놓고 떠났다. 나는 뻴리뻬가 빌려준 연락용 핸드폰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갱은 아닌 것 같지?” 나의 말에 S는 그제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딘지 도통 모르겠다. 생소한 스페인어 표지판들이 보였지만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딱히 계획이 없었고 걷다 보면 무언가 나오지 않겠냐며 일단 걸었다. 그러나 멕시코의 뜨거운 해는 만만치 않았다. 뜨거운 땀이 흘러내렸고 다시 장거리 비행의 피로가 몰려왔다. 

얼마쯤 걸었을까, 우리는 차뿔떼뻭 공원 표지판을 발견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원에 가서 쉬기로 했다. 울타리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공원은 굉장한 크기를 자랑했고 놀 거리가 다양했다. 박물관, 회전목마, 유령의 집, 게다가 동물원까지 있다니 평범한 공원이 아니었다. 노상 점포도 많았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멕시코에서 흔히 맛 볼 수 있는 매운 아이스크림

“지금 아이스크림 위에 고춧가루 뿌린 거 맞지?”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지 S에게 물었고 S는 아마도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우선 하나를 사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맛있으면 더 먹기로 했다. 아저씨는 작은 플라스틱 컵에 한눈에 보아도 칼칼해 보이는 진액과 상큼한 라임맛 아이스크림, 그 위에 고춧가루까지 듬뿍 담아주었다.

서로 먼저 먹으라며 되지도 않는 배려를 하다가 결국 S가 먼저 먹었다. 처음엔 알쏭달쏭 한 표정이더니 한순간 얼굴을 찡그리며 ‘너도 먹어보면 알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바싹 마른 입안으로 한 스푼 가득 넣었다. 처음엔 라임의 상큼한 맛에 먹을만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나의 멍청한 착각이었다는 걸 다음 순간 알게 되었다. 라임맛을 즐길 새도 없이 매운 맛이 혀와 식도를 강타했다. 우리는 연신 캑캑대었는데, S는 (안타깝게도)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에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고운 고춧가루가 휘날리며 S의 눈을 공격했다. S는 비명을 질렀고 어떻게 해야 하냐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는 S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이 또한 지나갈 거라며 쓸모없는 위로를 했다. 눈이 벌개진 S는 오기로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버렸고 우리는 다신 먹지 않기로 했다.

매운 아이스크림의 충격을 뒤로하고 적당한 그늘을 발견하자마자 돗자리도 없이 그냥 누워버렸다. “우리가 생각한 거랑 다르지 않아?” S가 말했다. “우린 여태 뭘 상상했던 거지.” 멕시코에 도착하기 전에 했던 모든 걱정들이 무색할 만큼 평화로웠다. 뻴리뻬가 납치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니, 잠시 머쓱해졌다. 

어느새 S는 코를 골며 잠에 들었고 나는 가만히 주위를 감상했다. 아아 한가로운 주말 오후다. 유모차를 끌며 산책을 나온 부부, 헬륨 풍선을 들고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 열띤 토론을 하는 학생들, 그늘 밑 벤치에서 신문을 보는 노인…. 내가 보는 그들의 일상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보며, 내일이면 더 편한 마음으로 멕시코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가방 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뻴리뻬다! 그의 연락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이제는 뻴리뻬를 완전히 믿게 되었다. 그의 친절과 공원에서 보았던 멕시코 사람들에 대한 인상 덕분이다. 뻴리뻬는 차뿔떼뻭 공원 앞으로 우리를 데리러 왔다. 아침엔 어색했던 차 안의 공기가 지금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는 멕시코시티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우리를 소깔로 광장으로 데려갔다. 멕시코시티의 중심부인 소깔로 광장은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있던 곳이다. 중앙에 늘어서 있는 간이 텐트들이 시야를 가려 광장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뻴리뻬가 데려간 건물의 상층에서 소깔로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그는 매번 여행자들을 이곳에 데려오는 듯했다).

다시 광장으로 내려와 잠시 주변을 걸었다. 광장 중앙엔 중남미 대륙에서 가장 큰 성당인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멕시코의 독립을 기념하는 루미나리에가 전시되어 있었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배경으로 색색의 조명들이 반짝였다. 우리는 서서히 허기를 느꼈고, 뻴리뻬가 추천하는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멕시코시티의 밤

고급스러운 타일로 장식된 아치형 입구를 지나니 넓은 홀이 나왔고, 벽에는 멕시코스러운 꽃문양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맛집이라는 뻴리뻬의 말마따나 많은 사람들이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빈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보고도 어떤 걸 시켜야 할지 몰랐던 나와 S는 웨이터 할아버지의 추천을 따르기로 했다. 

뻴리뻬는 아보카도 소스와 치즈를 얹어 먹는 바삭한 ‘뭔가’, S는 진한 치즈 맛이 나는 치킨 수프 같은 ‘뭔가’, 나는 고추 속을 파내고 고기를 채운 후 달달한 소스를 뿌린 ‘뭔가’를 시켰다.

아보카도 소스와 치즈를 얹어먹는 바삭한 ‘뭔가’
진한 치즈 맛이 나는 치킨 수프 같은 ‘뭔가’
고추 속을 파내고 고기를 채운 후 달달한 소스를 뿌린 ‘뭔가’

먼저 나온 뻴리뻬의 ‘뭔가’를 먹어보았다. 튀김과 아보카도 소스는 조금 평범했으나 생으로 나온 치즈가 모든 걸 압도했다. 이 치즈를 따로 구매 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나의 ‘뭔가’가 나왔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과하게 달달한 데다 석류향이 너무 강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생소한 맛에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S의 음식은 대성공이었다. 나는 한 입만 먹겠다는 말을 번복하고 몇 번이고 퍼먹었다. 분명 뻴리뻬의 음식에 나온 치즈를 녹인 것이리라. 

역시 치즈를 따로 구매 해야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갑자기 경쾌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네 명의 연주자들이 클래식 기타를 현란하게 연주하며 노래를 했다. 앞 테이블의 아기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우리는 잠시 식사를 멈추고 음악을 감상했다.

풍문으로 들어왔던 멕시코시티는 갱단과 택시 강도가 들끓는 도시였다. 하지만 하루 동안 느꼈던 멕시코시티는 내가 상상했던 분위기와 상당히 달랐다. 뻴리뻬는 과거 멕시코시티는 많이 위험했지만 지금은 치안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덧붙였다. 맞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다만 아침까지 ‘쫄아’있었던 가슴을 조금은 내려놓고 멕시코시티를 즐기기로 했다. 흥겨웠던 연주가 끝나고, 우리는 연주자들을 향해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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